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 31

2019 끝날 당구로 놀다

2019년의 끝날, 대학 동기들과 당구로 놀다. 한 해의 끝이라는 묘한 분위기가 있는 날이다. 하나 같이 당구공이 춤을 추고, 컨트롤하는 데 애를 먹는다. 낮에 마신 막걸리 탓만은 아닐 것이다. 쏜살같이 한 해가 지나갔다고, 저녁 자리에서 다시 쓴웃음 지으며 소주잔을 부딪치다. 새해에 대한 기대와 희망보다는 지나간 날에 대한 아쉬움으로 헛헛한 가슴을 달래는 나이가 되었다. 다들. 낯설게 다가오는 2020에도 곧 익숙해지겠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새해에는 좀 더 너그러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또한 나에 대해서도. 이젠 그럴 나이쯤 되지 않았느냐고.

사진속일상 2019.12.31

장수 지옥, 마지막 사진 한 장

의술이 발달하고 생활 환경이 개선되면서 평균 수명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여성의 평균 수명은 거의 90세에 가깝다. 일본은 2007년에 이미 노인 인구가 21%를 넘어 초고령사회가 되었고, 우리나라는 2017년에 노인 인구 비율이 14.8%로 고령사회에 들어섰다. 일본이 겪는 문제를 우리 역시 뒤따르며 경험해야 한다. 노년과 죽음 문제를 다루는 책 두 권을 읽었다. 과 이다. 옛날에는 장수가 축복이었고 노인이 존경을 받았다. 노인이 드물었던 시대의 이야기다. 오래 사는 대가는 쇠약, 고통, 질병에 시달리며 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동반한 채 몇 년씩 버텨야 한다. '죽지 못해 산다'라는 말이 결코 노인의 엄살이 아니다. 은 제목이 쇼킹하다. 마쓰바라 준코라는 일본 작가가 썼다..

읽고본느낌 2019.12.30

'나라' 없는 나라 / 이시영

어디 남태평양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섬은 없을까. 국경도 없고 경계도 없고 그리하여 군대나 경찰은 더욱 없는. 낮에는 바다에 뛰어들어 솟구치는 물고기를 잡고 야자수 아래 통통한 아랫배를 드러내고 낮잠을 자며 이웃 섬에서 닭이 울어도 개의치 않고 제국의 상선들이 다가와도 꿈쩍하지 않을 거야. 그 대신 밤이면 주먹만 한 별들이 떠서 참치들이 흰 배를 뒤집으며 뛰는 고독한 수평선을 오래 비춰줄 거야. 아, 그런 '나라' 없는 나라가 있다면! - '나라' 없는 나라 / 이시영 선거법과 공수처법 처리를 두고 국회가 시끄럽다. 무한한 권력욕과 제 이익 챙기기밖에 모르는 정치꾼들의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똑 같다. 언제 아니 그런 적 있었느냐고 나를 달래면서, 시인처럼 '나라' 없는 나라를 꿈꾼다. 쇠붙이와 껍데기의 ..

시읽는기쁨 2019.12.29

근육 기르는 재미

올해는 산행이나 걷기에서는 낙제점이다. 다른 해에 비하면 활동량이 반 토막이 났다. 대신 헬스장에서 재미를 발견했다. 운동 영역이 야외에서 실내로 바뀌었다고 하겠다. 헬스장 안에 '인바디(InBody)'라는 체성분분석기가 있다. 원리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몸의 체성분, 골격근과 지방, 비만 등을 진단한다. 우연히 그 위에 올라섰는데 골격근과 체지방량이 표준 범위 밖으로 나왔다. 골격근은 뼈에 붙은 근육으로 신체 활동이나 운동과 관계있다. 25kg 이상이 표준인데, 나는 21kg으로 미달이었다. 근육 운동을 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체지방도 표준을 한참 벗어났다. 그래서 목표가 생겼다. 늙을수록 근육이 중요하다는 데 최소한 표준값의 하한치에는 걸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근육 운동을 ..

길위의단상 2019.12.28

금강경[5]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래의 몸 모습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여래의 몸 모습으로 여래를 뵐 수 없겠습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은 여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 장로에게 말씀하셨네. "있는 모습도 없는 모습도 다 허망하니, 모습이 모습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볼 것입니다." - 금강경 5(있는 그대로 보라, 如理實見分) '나 없는 나'는 응당 '여래 없는 여래'로 연결되지 않을까. 수보리에게 하신 부처님 말씀이 이 분(分)의 핵심이다. "있는 모습도 없는 모습도 다 허망하니, 모습이 모습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볼 것입니다[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참 아름다운 말씀이다. 무슨 의미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몰라..

삶의나침반 2019.12.27

두 교황

2005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한 뒤 열린 콘클라베에서 베네딕토 교황이 선출되었을 때 무척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베네딕토 교황은 학자 출신의 완고한 보수주의자로 알려져 있어서 천주교의 미래가 어둡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변화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것은 종교도 마찬가지다. 교황은 종신제다. 그런데 베네딕토 교황은 도중에 사임했다. 인기가 없었는 데다 측근의 비리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사임은 굉장히 의외의 결단이었다. 베네딕토 교황의 유일하게 훌륭한 업적은 사임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 영화 '두 교황'은 베네딕토 교황의 사임 전후에서 시작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새로 선출되는 과정을 담았다. 영화 첫 화면에는 사실에 기반한 픽션이라는 자막이 나온다. 두 교황은 가치관이나 성격 등 ..

읽고본느낌 2019.12.26

효도와 우애

해외 패키지여행에서는 가족과 함께 오는 팀이 제일 많다. 주로 부부나 자매이고, 모녀 사이도 자주 눈에 띈다. 여행도 여자 중심으로 팀이 꾸려진다. 지난 스페인 여행에서는 남자 삼 형제가 부부끼리 함께 왔다. 여러 차례 패키지여행을 했지만 형제 부부가 함께 다니는 건 처음 보았다. 식사 시간에는 같은 식탁에 앉을 기회가 많았는데 형제와 동서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부러웠다. 50대 후반과 60대 초반의 나이들인데 마치 어릴 때 사이좋은 형제들처럼 우애가 있었다. 형제끼리 자주 여행을 다니고, 한국에서도 가까이 살며 자주 만난다고 했다. 그 비결을 배우고 싶었지만 가르쳐 준다 한들 내 능력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많은 집안에서 형제간에 갈등이 있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다. 자랄 때 형제이지 커서..

참살이의꿈 2019.12.25

내가 싫어지는 날

내가 싫어지면서 우울한 날이 있다. 그런 때는 운동화 끈을 매고 집 밖으로 나간다. 집안에 있으면 어두운 감정의 늪에 점점 빠져들기 때문이다. 정처 없이, 아무 생각 없이, 타박타박 걷다 보면 토닥토닥 나를 다독여주는 손길을 느낀다. 그리고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린다. "다 괜찮아." "아무렇지 않은 거야." 오랜만에 걸어보는 경안천이다. 경안천에는 한낮이 되었는 데도 아침 서리가 남아 있다. 징검다리를 건너 겨울 햇빛을 정면으로 쬐며 남쪽으로 내려간다. 시간이 지날 수록 햇볕에 서리가 녹듯 마음 속 응어리가 풀어진다. 못난 '나'가 내 안에서 그제야 미소를 짓는다. 두 시간여를 걷고 시장 안에 있는 단골 순댓국집에 들어간다. 점심때가 한참 지난 오후라 식당 안은 손님 너덧 명이 있을 뿐 조용하다. ..

사진속일상 2019.12.24

얼떨결에 / 고증식

나이 팔십에 여주 당숙은 다신 수술 안 받겠다 선언하고 두 해쯤 더 논에서 살다 돌아갔다 누구는 애통해하고 누구는 대단한 결단이네 평하지만 사실은 무서워서 그랬단다 얼떨결에 한번은 했지만 수술받고 깨어날 때 너무 아프더란다 이건 조카한테만 하는 얘기지만 치과도 안 가본 놈이 선뜻 따라가고 남자들 군대도 멋모를 때 한번 가는 거 아니냐고 얼떨결에 세월만 갔지 나이 먹었다고 다 깊어지는 게 아니더라고 죽을 때는 아마 그럴 거라고 얼떨결에 꼴까닥하고 말 거라고 그렇게 얼떨결에 노래하던 당숙은 내년에 뿌릴 씨앗들 골라 놓고 앞뒤 마당도 싹싹 비질해 놓고 그 길로 빈방에 들어 깊은 잠 되었다 - 얼떨결에 / 고증식 올 한 해도 꼬리에 다다랐다. 돌아보니 일 년이 얼떨결에 후딱 지나간 것 같다. 사람의 생애도 마찬..

시읽는기쁨 2019.12.23

소격동 비술나무

비술나무는 느릅나무과의 큰키나무로 자주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니다. 서울에는 세 곳에 비술나무 보호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중에서 이곳 소격동 비술나무가 서울을 대표하는 비술나무라 하겠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앞마당에 있다. 겨울에 보니 비술나무는 미끈하게 잘 생겼다. 키 크면서 날씬한 미인 나무다. 궁궐에 심는 이유를 알 듯도 싶다. 소격동 비술나무는 세 그루가 나란히 서서 삼 형제처럼 사이좋게 자라고 있다. 세 그루 모두 수령(100년 정도)이나 크기가 비슷하다. 나무는 경복궁 쪽으로 기울어져서 가지를 철주가 지탱해주고 있다.

천년의나무 2019.12.22

소격동 소나무

서울 종로구 소격동, 옛 종친부 터에 있는 소나무다.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 동편 자리다. 종친부는 왕가와 관련된 일과 행사를 보던 기관이다. 기무사와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자리를 뺏겼다가 다시 복원되고 있다. 이 소나무는 수령이 1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오래된 나무는 아니지만 종친부를 상징하는 나무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나무 높이는 4.5m, 줄기 둘레는 1.9m다.

천년의나무 2019.12.22

서울 산책

친지 결혼식에 참석한 기회를 이용해 서울 길을 산책했다. 명동성당에서 서울시청,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거쳐 안국역까지 걸었다. 잔뜩 흐리다가 눈, 비 섞여 날리는 궂은 날이었다. 결혼식이 명동성당에서 있었다. 성탄절을 앞둔 때라 성당 앞에 아기 예수 구유가 설치되어 있다. 얼마 전에는 아기 예수가 누웠던 구유 조각이 1,400년 만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허나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초라한 구유와 화려한 빌딩, 사람들은 어디에 경배하는 걸까? 옛 서울시청사는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변모되어 있다. 여러 문화 시설이 다양하게 꾸며져 있다. 이런 데 오면 서울특별시민이 부럽다. 세월호 기억의 공간도 있다. 시청 앞 광장은 겨울이면 스케이트장으로 변한다. 스케이트장을 정리하는 ..

사진속일상 2019.12.21

레드 로자

올해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학살당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로자라고 하면 지성, 용기와 더불어 혁명을 위해 자신을 불꽃으로 태웠던 여인으로 떠오른다. "혁명이 전부라고요! 다른 건 다 쓰레기예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이런 말들에 그녀의 생애가 들어 있다. 이 책 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일생을 만화로 그려냈다. 만든 이는 영국 만화가인 케이트 에번스다. 만화라고 해서 가볍게 읽히지는 않는다. 로자의 삶과 사상을 요약했지만 무게감이 있다. 중요한 부분에는 주석이 달려 있어 이해를 도와준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에 태어나 1919년에 세상을 떠난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다. 누구보다도 자본주의의 모순을 직시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 이론가이면서 투사다. 세상을 바꾸려는 열정에서 로자를 넘어설 사람은 없..

읽고본느낌 2019.12.20

금강경[4]

"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습에 걸림 없이, 소리에 걸림 없이, 냄새에 걸림 없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맛에 걸림 없이, 느낌에 걸림 없이, 생각의 대상에 걸림 없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와 같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되, 어떤 모습이나 어떤 생각에도 걸림이 없어야 합니다. 왜 그러하겠습니까? 모습에도 생각에도 걸림 없이 베푸는 보살의 복덕은 모든 헤아림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동쪽 저 하늘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행복하신 분이시여, 저는 헤아릴 수 없겠습니다." "수보리여, 남쪽, 북쪽, 서쪽의 저 하늘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 사이 방향과 위아래의 ..

삶의나침반 2019.12.19

2019 왕립학회 과학사진

영국 왕립학회에서 2019년 과학사진 입상작을 발표했다. 왕립학회는 매년 마이크로 이미지, 천문, 기후, 동물 행동, 생태와 환경 등 다섯 개 부문의 사진을 공모한다. 그중에서 올해의 수상작 일곱 작품을 골라 보았다. 1. 마이크로이미지 부문, '양자 물방울' 마이크로이미지 부문 수상작이면서 전체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15Hz로 진동하는 실리콘에서 실리콘 오일 방울이 튀어오르는 모습이다.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나타내는 현상이라는데,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 잘 모르겠다. 2. 천문 부문, '달무리' 벨라루스의 사진작가가 찍은 밤의 달무리다. 숲 속 호수 위에 생긴 달무리가 거대한 우주의 눈동자 같다. 3. 기후 부문, '유콘의 트위스터' 토네이도가 생기기 직전에 하늘에는 이런 형태의 구름이 나타난다고 한..

길위의단상 2019.12.18

너무 착하면 안 돼

초등학교 1학년 때 일화다. 길을 걸을 때는 좌측통행을 하라고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쳤다. 선생님한테 혼나니까 교실 복도에서는 누구나 그대로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개구쟁이들이 교문 밖으로 나오면 장난치느라 천방지축이 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학교와 집을 오갈 때 마을길이나 신작로 왼쪽으로만 고집스레 다녔다고 한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선생님 지시는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내 행동을 동네 사람들이 신기해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커서야 들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내 고지식한 성향도 마찬가지다. 자랄 때는 선생님이나 부모님 말씀을 어긴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어른들로부터 착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말썽부리지 않고 어른 말씀에 순종하고 고분고분하면 착하다고 한다. 원래 착하다는 말은..

참살이의꿈 2019.12.17

12월 중순 뒷산

한 달 반만에 뒷산을 찾다. 걷기를 위한 걸음도 꼭 그만큼만이다. 올해만큼 걷기를 소홀히 한 적도 없다. 등산은 두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핑계는 있지만, 그냥 게을러졌다고 해야겠다. 며칠 전 모임에 나갔더니 다들 휴대폰으로 걸음수를 체크하며 하루 만 보 걷기를 실천하고 있었다. 옆에 앉았던 Y는 11월의 하루 평균 걸음수가 2만 보가 넘었다며 자랑스레 보여주었다. 나도 분발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한 번 발동이 꺼지니 다시 불붙이기 쉽지 않다. 더구나 겨울이 닥쳤으니 해동되는 내년 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다. 오랜만에 걸으니 우선 숨이 차다. 내 몸이 이렇게 무거웠나 싶다. 속도를 늦추고 쉬엄쉬엄 오른다. 등산화를 신고 집 밖을 나서기가 어렵지 어쨌든 나오면 좋다. 맑고 차가운 산기운을 흠뻑 들이킨다..

사진속일상 2019.12.16

버들가지는 꺾여도 / 신흠

오동나무는 천 년을 묵어도 제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평생 춥게 지내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이 변하지 않고 버들가지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는다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月到千虧餘本質 柳經百別又新枝 - 신흠(申欽, 1566~1628) 도산서원에 있는 왕버들을 올린 블로그 글에 어떤 분이 댓글을 달아주었다. 서원에 왜 버드나무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신흠 선생의 이 시에 답이 있다고 알려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이 이 시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지내셨다는데, 두 분은 시대가 다르니 퇴계 선생이 알았을 리가 없다. 시가 품고 있는 의미는 짐작하셨을 수 있다. 어쨌든 도산서원의 버드나무는 선비 정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상촌(象村) 신흠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

시읽는기쁨 2019.12.15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일본을 벗어나 프랑스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둘의 조합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어쨌든 새로운 시도는 상찬받을 만하다. 믿고 보는 고레에다 감독인데 이 영화는 솔직히 기대에 못 미쳤다. 동양과 서양의 어색한 동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 파비안느(까뜨린느 드되브)는 성공한 여배우인데 일밖에 모른다. "나쁜 엄마, 나쁜 친구가 되어도 괜찮아. 여배우로 명성을 얻을 수 있다면 만족해." 이런 멘트가 파비안느의 인생관을 말해준다. 당연히 딸과의 관계가 좋을 리 없다. 엄마를 못마땅해하는 미국에서 사는 딸이 가족과 함께 엄마를 찾아온다. 엄마의 자서전 출판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같은 공간에서 지내며 부딪치고 갈등을 겪은 뒤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읽고본느낌 2019.12.14

행곡리 처진소나무

경북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 있는 처진소나무다. 처진소나무는 가지가 아래로 뻗으면서 전체적으로 우산 모양을 하고 있다. 소나무 중에서 제일 멋진 모양을 자랑한다. 예전에는 여기가 송림이었다는데 지금은 이 한 나무만 남아 있다. 마을이 형성되었을 무렵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수령은 약 350년이다. 처진소나무는 나무 밑에서 올려다 봐야 한다. 나무 줄기가 우산대처럼 사방으로 얽히며 뻗어나간 게 장관이다. 행곡리 처진소나무는 수세가 왕성하며 주변 관리도 잘 되고 있다. 높이 14m, 줄기 둘레 3m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나무 옆에는 이 마을에서 난 효자 주명기(朱命杞)를 기리는 비각이 있다. 돌에 새겨진 내용은 이렇다. 유심히 읽어 보았으나 나무와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

천년의나무 2019.12.12

금강경[3]

부처님께서 수보리 장로에게 말씀하셨네. "수보리여,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보살들은 이와 같이 제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온 생명을 다 행복하게 살게 하리라. 알에서 태어난 생명도, 태에서 태어난 생명도, 물기에서 태어난 생명도, 문득 바뀌는 몸으로 태어난 생명도 번뇌 다한 열반 속에서 다 행복하게 살게 하리라. 몸이 있는 생명도, 생각이 있는 생명도, 생각이 없는 생명도, 생각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생명도 번뇌 다한 열반 속에서 다 행복하게 살게 하리라.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다 행복하게 살게 하되 나는 한 중생도 행복하게 살게 해 준다는 마음이 없이 다 행복하게 살게 하리라.'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수보리여. '스스로 있는 나'가 있다는 생각, '죽지 ..

삶의나침반 2019.12.12

수산리 굴참나무

우리나라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참나무가 다섯 그루 있다. 이 수산리 굴참나무도 그중 하나다.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의 작은 언덕 위에 있다. 옆으로는 왕피천(王避川)이 흐른다. 수령은 300년 정도로 추정하는데, 참나무가 이 정도면 굉장히 오래 산다고 할 수 있다. 나무 높이는 20m, 줄기 둘레는 6m다. 고령 탓인지 나무는 많이 상했다. 센 태풍이 지나가면 위태할 정도로 허약해 보인다. 인간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이만큼이라도 삶을 유지하지 않나 싶다. 옛날에는 성류굴이나 불영사를 찾아가는 행인들의 이정표 역할을 이 나무가 했다고 한다. 언덕에 큰 참나무가 있으니 그걸 끼고 돌아가면 된다고 알려주었을 것이다. 지금은 내비게이션이 있으니 나무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작은 화면을 쳐다보느라 거목이 있는지..

천년의나무 2019.12.11

스쿨서점의 추억

어머니가 백내장 수술을 받으셨다. 마침 고향에 간 길에 어머니를 모시고 영주 시내에 있는 병원에 들렀다. 언제 봐도 지방 병원과 약국은 노인들로 만원이다. 어머니는 항상 말씀하신다. "병원과 약국은 늙은이가 먹여 살린다." 이번에도 두 시간 넘게 기다려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대기 시간을 이용해서 나는 영주 시내를 산책했다. 시내에 나가면 꼭 들러보는 곳이 있다. 스쿨서점이다. 간판에도 'Since 1954'라 적혀 있는데, 아무튼 무척 오래된 서점이다. 내가 초등과 중학교에 다닐 때 참고서는 이 서점에서 샀다. 50년도 더 된 옛날이다. 그때는 스쿨서점이 영주 시내에서 거의 유일한 서점이었고, 위치는 지금의 맞은편에 있었다. 스쿨서점에는 떠올리기 싫은 추억이 있다. 아마 초등학교 6학년 때였을 것이다..

사진속일상 2019.12.11

소태리 소나무와 느티나무

경북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는 백암온천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 온천길에 소나무와 느티나무 보호수가 있다. 소나무는 온정 119 안전센터 앞에 있다. 수령이 300년으로 미끈하게 잘 생긴 미인송이다. 키는 18m, 줄기 둘레는 3m로 줄기가 둘로 갈라져서 아름답게 뻗어 있다. 느티나무는 농협 백암수련원 앞에 있다. 세 그루가 있는데 그중 대표 나무는 수령이 400년이다. 높이는 19m, 줄기 둘레는 5m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의 당산나무로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평시임에도 제단에는 소주, 막걸리, 물병이 정성 들여 올려져 있다. 제단석에는 '洞主 道峴 水口 盤石'이라 적혀 있다. 잘 모셔야 할 나무가 너무 도로에 연해 있는 점이 아쉽다.

천년의나무 2019.12.10

다가오는 말들

은유 작가의 산문집으로 작가의 색깔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책이다. 글의 소재는 가족, 글쓰기 모임의 학인, 인터뷰를 한 사람과의 만남에서 나눈 사연 중심으로 되어 있다. 글에는 세상과 인간을 보는 작가의 섬세하고 따스한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은유 작가의 글을 처음 접한 건 그분의 블로그를 통해서였다. 15년쯤 전일 것이다. 지금은 유명 작가가 되었지만 그때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주부로서 아이를 키우며 느낀 감상을 진솔하게 써서 많은 공감을 받았던 게 기억난다. 서태지 음악에 대한 얘기도 많았다. 그 뒤로 작가의 책은 나오는 대로 찾아 읽어 보았다. 영민하면서 문재(文才)랄까, 재기가 반짝이는 글이 좋았다. 역시 몇 줄만 읽어봐도 은유 작가의 글이란 걸 금방 알 수 있다. 반면에 약간은 ..

읽고본느낌 2019.12.10

애기와 바람 / 이원수

찬 바람이 제아무리 많이 불어도 애기는 꼭 밖에 나가 노올지. "감기 들라, 가지 마라." 할머니가 붙들면 고개를 잘래잘래 도리질하며 "아냐, 아냐 감기 없쪄." 문 열고 내다보면 바람맞이 밭길에 아, 우리 애기는 뛰어다니네. 떼지어 몰려가는 겨울바람 속으로 저기 우리 애기는 뛰어다니네. - 애기와 바람 / 이원수 유치원 버스에서 내린 손주를 맞아 집으로 돌아올 때 할머니와 손주는 자주 실랑이한다. 놀이터 옆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 그네 타고 놀래." "안 돼. 추워서 감기 걸리면 큰일 나." "난 안 춥단 말이야." 손주가 떼를 쓰면 할머니가 질 수밖에 없다. 따스한 날은 미세먼지 때문에 할머니는 또 걱정이다. 우리가 자랄 때는 공기 걱정, 날씨 걱정이 어디 있었는가. 고삐 풀린 망아..

시읽는기쁨 2019.12.06

2019 기상사진 작품

연말이 되니 여러 사진 공모전의 수상 작품이 발표되고 있다. 그중 영국 기상학회가 주최하는 2019년 기상사진 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을 소개한다. 기상사진의 단골 소재는 구름이다. 이번에도 재미있는 모양의 구름 사진이 여럿 올라왔다. 아이슬란드에서 찍은 유빙 위에 떠 있는 원반 모양의 구름이다. 외계인이 타고 온 우주선 같다. [Canon EOS 5D, 24-70mm, f/11, 1/13] 알프스 산맥 위에 떠 있는 구름으로 고산 지대에서 생기는 전형적인 모양이다. 곧 눈 폭풍이 몰려올 것이다. 개을 데리고 산책할 때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항상 카메라를 가지고 있어야 이런 행운도 잡을 수 있다. [Nikon D610, Tamron 28-75, f/10, 1/500] 새벽 운해. 촬영 데이터를 보니 30..

길위의단상 2019.12.05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

누가 쓴 글인지 모르겠지만 오래 전에 본 짧은 문장 하나가 기억에 남아 있다.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 가끔 독백하듯 되뇌면 왠지 위로가 되는 말이다.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글쓴이의 의도는 잊어버렸지만 지금은 내 식대로 해석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서 '그냥'의 뜻을 나는 '생각 없이' '편하게' '고통 없이' 등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누구나 자기 나름의 삶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개똥철학일 망정 자신을 지탱해 주는 삶의 지표가 있다. 그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분별하며 살아간다. 그런 과정에서 가치관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냥 거저먹기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겉으로 볼 때는 세상 부러울 것 같이 사는 사람도 내면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다. 다 자기 몫의 고뇌와 고통..

참살이의꿈 2019.12.04

첫눈 오신 날(12/3)

올해 첫눈이 오셨다. 맛보기로 하라는 듯 눈가루가 살짝 뿌리더니 금방 그쳤다. 조금 지나니 가는 비로 변하고 첫눈은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생뚱맞게도 거실 창밖으로 내리는 하얀 눈을 보며 죽음을 생각했다. 내 죽는 날에도 이렇게 눈이 오면 좋을 것 같다. 침대는 창가에 있어야겠지. 주위에 모인 사람들과 와인으로 건배하고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눠야지. 소주를 좋아하지만 마지막 술잔에는 달콤한 와인이 담겨야 할 것 같다. 그런 상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며칠 전 뉴스에 사진 한 장이 떴다. 임종을 앞둔 환자와 가족이 마지막 이별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었다. 손에는 모두 와인잔을 들었고, 다들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나 보다. 눈 내리는 날에 내 죽음을 연상한 ..

사진속일상 2019.12.03

벌새

올해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인상 깊다. 나의 올해의 영화로 꼽을 만하다. 1994년,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은희의 방황과 성장을 그린 영화다. 1994년은 성수대교 붕괴라는 참사가 있었던 해다. 김보라 감독의 연출력이 탄탄하고, 특히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진지하면서 따스한 시선이 좋다. '벌새'에서 주목할 캐릭터는 영지 샘이다. 은희를 진정을 다해 이해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준다. 학원의 한문 강사를 넘어 인생의 스승, 멘토라 부를 만하다. 은희는 영지 샘을 만났기에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영지 샘은 서울대를 휴학한 운동권 학생이다. 그녀의 행동과 말에서는 소녀에게 주는 격려와 충고 이상의 인생에 대한 통찰이 보인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평생 철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영지..

읽고본느낌 2019.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