신앙에서 속물성은 초월성이 강조될수록 두드러진다. 빛이 강해지면 그림자가 진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근본주의일수록 속물화되는 경향이 강하다.
절대 권력이 부패하듯 절대 진리에 대한 맹신은 인간을 속물화하고 타락시킨다. 집단화되면 세상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기독교의 근본주의, 이슬람의 IS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극단은 극단과 통한다. 종교에서도 아예 세상을 버리거나, 아니면 세상에 더 집착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이 우상이 된다. 맘몬 숭배가 종교의식을 빌려 성행하는 세상이다.
기독교에서 흔히 말하는, '믿음이 좋다'는 사람을 만나면 우선 경계를 하게 된다. 대단히 속물화되어 있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은 자신의 속물성에 면죄부를 주는 도구다.
한국 교회는 경제 성장과 쌍두마차가 되어 팽창했다. 신자의 속물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이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한국 교회의 미래는 없다. 머지않아 유럽에서 보는 텅 빈 성당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한국 교회와 신자의 가장 큰 문제를 나는 속물성이라고 본다. 이는 값싼 은혜와 구원을 설파하는 강단에 책임이 있다. 초월성을 탈색해야 속물성도 해결 된다.
미래의 종교는 이성에 기반을 둘 것이다. 탄탄한 현실 인식과 인문학적 상상력이 강조될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바탕이 초월성이란 것은 변할 수 없다. 미래의 종교는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혼의 갈구에 대응할 것이다.
종교는 각성제가 되어야지 마취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더 높은 곳으로 고개를 들게 해야지 지상의 늪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된다. 미래의 신자는 예민한 감성과 공생의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수험 철이 되면 100일 기도 현수막이 걸린다. 내 자식 붙게 되면 남의 자식은 떨어진다. 이것도 기도일까? 가톨릭 신자는 강복 시간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무엇을 기구할까? 세상의 복과는 다른 복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성의 종교는 이런 무감각을 용서하지 않는다. 조금만 성찰해 보면 무엇이 잘못이란 걸 안다. 뿌리가 죽어가는데 잎에다 물만 뿌린다고 나무가 살아나지 않는다. 종교의 역할은 근본을 보게 하는 데 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종교는 너무 정체되어 있다. 고리타분한 교리가 발목을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속물의 때를 벗는 게 제일 시급하다. 새 술은 익어가는데 담을 그릇은 준비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