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굴뚝집 / 김명국

샌. 2016. 5. 13. 12:38

꿈이 있다면 비록 허름하더라도 내 집을 갖는 일이다

논도 한 서너 마지기쯤 있으면 좋겠다

텃밭도 조금 있고, 남들도 갖기 꺼리는 밭이라도

내 몫이 된다면 그곳에다 채소를 심으리라

 

경운기는 있어야겠지만 없어도 괜찮겠지

가끔씩은 멀리 가야 하므로, 헌 자전거가 하나 있어야겠다

지붕은 슬레이트든 기와든 상관없겠지만

초가집이면 더욱 좋겠다

손수 들에서 거둔 짚으로 이엉을 얹고 용마름을 해두리니,

지붕을 잇는 가을날이면 눈부시리라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행복하리

 

일하는 날보다 일하지 않는 날이 더 많더라도

근심 걱정이 없었으면 좋겠다

책도 읽고 시도 쓰고 답답하면 논둑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떠날 수 있다면,

남들이 손가락질해도 할 수 없겠다

 

옆집에서 넘어온 오이순을 탐내지 않았듯

눈이 많이 오는 겨울이면

아랫목이 뜨끈뜨끈하게 군불을 지피고

아침은 굶었어도 정신이 맑아지는 점심때쯤 해서는

어쩌다 한 편의 시가 쓰일 수도 있으리

봄이 되어 제비가 찾는다면 집을 짓게 내버려두리라

 

이른 아침 지저귀는 새소리에 눈이 떠진다면 얼마나 행운이겠는가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거의 매일이다시피 한다면

부지런을 떨기보다는 게으르게,

곡식을 심고 가꾸고 거두는 일만은 잊지 않으리라

 

가난은 수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툇마루에 드는 봄볕처럼

남은 생(生)은 그렇게 작고 하찮은 일에

다 써버린대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리,

꿈이 있다면 세상의 포근한 집 한 채 되는 일이다

 

- 굴뚝집 / 김명국

 

 

<베트남 처갓집 방문>이라는 시집에서 만났다. 시인의 부인이 베트남에서 온 모양이다. 시집의 많은 부분이 베트남 처갓집을 소재로 하고 있다. 전편에서 소박하고 순수한 시인의 마음이 느껴진다. 초가집 한 채와 얼마간의 전답을 갖고 싶다는 시인의 작은 소망이 이 시에서 읽힌다. 그러면서 집을 갖는 일보다 포근한 집 한 채 되는 일이 중요하다고 시인은 말한다. 쾌락을 좇느라 우리는 얼마나 많은 소중한 것들을 팽개치고 있는지, 가식에 빠져 있는 나를 부끄럽게 하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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