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 28

11월의 마지막 날

10월의 마지막 날은 떠나가는 옛 사랑이 뒤돌아보며 보이는 씁쓸한 미소라면, 11월의 마지막 날은 미련 없이 돌아서는 옛 사랑의 뒷모습이다. 11월은 이 계절만이 가지는 쓸쓸한 아름다움이 있다. 주변은 떠나가는 것들의 따스한 송별사로 가득하다. 애잔한 여운을 남기는 11월의 쓸쓸함이 좋다. 음식이 오래 씹을 수록 단맛이 나듯 쓸쓸함도 그러하다. 한 장 남은 달력의 아쉬움도, 쓸쓸함과 다불어 함께 즐길 일이다. 11월의 마지막 날, 여주의 한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카페라떼, 목련차, 셋이 마주보며 앉다. 인생이라는 길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을 생각한다. 깊은 허공 같은 무상(無常)을 생각한다.

사진속일상 2019.11.30

떠도는 자의 노래 / 신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다시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 떠도는 자의 노래 / 신경림 "이 물을 마시는 이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옳다. 영혼의 측면에서 인간은 갈증을 느끼는 존재다. 물은 잠시의 해갈일 뿐 다시 갈증이 찾아온다. 잘못 소금물..

시읽는기쁨 2019.11.28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나라에서 뛰어난 SF 작가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안타깝다. 도서관에서 SF 분야의 책을 찾아보면 대부분이 외국 작가의 번역서다. SF는 과학과 인문학의 지식을 배경으로 우주적 상상력이 동반되어야 좋은 작품이 만들어진다. 우리에게도 멋진 SF 작가가 탄생할 정신적 토양은 만들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은 김초엽 작가의 SF 단편 모음집이다. 작가는 1993년생이니 20대의 촉망 받는 젊은이다. 2017년에 '관내분실'로 한국과학문학상을 받았다. 책에는 여섯 편의 SF 단편이 실려 있다. 그중에서 제일 흥미를 끈 소설은 '관내분실'이다. 미래의 도서관은 죽은 자의 마음을 업로딩한 데이터를 보관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도서관에 찾아가서 망자를 만나며 추모한다. '마인드'와 접속하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살..

읽고본느낌 2019.11.27

호인보다는 까칠한 사람이 낫다

모든 이들과 두루 사이좋게 지내며 성격이 좋은 사람을 보통 호인(好人)이라고 부른다. 사전에서는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본바탕이나 됨됨이가 좋은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다. 덩치가 있으면서, 서글서글하고 밝은 풍모를 가진 모습이 대체적인 호인의 이미지다. 무슨 일을 당해도 허허 웃으며 화를 내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저 사람은 호인이야."라고 말할 때는 상찬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나는 그러한 호인의 긍정적인 평가에 딴지를 걸고 싶다. 우선, 호인의 특징은 무색무취하며 제 색깔이 없다. 그래서 무골호인(無骨好人)이란 말이 생겼다. 다양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호인은 대체로 체제 지향적이며 보수적이다. 호인의 철학은 '좋은 게 좋은 것'이다. 내가..

길위의단상 2019.11.26

금강경[1]

나는 들었네. 이와 같이 들었네. 그 때는 행복하신 님께서 사와띠에 계실 때. 제따 숲, 외로움 벗는 동산의 번뇌 다한 스님들, 천이백오십 그 성자들이 님과 함께 살았네. 하늘 맑고 바람 산들한 사와띠의 아침 나절, 부처님과 성자들이 공양 드실 때 되었네. 님께서는 가사 입으시고 발우 고이 드시고 연꽃 같은 발을 들어 성안으로 가셨네. 일곱 집 맑은 밥을 차례대로 비시고 계시던 자리 돌아오시어 함께 공양을 드셨네. 공양을 다 드시자 가사 발우 거두시고 손발을 씻으신 뒤 자리 펴고 앉으셨네. - 금강경 1(법회가 열리던 날, 法會因由分) 우리말로 쉽게 번역된 금강경을 우연히 만났다. 호미 출판사에서 펴낸 로 이포 선생이 옮겼다. 첫머리를 읽다가 노래 가사 같은 아름다운 문장에 반해 버렸다. 작게 소리 내어..

삶의나침반 2019.11.25

손주의 '뭣이 중헌디'

손주가 집에 오면 할머니는 뭐든지 먹이고 싶어 한다. 어제는 손주가 좋아하는 짜장을 준비했다. 손주는 짜장을 밥에 비벼 먹는 짜장밥을 무척 좋아한다. 유치원과 태권도 학원에 다녀와서 배가 고팠는지 손주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천천히 먹으라고, 안 그러면 체한다고 물을 권하면서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손주는 캑캑거리더니 급기야 먹은 걸 토하고 말았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손쓸 겨를이 없었다. 손주는 울상이 되어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할머니는 그릇을 치우며 놀리듯 말했다. "그것 봐. 천천히 먹으랬지. 아, 이 아까운 짜장을 어쩌나." 손주의 심드렁한 얼굴이 점점 화난 표정으로 바뀌더니 이렇게 톡 쏘는 것이었다. "할머니! 사람이 중요해? 음식이 중요해?" 우리는 할 말..

참살이의꿈 2019.11.24

여드레 만의 외출

두 주일이 지나니 그제야 감기가 떠날 채비를 한다. 감기는 증상이 심하지 않으면 그냥 집에서 버티는 편이다. 되도록 병원에는 가지 않는다. 백수의 좋은 점이다. 직장에 다닐 때는 주사도 맞고 약을 먹어야만 했다. 그러나 일이 없어진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저도 지겨워지면 언젠가는 떨어져 나가겠지, 하며 느긋하게 기다린다. 고향에서 외할머니가 개를 기를 때 보면 개는 몸에 이상이 생기면 활동을 멈추고 그냥 가만히 엎드려 있는다. 음식을 갖다줘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냥 눈만 끔벅끔벅 할 뿐이다. 말을 못 하니 어디가 아픈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런 채로 여러 날이 지나간다. 잘못하면 죽겠구나 싶다가도 어느 날 보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생기를 되찾는다. 개한테는 병원도 없고 약도 없다. 자연치유가 되..

사진속일상 2019.11.23

진경 / 손세실리아

북한산 백화사 굽잇길 오랜 노역으로 활처럼 휜 등 명아주 지팡이에 떠받치고 무쇠 걸음 중인 노파 뒤를 발목 잘린 유기견이 묵묵히 따르고 있습니다 가쁜 생의 고비 혼자 건너게 할 수 없다며 눈에 밟힌다며 절룩절룩 쩔뚝쩔뚝 - 진경(珍景) / 손세실리아 시집 를 폈을 때 맨 처음에 만난 이 시에 가슴이 먹먹해져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이 시에 묘사된 노파의 이미지가 떠오르면 무엇엔가 체한 것 같기도 하고, 칼에 베인 것 갈기도 한 통증이 생겼다. 백화사 굽잇길의 노파를 연민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여겼다면 그럴 리가 없었을 것이다. 생명(生命)을 직역하면 '살아내라는 명령'이 아닌가. 그러나 고단한 인생길일지라도 한 아픔이 다른 아픔을 보듬고 함께 걸어갈 때 꽃이 되고 진경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애잔한 생명붙..

시읽는기쁨 2019.11.22

할머니의 제라늄

제라늄은 희한하다. 어쩜 이렇게 쉼 없이 피고 지기를 멈추지 않을까. 7년 전에 산 제라늄이다. 줄기는 고목처럼 굵고 뒤틀려 있다. 천일홍, 무궁화라는 꽃이 있지만 이름만 그럴 뿐 제라늄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사시사철 꽃을 피워내는 제라늄의 한결같음이 경이롭다. 제라늄의 꽃말을 찾아보니 '우정' '진실한 사랑' 등과 연관되어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고사 속 미생처럼 우직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경박스러운 세태에서 제라늄의 일관성이 더욱 돋보인다. 바라봐주지 않아도 제라늄은 그대 향한 그리움을 버리지 않고 있다. 지하철역에 전시된 노인 복지관 어르신들의 작품을 보았다. 이제야 한글을 깨우치신 한 할머니의 시가 눈에 띄었다. 제목이 '아름다운 만남'이다. 나는 글을 몰라 평생을 눈..

꽃들의향기 2019.11.21

7인의 신부

옛날 영화를 한 편 봤다. 1950년대에 제작한 '7인의 신부'다. 미국에서 뮤지컬 영화의 전성기에 나온 대표적인 영화다. 스토리는 아주 단순하다. 배경은 19세기 중반 애리조나주에 있는 어느 마을이다. 남자 7형제가 산골에서 농장을 하며 살아가는데 장남 아담은 마을에 내려왔다가 식당에서 일하던 밀러와 첫눈에 반해 결혼한다. 세상과 단절되어 살던 동생들도 마을 축제장에 갔다가 동네 아가씨들에게 반해 결혼을 꿈꾼다. 결국은 아가씨들을 납치해 오게 된다. 눈사태로 길이 끊기고 긴 겨울 동안 함께 지내면서 정이 들고 봄에 모두가 결혼하게 된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황당한 요소가 많다. 그러나 19세기라는 시대 배경을 생각하면 그리 무리한 설정도 아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보쌈'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남자들은 ..

읽고본느낌 2019.11.20

조커

점점 고착화되어 가는 계급사회에 대한 경고로 읽은 영화다. 우리만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 어디나 양극화 문제는 심각하다. 부는 소수에게 편중되고 다수는 점점 가난과 소외의 사각지대에 방치된다. 계층 사이의 이동이 불가능하면 계급사회가 되는 것이다. 계급 차이는 갈등을 낳고 결국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 나오는 아서는 루저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병든 노모를 모시고 힘들게 살아간다. 영화는 그가 사회로부터 멸시와 조롱, 폭력까지 당할 때 '조커'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조커의 살인을 정당화하거나 동정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할 때 악마로 변하는 건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섬뜩하고 강렬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도 묵직하다. '조커'는 영화 '기생충'과 닮..

읽고본느낌 2019.11.19

감기 불청객

몸이 부실해서 한 해에 두 번은 감기에 걸린다. 주로 가을에서 봄 사이에 찾아온다. 올 초겨울에는 독감에 걸려서 한 달 정도 고생했다. 그 뒤 봄에 또 한 번 감기에 걸렸고, 이번 가을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일부러 무리한 일을 피하고 조심하는 데도 불청객은 어김없다. 며칠 전 사위와 밖에 나가 당구를 치고 맥주 두 잔을 마시고 밤거리를 걸은 게 전부였다. 다음 날 기력이 빠진 걸 느꼈지만 설마 감기에게 틈을 보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정도를 가지고 콜록거린다면 세상 사람들은 매일 감기를 달고 살아야 할 것이다. 아프면 절실히 느낀다. 몸 튼튼한 사람이 제일 부럽다. 나는 선천적인 약골이다. 무리하면 어떤 후유증이 오는지 잘 안다. 그래서 조심하는 편인데 모르는 사람들은 엄살을 부린다고 말..

길위의단상 2019.11.18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 김기택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부드럽고 기름진 잠을 한순간도 흘리지 않는다. 젖처럼 깊이 빨아들인다. 옆에서 텔레비전이 노래 불러대고 아빠가 전화기에 붙어 회사 일을 한참 떠들어대도 아기의 잠은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다치지 않는다. 어둠속에서 수액을 퍼올리는 뿌리와 같이, 잠은 고요하지만 있는 힘을 다하여 움직인다. 아기는 간간이 이불을 걷어차거나, 깨어 울거나, 칭얼거리며 엄마 품을 파고든다. 그래도 엄마는 젖을 주거나 쉬를 누이지 않는다. 얼핏 깬 듯 보여도 실은 곤히 자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몽유병자처럼 허깨비 몸은 움직이지만, 잠은 한치도 흔들리거나 빈틈을 보이는 일이 없다.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가 아침 햇빛을 받아 환하게 깨어난다. 밤사이 훌쩍 자란 풀잎 같이 이불을 차고 일어난다. ..

시읽는기쁨 2019.11.16

산황동 느티나무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산황동에 있는 느티나무다. 일산이라고 하면 신도시가 연상되는데 아직 이런 시골 마을이 남아 있다. 나무는 둘레가 9m를 넘을 정도로 우람하지만 위로 뻗은 줄기는 많이 상했다. 한쪽 줄기는 험난했던 세월을 웅변하듯 용트림의 기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최근에 가지를 이어 붙인 흔적도 보인다. 이 느티나무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이성계의 명으로 무학대사가 새 도읍지를 찾아다닐 때 북한산 아래를 살피다가 이곳을 눈여겨보고 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그중 두 그루는 죽은 남은 한 그루가 이 나무라는 얘기다. 나무 수령은 자동으로 650년 정도 되어야겠다.

천년의나무 2019.11.15

무지

무지(無知)는 '아는 것이나 지식 없음'이 아니다. 낫 놓고 기역자를 모르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현대인은 오히려 너무 많이 알아서 탈이다. 손가락만 몇 번 까닥이면 세상의 온갖 지식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러므로 무지의 정의는 바뀌어야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현대의 무지다. 무지에서 확신이 생긴다. 이럴 때 아는 것과 경험은 독이 된다. 과거 어느 대통령은 "내가 해 봐서 아는데"라는 유행어를 남겼다. 무지에 만용이 더해지면 꼰대가 된다. 무지는 판단하고 분별하길 좋아한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라는 확신이 깃발을 들고 거리로 몰려다니게 한다. 확신은 위험하고, 신념은 위태하다. 세상의 본질은 흑과 백이 아니라 안개 같은 것이다. 구름 같은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살이의꿈 2019.11.14

성지(21) - 마재성지

32. 마재성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마재성지는 순교자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정약현, 정약전, 정약용 등 4형제가 태어난 곳이다. 정씨 일가는 천주교와 깊은 관련을 맺었다. 정약현의 부인이 이벽의 누이이고, 사위가 황사영이다. 그리고 정씨 형제의 누이는 한국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의 부인이다. 형제 중에서 정약종은 끝까지 신앙을 지켜 순교한 한국천주교회의 기둥이다. 정약종은 형제 중 제일 늦게 신앙을 받아 들였지만, 불타는 열성으로 신앙인의 길을 걸었다. 최초의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회장으로 전교에 힘썼고, 한글 교리서인 을 편찬했다. 그 뒤 교리서인 를 쓰던 중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형을 당하셨다. 다산 정약용은 초기에는 신앙 생활을 했으나 신유박해 때 배교함으로써 ..

사진속일상 2019.11.12

힘이 있어야 싸우지

평생을 싸움 한 번 안 하고 살아온 부부도 있다지만 우리는 자주 티격태격한다. 그나마 젊을 때보다는 다투는 빈도나 강도가 줄어들었다. 퇴직을 했으니 얼굴 맞대고 살아가는 시간이 늘어났는데 이만만 해도 다행이지 싶다. 애정이 없으면 다툴 일도 없지 않은가. 아직 얼굴 쳐다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다. 다투는 원인은 주로 내 버럭, 하는 성질 때문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큰소리부터 치니 서로 목소리가 높아진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순간적으로 화가 불같이 일어난다.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잠시면 족하다. 큰소리치는 사람이 이긴다고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반대다. 꼬리를 내리는 건 늘 내가 먼저다. 화도 잘 내고 용서도 쉽게 구한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뒤끝이 없어진 게 과거와 달라진 점이다...

길위의단상 2019.11.11

어떻게 죽을 것인가

미국의 의사면서 저술가인 아툴 가완디(Atul Gawande)가 쓴 책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를 다루는 현재의 의료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본인의 임상 경험을 토대로 대안을 찾으려고 시도한다. 제도뿐만 아니라 환자 개인이나 가족의 책임 또한 크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역시 바뀌어야 한다. 오래 사는 게 행복일까?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야 마다할 리 없겠지만 길어진 수명은 병원 신세를 지고 말년에는 요양원에 수용되어야 하는 게 문제다. 질병과 죽음 사이에 의학적 투쟁의 길이가 길어지고 있다. 과연 생명만을 연장하는 치료가 인간의 존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 책은 여러 사례를 들며 반복해서 질문을 던진다. "앨리스 할머니는 사생활과 삶에 대한 주도권을 모두 잃었다. 병원 환자..

읽고본느낌 2019.11.10

연꽃이 피어나네 / 한산

너른 바위에 홀로 앉았노라니 계곡물 소리에 가슴 시리네 고요한 풍광 눈부시게 아름답고 안개 속에 희미하게 바위 드러나네 편안한 마음으로 쉬노라니 지는 해에 나무 그림자 낮아졌네 내 스스로 마음자리 들여다보니 흙탕물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네 盤陀石上坐 谿澗冷凄凄 靜玩偏嘉麗 虛巖蒙霧迷 恰然憩歇處 日斜樹影低 我自觀心地 蓮花出於泥 - 寒山 가을이 짙어가는 시절에 한산의 시를 읽는다. 한산이 듣던 천태산(天台山)의 맑은 계곡물 소리에 귀 기울인다. 물욕에 찌든 이 검은 속내를 조금이나마 씻어가 주길 기대하면서. 나는 언제쯤 구차한 자리 훌훌 털고 편안한 마음으로 쉴 수 있으리. 제 마음자리 들여다보며 '흙탕물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네'라고 노래할 수 있으리. 한산은 다른 시에서 자신을 이렇게 드러냈다. 吾心似秋月 碧..

시읽는기쁨 2019.11.09

성지(20) - 연풍성지

31. 연풍성지 1801년 신유박해 때 주문모 신부와 주요 교회 선조들이 순교하자 교우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산맥을 따라 남하하며 숨어 살게 된다. 충북 연풍 지방은 문경새재, 이화령을 넘어 경상도와 연결되는 길목이며 교차로로 천혜의 은거지이기도 했다. 교우촌의 보금자리가 된 연풍은 1866년 병인박해 때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순교의 영광을 받은 곳이다. 또한 연풍은 황석두 루카(1813~1866) 성인의 고향이기도 하며 이곳 연풍성지에 성인의 묘소가 있다. 천주학을 버리든지 작두날에 목을 맡기든지 선택해야 할 때 성인은 "결코 진리를 버릴 수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작두날에 목을 내밀었다. 평신도로서 교회를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성인을 페롱 신부는 '조선교구에서 가장 훌륭한 회장이었다'고 증..

사진속일상 2019.11.08

스무 포기 김장한 날

전에는 고향에서 형제들이 모여 같이 김장을 했지만, 각자의 집에서 따로 하게 된 건 4년이 된다. 어머니 기력이 떨어지신 게 제일 큰 이유다. 함께 모이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번거롭고 신경 쓰이는 게 많다. 각자 제 집 입맛에 맞게 알아서 하니 간편해서 좋다. 세월이 흐르면 변하는 게 옳다. 이번에는 이웃이 농사 짓는 밭에서 배추 스무 포기를 구해 담구었다. 이전에 비해 양이 많아진 것은 처제네 몫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조카가 수험생이라 김장으로나마 도와주려는 것 같다. 처제는 오후에 와서 잠깐 일손을 거들었다. 배추 스무 포기 김장 준비하는 데도 사흘이 걸렸다. 김장을 끝내고 나니 아내는 다운 직전이다. 시골 어머니는 80대의 나이에도 자식들 김장 준비를 홀로 다 하셨다. 심고 거두며 절인 배추가 ..

사진속일상 2019.11.07

명륜당 은행나무(3)

동료와 단풍 든 창경궁을 산책한 뒤 명륜당 은행나무 앞에 왔다. 이 나무를 보러 올 때마다 설렌다. 이번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같은 나무지만 만날 때마다 감흥이 다르다. 그중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풍경은 가을이 되어 샛노랑으로 물들 때다. 지금은 녹색이 노란색으로 변하는 중간에 있다. 가만히 바라보니 이 색깔 또한 매력이 있다. 나무 아래서는 단체로 온 여고생들이 성균관과 은행나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명랑하다. 이제 갓 피어나는 청춘은 이 가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오래된 은행나무에는 유주(乳柱)가 생긴다. 마치 종유석을 닮았다. 명륜당 은행나무에도 유주가 뚜렷이 보인다. 유주는 주로 숫나무에 생긴다는데 그렇다면 명칭이 어울리지 않..

천년의나무 2019.11.06

2019년 가을 창경궁

거의 2년 만에 연락이 된 전 직장 동료 넷이 서울에서 만났다. 때가 가을인지라 내 제안으로 창경궁 단풍 감상을 겸해 고궁에 모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웠고, 옛날 직장 생활 얘기에 웃음꽃이 피었다. 올 단풍은 예년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창경궁만 아니라 다른 곳 단풍도 맑은 맛이 떨어진다. 그래도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다." 버스 타고 가는 길가에서 본 글귀다. 옳거니, 하며 무릎을 쳤다. 어쩌면 봄보다 더 화려한 계절이 가을이다. 식물은 제 마지막을 이리도 아름답게 장식한다. 억지로 하려는 게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허나 사람은 어떠한가. 아무리 노력해도 한 그루 나무를 닮을 수 없다. 창경궁을 한 바퀴 돈 뒤 ..

사진속일상 2019.11.06

오가리 느티나무(3)

가을물 든 이 느티나무를 보고 싶었다.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에 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다. 천연기념물 382호로 지정되어 있으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느티나무라 해도 손색이 없겠다. 지난 두 차례 방문에서는 초록잎이 무성한 여름이었다. 두 그루 중 언덕에 있는 느티나무를 상괴목, 도로 쪽 아래에 있는 느티나무를 하괴목이라 한다. 밑의 사진은 하괴목이다. 아래는 상괴목이다. 때가 좀 더 지나야 갈색 옷으로 갈아입을 것 같다. 하괴목에 비해 상괴목은 아직 녹색 기운이 많이 남아 있다. 바로 이웃하고 있지만 나무마다 개성이 다르다. 같은 나무라도 햇빛을 받는 양에 따라 잎이 변색되는 정도가 다르다. 이런 거목일 수록 그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 완전히 무르익은 건 아니지만 두 노거수의 가을을 만나고 왔다.

천년의나무 2019.11.05

괴산 가을 나들이

아내와 괴산에 가을 나들이를 다녀왔다. 산막이옛길을 걸으러 가는 길에 이왕이면 단풍 구경할 겸 주변 몇 군데를 돌아보았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연풍IC를 나와서 처음 들린 곳은 수옥폭포였다. 조선 숙종 시기에 연풍 현감으로 있던 조유수가 여기에 정자를 짓고 수옥정(漱玉亭)이라 이름한 데서 수옥폭포라 불렸다고 한다. '구슬을 씻듯' 영롱하게 떨어지는 폭포라는 뜻일까. 암반과 어우러진 폭포 주변의 경치가 뛰어났다. 폭포로 오가는 길의 단풍이 무척 아름다웠다. 다음에는 쌍계계곡으로 향했다. 계곡을 따라가는 드라이브 길이 깊은 강원도에 온 것 같이 깊었다. 계곡의 비경을 다 보지는 못하고 소금강휴게소까지만 다녀왔다.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며 가을의 빛을 감상했다. 산막이옛길 걷는 것만 아니라면 더 깊숙이 들어가며 ..

사진속일상 2019.11.05

피아니스트

이자벨 위페르를 만나고 싶어 찾아본 영화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 작품으로 2002년에 개봉된 뒤, 2016년에 재개봉된 영화다. 인간 내면의 욕망과 병적인 심리를 잘 그려낸 영화다. 짜임새도 좋고, 위페르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자기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사랑은 아니다. 사랑을 가장한 집착일 뿐이다. 에리카(이자벨 위페르 역)를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와 에리카 본인의 변태적인 사랑 방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머니와 에리카는 가정환경에서 유래한 정신적 상처를 갖고 있다. 건전한 사랑의 방식을 배우지 못한 두 사람은 파괴적인 방법으로 사랑을 표출한다. 그것이 결국 주변 사람까지 황폐시킨다. 이 영화는 19금이다. 일부 성적인 표현은 수위가 높다. 인간은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고, 이 영화는 ..

읽고본느낌 2019.11.03

혼자 걷는 뒷산

가을 짙어가는 뒷산을 혼자 걷다. 소문난 장소를 찾지 않아도 가을은 바로 옆에 와 있다. 나만의 산길이 무척 호젓하고 좋았다. 두 시간여 산길에서 딱 한 사람밖에 만나지 못한 나를 위한 길이었다. 세상의 일에 대한 성취나 소유에서 오는 즐거움도 있지만 오직 존재 자체가 주는 기쁨도 있다. 지상(至上)의 행복은 지상(地上)의 일을 떠나 있다. 오늘처럼 뒷산을 홀로 걸을 때 오로지 존재에서 오는 행복을 잠깐 맛본다. 오늘 산길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은 환자복을 입은 분이었다. 뒷산 밑에 요양병원이 있는데 주로 중환자가 계신다. 아내가 봉성체 봉사하러 이 요양병원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데 환자의 안타까운 사연을 간접적으로 듣고 있다. 오늘 산길에서 만난 분은 환자복 위에 겨울 패딩을 입고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한..

사진속일상 2019.11.02

가을바람의 유혹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면 해보고 후회하라는 말이 있다. 결혼을 망설이는 사람에게 잘 쓰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해서 후회할 바에야 차라리 안 하는 게 더 나을지 모른다. 안 했다면 혼자만 후회하면 된다. 그러나 일을 저지르면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 세상을 위해서는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안 하는 게 차라리 공익이 될 수 있다. 나중에 다시 태어나도 나와 결혼할 꺼야? 이런 질문을 던지는 바보 같은 사람도 있다. 거짓이라도 좋으니 달콤한 말 듣기를 바라는 걸까. 만약 아내가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결혼하지 않을 거야!" 현재의 결혼 생활이 불행해서가 아니다. 내가 결혼 생활에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상대와 맞추고 어울려 살아갈 마음 바탕이 부족하..

참살이의꿈 2019.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