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863

오름

은퇴 전후의 때가 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같이 돈을 모아 전셋집을 하나 마련하자고 누군가가 제안했다. 2년씩 각 지방을 돌아가며 집을 장만하고 서로 필요할 때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 별 부담 없이 자유롭게 전국을 돌아가며 지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럴 듯 했다. 각자 크게 부담되지 않는 금액으로 지방의 작은 아파트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내 거처를 소유해서 고정된 장소에 묶이기보다는 그렇게 자유롭게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마음만 맞는 친구들이라면 혼자인 경우보다 적적하지 않고 더 나을지 모른다. 나는 은퇴한 뒤에 제주도에 가서 한 2년 살고 싶다. 바다바람도 실컷 맞고 한라산도 계절대로 오르고 싶다. 그리고 특히 하고 싶은 게 있다. 제주도 오름들을 찾아보..

길위의단상 2010.09.13

여자의 힘

여자의 힘은 자식에게서 나오는 것 같다. 아내를 보니 그렇다. 딸이 퇴근해서 돌아오면 아내는 생기를 회복한다. 우선 목소리 색깔이 달라지면서 먹을 걸 챙기는 발걸음이 경쾌해진다. 참 신기한 현상이다. 수컷은 도저히 흉내 내지 못한다. 나는 그런 아내에 감탄하며 질투 섞인 눈으로 바라본다. 우선순위에서 남편이 뒤로 밀려난 건 이미 오래 되었다. 아내는 말한다. “이젠 자식들 잘 되는 것밖에 바랄 게 없어.” 자식만 잘 살아준다면 어떤 험한 일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는 여성의 본능은 남성과는 다르다. 자신의 목숨조차 자식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모성은 위대하다. 그것은 여자이기보다는 어머니로서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움은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길위의단상 2010.09.07

D-50

아침이 찾아오는 것이 싫다. 출근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납덩이를 안은 듯 무겁다.이증상은그만 둔다고 결심하고 나서부터 심해졌다. 여기 아이들이나 근무 여건은 좋은 편이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뺏겼으니 나도 어찌할 수 없다.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날짜를 헤아려보니 이제 실제 수업해야 될 날짜가 50일밖에 남지 않았다. D-50! 일말의 아쉬움이 있을 만도 하건만 이상하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 그만 두고 싶다. 오늘도, 이제 50번이야, 하고 주문을 걸고 있다. 며칠 전에는 L 선생님의 정년 퇴임식이 있었다. 정년까지 교단을 지킨다는 것,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제 다음은 내 순서다. 나는 퇴임식 같은 것은 안 하고 조용히 사라지기로 마음먹었다. 만약에 퇴..

길위의단상 2010.09.01

걷기 자료

인터넷 서점에서 ‘걷기’에 대한 안내서를 검색해 보니 70종이 넘게 나와 있다. 그중에서 열 권을 골라 책의 목차를 정리해 보았다. 이 목차만 보아도 걷기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코스가 어떤 게 있는지 대략 파악할 수 있다. 나에게는유용한 자료가 될 것 같다. 1. 대한민국 걷기 사전 / 이천용 외/ 터치아트 대한민국 걷기여행책의 완결판. 을 시작으로 걷기여행책 시장에 불을 지핀 이후, 그동안 함께 참여한 필자들의 노하우와 5년여 동안의 성과들을 모은 책이다. 걷기여행 전문가들이 걸었던 수많은 길 중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을 만큼 걷기 좋은 길과, 멀고 힘들더라도 한 번쯤 걸어 보면 좋은 길들을 엄선하여 2백 곳의 걷기 코스를 소개한다. 30분 정도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곳부터 한나절, 하루 또는 완..

길위의단상 2010.08.23

예쁜 발을 갖고 싶다

내 몸에는 세 명의 벗이 있는데 그들 이름은 과민성대장증상과 외이염, 그리고 무좀이다. 과민성대장증상은 언제부터 친구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거의 유전적인 영향인 것 같으니 어머니 뱃속에서 시작된 셈이다. 이 친구는 40대 때 최전성기를 구가하다가 지금은 잠잠해졌다. 그때는 커피도 마시지 못했고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그러나 지금도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지하철에 타면 이내 신호가 온다. 그래서 손이나 가방으로 꼭 배를 가리고 있어야 한다. 나에게는 제일 예민한 부위가 배다. 외이염은 사귄지 20년 정도 되었다. 디스크 수술 후 허리 운동에 좋다고 해서 수영을 했는데 그때 이 친구가 찾아왔다. 처음에 제대로 고쳤으면 별 탈이 없었을 텐데 병원에 가기 싫어 그대로..

길위의단상 2010.08.13

연애와 사랑

사랑의 스펙트럼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랑이라는 말 속에는 그만큼 다중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그래서 연애와 사랑은 그 뉘앙스가 다르다. 연애 감정도 사랑의 일부이지만 둘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연애는 남녀 사이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감정이다. 연애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어느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생물적 현상인 것이다. 종족을 번식시키라는 유전자의 명령이 이성에 대한 연애 감정으로 나타난다. 불현듯 상대가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연애의 열병은 시작된다. 연애의 특징은 상대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다. 연애는 그 사람을 내가 독점해야 한다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연애는 고통을 수반한다. 항상 보지 못한다는 괴로움, 다른 사람에게 앗길 것 같은 두려움과 질투가 혼재하는 것이 연애다. 만약 ..

길위의단상 2010.08.05

너희들은 좋겠다

너희들은 좋겠다. 대한민국이 제일 살기 좋은 나라라고 믿는 너희들, 그리곤 꼭 덧붙이지. 돈만 있으면, 하고. 너희들은 좋겠다. 삶에 대한 본질적 고민은 해 본 적이 없는 너희들. 아니, 하려고도 하지 않지. 존재, 의미, 이념같은 단어들은 너희들과는 무관하지. TV 연속극 앞에서 희희덕거리고, 책이라고는 여성잡지나 들추는 게 고작이지. 그러면서 명품의 착실한 고객이 되어주고,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우아한 척 폼을 잡을 줄 알지. 그래야 하루를 멋있게 살았다고 가슴이 뛰는 너희들, 너희들은 좋겠다. 아무런 역사 의식도 현실 의식도 없이 잘만 살아가는 너희들, 너희들을 보면 무의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뭘 뜻하는지 알 것도 같다. 그러나 나 편히 잘 먹고 잘 사는 게 인생의 최종 목표가 될 수는 없다는 건 기억..

길위의단상 2010.07.30

여름방학

아이들만큼이나 기다린 여름방학이었다. 참 멀리 있는 듯 했는데 어느새 곁으로 다가왔다. 기쁘다. 솔직히 말하면 학창 시절 때 맞았던 방학보다도 어른이 되어서 맞는 방학이 훨씬 더 기쁘고 행복하다. 무엇이 되려는 욕심이 없으니 해야 할 일도 없고, 구태여 무엇을 하려는 계획도 없다. 내 즐거움이란 그저 할 일 없음을 즐기는 것이다. 아무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텅 빈 시간이 나는 좋다. 우선은 책 몇 권 챙겨서 고향에 내려간다. 아침이나 저녁에는 어머니 따라 밭에 나가 밭일을 돕고 나머지는 게으른 나무늘보가 되고 싶다. 오늘따라 아이들 목소리가 유난히 밝고 명랑하다. 아이들도 한시 빨리 학교를 벗어나고플 것이다. 비록 갈 곳이 없더라도 일상을 벗어난다는 해방감은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러나 ..

길위의단상 2010.07.16

우파와 좌파

일부 사람들이 과거의 노무현과 김대중 정권을 좌파 정권이라고 부를 때는 어이가 없다. 심지어는 대북 지원 정책을 문제 삼고는 빨갱이 정권으로 부르기도 한다. 내가 볼 때 노무현이나 김대중 정권은 우파로 분류해야 맞다. 일부 이념이 진보적이긴 하지만 한미 FTA를 체결한 것이나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하는 등 그들이 추구한 정책이 지금의 자본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공고히 한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좌파나 우파, 진보나 보수라는 구분이 말하는 사람의 입맛에 따라 뒤죽박죽이다. 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개념 정리나 통일된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를 하더라도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기 어렵다. 어느 분의 글에서 본 것인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하여 사..

길위의단상 2010.07.13

[펌] 이제 됐어?

교육문제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정현 신부님이 그랬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중고생 아이들과 대화를 하기가 갈수록 어렵더라고요. 걔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못 알아듣겠고 걔들도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요즘 아이들 어릴 때부터 생활하는 걸 보면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농부들은 농사는 정직한 거라고 말한다. 땀 흘려 수고한 만큼 결실을 얻는다는 뜻이다. 시기에 맞추어 꼭 해야 할 일들 가운데 하나라도 빠뜨리면 어김없이 농사를 망치게 된다. 교육이란 게 농사와 같다. 아이가 다섯 살 무렵에, 열 살 무렵에, 열다섯 무렵에 꼭 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걸 하나라도 못하고 넘어가면 그 상흔은 일..

길위의단상 2010.07.08

꼴통

최근에 있었던 일이라며 벗이 이런 얘기를 해 주었다. 사무실에 있는 동료 중에 하나가 천안함 침몰 뒤의 논란에 대해 흥분해서 이렇게 말하더란다. “만약 나중에 북한의 소행으로 드러나면 그걸 의심했던 사람들은 내가 전부 총살시킬 거야!” 그는 소위 수구꼴통으로 알려져 별 대화가 없었던 사람인 모양이다. 벗이 너무 기가 막혀 그때는 참지 못하고, “그럼 나부터 먼저 쏴 죽이세요!”라고 대꾸해 주었다고 했다. 이 얘기를 들으며 보통의 보수와 수구꼴통이 어떻게 다른지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수구꼴통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상대에 대해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박멸되어야 할 기생충 정도로 보는 것 같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무신론자나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사탄의 자식으로 보는 것과 비슷하다..

길위의단상 2010.06.24

알아야 면장을 하지

“알아야 면장을 하지.” 어렸을 때는 아버님이 면장을 하신 관계로 유독 이런 말을 많이 들으며 자랐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내 앞에서는 일부러 더 사용하는 경향이 있어서 겸연쩍긴 하지만 같이 웃곤 한다. 그런데 어렸을 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나는 ‘면장’을 면(面)이라는 행정 단위의 기관장을 뜻하는 면장(面長)으로 알고 있었다. 그 말을 썼던 사람들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시골의 면장(面長)이라도 하려면 뭔가 아는 게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아도 ‘알아야 면장을 하지’는 속담으로 올라 있는데, ‘어떤 일이든 그 일을 하려면 그것에 관련된 학식이나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나와 있다. 그런데 면장의 어원은 원래 다른 뜻이라는 걸 최근에 알았다. 면장은 면..

길위의단상 2010.06.14

이 또한 지나가리니

‘이 또한 지나가리니’ - 이 말의 어원이 다윗이라고도 하고 페르시아의 어느 왕이라고도 한다. 그가 누구였든 간에 기쁠 때 오만하지 않고 슬플 때 좌절하지 않도록 왕은 반지에 이 글귀를 새기고 다녔다고 한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리고 한 순간이다. 지금의 기쁨과 슬픔, 승리와 패배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 정말 현자다운 경구라 할 수 있다. 요사이 많이 힘들다. 어제는 긴 시간 말다툼도 있었다. 오늘 되돌아보니 그나마 감정을 죽이고 참은 게 잘 한 일이었다. 마찰, 불화, 자책, 비난, 원망, 체면을 위한 미소, 본질은 감춘 가식, 내 감정의 많은 부분이 이런 것들로 채워져 있다. 나는 오늘 ‘이 또한 지나가리니’를 생각한다. 행복한 때 자만하지 않기 위해 쓰길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대개는..

길위의단상 2010.06.10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이유

4대강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이미 전체 공정의 30%가 달성되었다고 한다. 시민들과 학계, 종교계에서 아무리 반대해도 이 정권은 마이동풍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어제는 수행하시던 스님 한 분이 4대강 반대를 유서로 남기고 분신하였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의식 있는 사람이라면 강이 파헤쳐지면서 대규모의 환경 파괴가자행되는 현실에 가슴이 무너질 듯 아플 것이다. 이 정권은 작은 하천도 아니고국토의 중요 강 전체를 한꺼번에 돌격전 하듯이 2년 안에 절단내겠다고 한다. 물론 그들도 나름대로의 명분은 있다. 그러나 국민의 다수가 반대하는 목소리도 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 우선 지금이라도 4대강 사업을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재검토를 해야 된다고 본다.제발 그..

길위의단상 2010.06.01

스님의 눈물

며칠 전 서울 조계사에서 4대강 사업 반대를 위한 한강선원(漢江禪院) 개원식이 열렸다. 그 자리에서 수경 스님이 기도를 드리며 울고 있다. 비록 사진으로 본 스님의 모습이지만 마음이 아파서 한참을 떠나지 못했다. 이 정권은 가증스럽게도 '4대강 살리기'라는 언어의 유희를 하면서 서슴없이 생명과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국민 과반수가 반대해도 마이동풍으로 밀어붙이는 저 배짱은 무엇인가. 자신의 임기 안에 강을 다 파헤쳐야 속이 시원하다는 듯 공사 현장은 그야말로 속전속결이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제발 강 하나만 건드려서 마음 먹은대로 만들어 보아라. 정말 강이 살아나고 온 생명과 공존하는 개발이라면 어느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리고 이 거대 사업이 10년이 걸리고 20년이 걸리면 어떠랴. 이 정권은 조루증에 ..

길위의단상 2010.05.28

1 번

우연치고는 참으로 절묘하지 않니? 어뢰 파편에 적혀있다는 파란색의 '1 번'이라는 글씨 말이야. "찍어 찍어 1 번 좋아 1 번 좋아 파란당 파란당이야 무조건 무조건이야." 적개심과 불안을 부추기고, 간첩도 잡고, 전교조도 때려잡고, 이러면서 그날을 향하여 점점 에스컬레이터 시키겠지. 정점을 향해. 어제 MB는 전쟁기념관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어. 왠지 소름이 끼치더라. 그러나 난 내기 걸 수 있어. 그날이 지나면 흐지부지될 거라는 걸. 이런 걸 보면 역사는 코미디 같아. 우린 그 소극(笑劇)의 꼭두각시, 그런데 찬 바람이 너무 거세다. 슬프고 우울해. 많이 슬프고 우울해.....

길위의단상 2010.05.25

[펌] 오늘이 인생이다

고등학교 시절, 수업만 들어오면 “내가 선생질이나 하며 썩을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따위 한탄이나 늘어놓는 교사가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가장 학벌이 좋은 교사였지만 동시에 학생들에게서 가장 경멸받는 교사였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계집애 만나러 다니고 고고장 가고 하는 건 대학 가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지금 못해서 안달하는 새끼들이 있단 말이지.” 사람 같아야 상대를 하지, 다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든 잠자코 있는 편이었는데 그날은 한 녀석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때 하는 거하고 지금 하는 거하고 같습니까?” 수업은 중단되고 녀석은 교무실로 끌려가 종일 곤욕을 치러야 했지만 녀석의 말은 내게 남았다. 한국 부모들은 대개 아이의 인생을 준비기와 본격기로 나누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

길위의단상 2010.05.07

지하철에서 생긴 일

지하철로 출퇴근하다보니 가끔 험상궂은 광경을 만나기도 한다. 며칠 전 출근길이었다. 차에 타고부터 젊은 여자의 전화하는 소리가 무척 귀에 거슬렸다. 조용한 전철 안에서의 육두문자와 짜증이 섞인 찢어지는 목소리는 누구나 짜증을 낼 만 했다. 여러 사람이 눈총을 주는 것 같았지만 독불장군이고 안하무인이었다. 더구나 20대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경로석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그 야단이었다. 누가 한 마디 해 주지 않나 싶었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초노의 할아버지가 지하철에서 공중도덕을 지키자며 젊잖게 타일렀다. 그런데 생긴 꼬락서니가 “죄송합니다.” 하고 미안해 할 여자가 애당초 아니었다. 네가 뭔데 참견하느냐고 바로 앙칼진 대꾸가 돌아왔다. 그것도 연세 많은 할아버지에게 처음부터 반말이었다. 그리고는 두 ..

길위의단상 2010.04.27

심장 속에 남는 사람

단임골을 찾아갔던 그날 저녁, 꽃순이와 나무꾼은 합창으로 이 노래를 들려주었다. 인생의 길에 상봉과 이별 그 얼마나 많으랴 헤어진대도 헤어진대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 그런 사람 나는 못 잊어 오랜 세월을 같이 있어도 기억 속에 없는 이 있고 잠깐 만나도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 그런 사람 나는 귀중해 둘이서 다정하게 부르는 모습과 함께 노래 가사가 가슴으로 쏙 들어왔다. 이 노래는 1989 년에 제작된 북한 영화 '심장 속에 남는 사람'의 주제가라고 한다. 두 분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남겼다. 앵콜 송 '청산에 살으리랏다'

길위의단상 2010.04.13

말 삼가기

지셴린 선생이 쓴 이란 책에는 ‘노년에 하지 말아야 할 10가지’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이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은 언제나 있는 법이지만, 특히 늙어서 조심해야 할 것으로 선생이 골라 놓은 10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말을 삼가자. 2. 나이로 유세 떨지 말자. 3. 사고가 경직되는 것을 막자. 4. 세월에 불복하자. 5. 할 일 없음을 걱정하자. 6. 무용담으로 허송세월하지 말자. 7. 세상과 벽을 쌓지 말자. 8. 늙음과 가난을 탄식하지 말자. 9. 죽음에 연연하지 말자. 10. 세상을 증오하지 말자. 선생의 아흔 인생 경험에서 나온 충고들인데 이 중에서 ‘말을 삼가자’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말을 삼가야 하는 것에 노소의 구별이 있으랴마는 특히 노인의 수다스러움은 누구에게나 참기 어려운..

길위의단상 2010.04.06

그들과 나

지난 토요일은 무척 바빴던 날이었다. 결혼식이 두 군데에, 모임이 또 두 곳이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동분서주했다. 조용하게만 지내던 샌에게도 이렇게 바쁜 날이 있기도 하다. 모임에서는 이런저런 얘기들을 서로 나누기 마련이다. 정치나 사회, 교육을 비롯해 건강이나 자식문제, 노후생활 등 주제는 그때그때 달라진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이 내 또래의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다. 같은 세상을 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다른 것 같다. 지난 토요일의 모임은 대부분이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어서였는지 유독 심했다. 사사건건 마찰이 생겼고, 나중에는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었다. 내가 볼 때 그들은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대신 그들도 나를 세..

길위의단상 2010.04.01

고국에 돌아와도 찾아갈 곳이 없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뒤,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최후를 맞았다. 바로 오늘이 순국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 아침 신문에는 의사의 딸인 안현생(安賢生) 여사가 해방 후 대구에 있던 효성여대에서 불문학을 가르쳤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서류를 찾았다는 보도가 있었다.또,모 주간지에는 안 여사가썼던 수기가 실려서 그 당시를 착잡한 마음으로 회고해 볼수 있었다. 이 수기는 1956년 월간지 '실화'에 실렸다고 한다. 안 의사는 2남1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 중 맏이는 어릴 때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둘째는 부산 피난 시절에 갖은 고생을 하다가 신병으로 타계했다고 한다. 이 수기에 보면 안 의사 가족들이 의거 후 조국을 떠..

길위의단상 2010.03.26

[펌] 우리에게 영혼이 남아 있는 걸까

은 놀이운동가 편해문씨가 인도와 네팔을 오가며 놀이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담은 사진집이다. 지난해에 이 책을 내고 나서 몇몇 사람의 항의 메일을 받았다. 책엔 그저 무표정하게 가만있는 아이들 사진이 꽤 들어 있는데 이게 무슨 놀이 사진이냐는 거였다. 그러나 내가 그런 사진들을 포함하여 책을 발간한 이유는 그 또한, 아니 우리 현실에선 그것이야말로 중요한 놀이 사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놀이동산이니 놀이캠프니, 놀이도 상품화하다 보니 적어도 눈과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 정도는 지어야 노는 아이들이구나 싶다. 그러나 빠르고 센 놀이가 있듯 느리고 부드러운 놀이도 있다. 혼자, 혹은 동무와 함께 가만히 앉아 별다른 목적도 내용도 없이 느리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

길위의단상 2010.03.17

3월의 떡 잔치

요사이 책상 위에는 거의 매일 떡 봉지가 놓여 있다. 새로 전입 오신 분들이 인사치레로 돌리는 것이다. 떡은 대개 전 직장의 동료들이 보내준다. 몇 년 전부터 한두 사람에게서 시작되더니 이젠 모두가 으레 해야 되는신고 의식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신규로 임용된 분들도 자신의 지갑을 열어 떡을 돌린다. 품목도 떡 뿐만 아니라 과자나 과일 등으로 다양화 되고 있다. 물론 처음의 뜻은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너나없이 당연히 하는 것으로 되어 버리면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다. 나 혼자만 빠지면 뭔가 왕따를 당하는 기분이다. 분명 누군가는 마음과 달리 억지로 해야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이러다 보니 전출 가는 동료를 위해 전 직원이 돈을 모아 함께 떡을 맞추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떡집이 들으면..

길위의단상 2010.03.16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오늘아침 경향신문에 대학교육을 거부하는 한 대학생의 대자보 기사가 실렸다. 고려대 경영학과 학생이라는데 학교에 자퇴원을 제출하고 자신의 심경을 담은 대자보를 교내에 붙였다. 그 내용에서는학생의 치열한 고민을 읽을 수 있고,또한 진정성을 믿지 않을 수 없다. 나로서도 동감하는 바가 많다. 이것은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선언이며, 동시에 이 시대에 발하는 경고이기도 하다. 결코 철부지 학생의 치기 어린 행동이 아니라고 본다. 비록 지금은 작고 미미하지만이것이 마중물이 되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 난 가끔씩 상상한다. 만약 모든 고등학생들이 대학 가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피라미드의 상부로 오르려는 경쟁 질주를 멈춘다면? 아마 지금의 대학이라는 거대산업은 한순간에 무너질 ..

길위의단상 2010.03.11

생일

기념일을 챙기는 게 서툴다. 내 생일이 오는 것도 부담스럽다. 특별히 무슨 날이라고 축하 받고 축하 하는 게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저 아는 척 모르는 척 자연스럽게 지나갔으면 좋겠다. 어지간한 집이면 거실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이란 것도 그렇다. 하나같이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은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지게 느껴져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이렇게 행복하다고 또는 행복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직 그럴 듯한 가족사진이란 걸 찍어보지 않았다. 다 성격 탓이다. 명절이나 기념일이 불편해지는 건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해진다. 그래도 사람 사이의 정이란 게 있으니 그나마도 없으면 더 삭막해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입장만 내세우다가는 도리어 상대방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 어..

길위의단상 2010.03.06

보신탕

식성이 좋다고 할 순 없지만 음식은 가리지 않고 먹는 편이다. 그러나 위장이 약한 탓에 약간은 조심해야 하는 음식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 않다면 먹는 것에 대해 까다롭지는 않다. 그런데 한때 보신탕을 멀리 한 적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개와 연관된 껄끄러운 사건이 벌어지면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겨울에 고향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마당에서 시끄럽게 짖어대는 개를 혼낸다고 신발을 던졌는데 개다리에 정통으로 맞으면서 다리가 부러져 버렸다. 뜻하지 않은 변고에 무척 마음이 아픈 터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묘하게도 외할머니가 밖에 나가셨다가 자전거에 부딪쳐 다리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셨다. 아흔이 넘으셨던 외할머니는 그 사건 때문에 엄청 고생하셨다. 두 사건은 ..

길위의단상 2010.03.01

1994 독일 연수기(2)

9/12/94 월 비 8:00. 덴마크에 인접해 있는 Flensburg로 이동. 독일 북부에 있는 역사가 오랜 국경 도시이다. 9:00. 과학 전시관인 PHÄNOMENTA 방문. Fiesser 교수의 설명을 듣고 전시실을 관람하다. 그는 감각을 통한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직 건설 중에 있는 이 전시관은 시민을 위한 개방된 과학 시설이라고 한다. 벽 속에 갇혀 있는 전시물이 아니라, 홀 가운데에 설치되어 시설물 전체를 만지면서 배우게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물이나 시설물이 그리 돈을 들이지 않았으면서도 관람객들이 스스로 생각하면서 과학적 원리를 터득하게 되어 있다. 점심 후 시내 가이드 관광. 그러나 희망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유 시간을 주어서 대부분이 쇼핑하러 삼삼오오 헤어지다. 나를 포함해..

길위의단상 2010.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