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863

발레리나의 발

몇 년 전이었던가, 발레리나 강수진 씨의 발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고 하지만, 나로서는 꼭 그렇게만 부를 수는 없는 안타깝고 슬픈 느낌이 들었다. 사람의 발이라고 하기가 어려운, 마치 나무뿌리와도 같은 발을 보면서 정상에 오르기 위한 치열한 삶에 무섭기도 하고 동시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들이 몸에 대해서 갖는 애착을 생각할 때 더욱 그랬다. 발이 저렇게 망가지도록 연습을 하면서 흘린 땀과 눈물은 얼마나 될까? 요가 고행자가 저보다 더할까? 시간이 흐를수록 발은 점점 성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애처로운 마음은 여전했다.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를 볼 때도 마음이 아팠다. 연습을 하느라 얼마나 매트에 얼굴을 부딪쳤는지 선수의 귀는 기형으..

길위의단상 2008.07.07

내 마음의 감옥

나는 밴댕이 소갈머리를 닮아서 성질이 조급하고 여유가 없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두 가지를 잘 참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하나는 느긋하게 기다릴 줄 모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날 방해하는 소음에 너무 예민하다는 것이다. 창피한 일이지만 부부싸움의 원인 중 많은 부분이 조급한 내 못난 성질 때문에 생긴다. 사실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무척 부끄럽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소한 일에 목숨 걸 듯 화를 잘 낸다. 그러고는 금방 후회를 한다. 미안하고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에 똑 같은 상황이 되면 역시 같은 반응을 한다.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술에서 깨어나서는 후회를 했다가 금방 다시 술을 찾듯, 나는 조급중독증에 걸려있는지 모른다. 워낙 기다리지를 못하니 이제 아내는 나와 함께 쇼핑가는 ..

길위의단상 2008.06.30

사르코지의 익살

오늘 아침 신문에 재미있는 사진이 실렸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국빈방문하는 환영식에서 부인의 손을 슬그머니 잡으니까 브루니의 얼굴이 빨개지며 겸연쩍은 듯 살짝 고개를 숙인 장면이다. 대통령의 익살스런 표정도 재미있고, 그에 반응하는 브루니의 표정도 귀엽다.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은 동양인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엄숙한 환영식장에서 저런 파격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신선하게 느껴진다. 사르코지에 대해서는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친미적인 정강 정책으로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는데 사람 자체는 무척 진솔해 보인다. 적어도 위선이나 가식이 느껴지지 않아 좋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부인과 이혼하고 열세 살 아래의 모델 출신 미녀와 결혼해서 화제가 되었다. 만약 한국에서 그랬다면 ..

길위의단상 2008.06.24

즐거운 공상

지난 주 로또에서 1등이 나오지 않아 금주의 당첨금이 250억이나 된다는 것이 사무실에서 화제가 되었다. A는 1만 원씩 돈을 모아 공동으로 로또를 사 보자고 제안을 했는데, 시큰둥해 하는 사람이 있어서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로또에 당첨이 되고 거액이 손에 들어오면 무엇을 할까라는 공상으로 잠시 동안이나마 모두가 즐거웠다. 아마도 내가 1등 당첨이 되면 제일 먼저 사직서를 던질 수 있다는 게 가장 통쾌할 것 같다. B의 얘기로는 당첨된 사람들이 3, 4 년 정도 마음껏 놀다가는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다시 직장을 찾는다고 하지만 그건 차후의 일이다. 당첨금의 반 정도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기부를 하고, 또 일부는 친척이나 아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싶다. 공짜로 들어온 돈이니 별로 아..

길위의단상 2008.06.20

사랑의 호르몬

생화학적으로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도 여러 종류의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싹트고, 사랑에 도취되고, 그리고 종국에는 시들해져 가는 과정도 두뇌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물질적인 설명은아무리 완벽하게되어도 반쪽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꽃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인간의 심미적 감동과는 별개의 문제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여러 종류의 호르몬들이 사랑의 감정에 관계된다고 한다.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데는 물질적 측면 역시 무시할 수가 없다. 인간의 사랑에 관계된다는화학물질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테스토스테론 : 남성다운 체격이나 근육, 활력이나 자신감, 공격성 등을 ..

길위의단상 2008.06.16

[펌] 우리 안의 대운하

이명박 씨는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대통령임에 틀림없다. 아이들은 광우병 소 문제가 불거지기 훨씬 전부터, 대통령 선거 운동이 시작될 무렵부터 이미 그를 ‘명바기’라 부르며 우스갯소리의 소재로 삼고 희화화했다. 아이들 몇을 붙들고 왜 그리 이명박이 싫은지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들의 표현은 다양했지만 ‘논리 이전의 혐오’라는 점에선 일치했다. 나는 아이들이 그들의 앞 세대는 가지지 못한 어떤 직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지금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은 93년생인데, 93년은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발한 해다. 아이들은 민주화 이후에 나고 자란 첫 세대인 것이다. 그 아이들의 부모가 이른바 386들이다. 그들은 아이들과는 정반대의 환경에서 나고 자랐다. 군..

길위의단상 2008.06.09

위험한 확신

요즈음 들어 가장 무서운 것이 확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돈벌이를 최고의 가치로 확신하는 사람이 나라의 우두머리가 되어 국민의 바람과는 아랑곳없이 자기 식대로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자신의 믿음에 조그마한 회의라도 있었다면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몰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와중에도 대운하까지 정면 돌파 하겠다는 만용을 부리고 있다. 잘못된 확신을 가진 사람이 그 확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가 나오는지를 이번 사태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확신 속에 사는 당사자는 자신의 과오를 잘 모른다. 국가만이 아니라 작게는 가정에서도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위장된 채 일방적인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 대개가 사랑과 보호라는 자식에 대한 부모..

길위의단상 2008.06.03

걷고 싶은 길 10

새처럼 자유로운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만 하다. 직장도 가정도 훌훌 털고 길 위에 서는 사람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삶의 족쇄에 묶여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대비되어 괜히 울적해지고 쓸쓸해진다. 난 언제쯤 그렇게 자유롭게 길 위에 설 수 있을까?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이 그런 특별한 인물의 흉내를 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물론 본인들이 그런 얘기를 들으면 자신들이 전혀 특별하지 않다고 펄쩍 뛸 것이다.누구라도 길을 나설 수 있다고 하지만 허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각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내가 꿈 꾸는 건 일탈과 자유, 그리고 끝 없는 길 위에 서고 싶은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말 그대로의 그저 꿈일 뿐이다.그래서 꿈을 행동으로 옮긴 그런 사람들의 ..

길위의단상 2008.05.20

2MB의 변명에 대한 국민의 대답

2MB : "어느 나라가 국민에게 해로운 고기를 사다 먹이겠나?" 국민 : "어느 국민이 대통령에게 해로운 짓을 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경호실을 폐지하십시요. 만약 당신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즉시 다시 경호실을 만드시면 됩니다." 한심한 정부.... 한심한 대통령.... 그런 사람을 압도적으로 당선시킨 우리들은 뭐지? 여러 번 정권이 바뀌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길위의단상 2008.05.14

살처분 7000000

지난 4 월초에 김제에서 발생한 조류인플루엔자[AI]가 전국으로 확산되며 닭과 오리를 살처분하는 끔찍한 장면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살처분이란 전염병의 확산을 위해 살아있는 동물을 푸대에 담아 그대로 구덩이에 던져 넣고 흙으로 묻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발병이 확인된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3 km 이내의 가금류는 무조건 살처분해 버린다고 한다. 싹쓸이 대량 학살이다. 한 달 정도 되는 동안에 살처분된 닭과 오리만 이미 700만 마리에 이르고 있다. 방역의 목적은 생명을 지키자는 것인데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생명을 도륙하는 잔인성이 이율배반적이고 무섭기만 하다. 나는 우선 ‘살처분’이라는 용어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살처분은 생명을 가진 존재에 붙일 명칭이 아니라고 본다. ‘생명’을 처분한다거나 처..

길위의단상 2008.05.13

어버이날의 단상

어린 아이들에게 부모는 제왕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지 부모의 언행은 아이의 심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부모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때는 폭군이 되기도 한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의 내적 상처 가운데 많은 부분이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보고도 있다. 작게는 부모에 대한 서운함에서부터 크게는 원한에 이르기까지 부모와 자식 관계는 사랑이 바탕으로 깔려있으면서도 상처 또한 주고받는 관계다. 도리어 부모이기 때문에 그 상처는 예민하게 느껴지고 심각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개 그런 부정적인 면에 대해 의식적으로 숨기려 한다. 그래서 많은 부분이 왜곡된 형태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한 개인의 성격적 특징은 유전적 또는 환경적으로 부모로부터 각인된 것이다. 콤플렉스나 심리적 갈..

길위의단상 2008.05.08

자각증상

일주일 가까이 입술이 부르터 있더니 이제야 아물어간다. 평상시 크게 무리되는 생활을 하지 않으니 피곤해서 입술이 부르트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럴 징조가 보이면 몸을 사리며 조심한다. 그런데 이번에 오랜만에 입술 양쪽이 부르텄다. 연일 바빴던 탓에다 지난 일요일에는 직장에 나가 근무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 일은 예상외로 힘이 들었고 내 체력에는 무리가 되었다. 의학용어 중에 자각증상이 있다. 자각증상은 몸에 이상이 생기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몸의 경고 신호다. 대부분의 병에는 미리 이런 자각증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몸살기가 생기거나 입술이 부르트는 것은 네 생활을 몸이 감당할 수 없다는 사인으로 보면 된다. 그러므로 자각증상은 고맙고 감사한 현상이다. 몸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방비해주는 역할을 ..

길위의단상 2008.05.03

한 장의 사진(10)

1960년대에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부터 입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경쟁 체제에 익숙하고 길들여진 세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읍내에는 중학교가 두 개 있었는데 우리에게는 그 중에서도 Y 중학에 들어가는 목표였다. 산골 초등학교에서 거기에 입학하기도 만만치가 않았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에도 일부 아이들은 남아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과외를 받았다. 옛날 시골에 학원이 있었을리 만무하니 가르쳐줄 유일한 사람이 담임선생님이었다. 장소는 학교 숙직실이거나 선생님 집이었다. 선생님께 드리는 보수도 없었으니 선생님은 무료 봉사로 아이들을 지극정성으로 가르치셨다. 그래서 지금도 그때 특별 과외를 받았던 친구들은 담임선생님에 대해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자신이 담임하던..

길위의단상 2008.04.28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이번 총선에서 서울 지역에서의 국회의원 의석 48개 가운데 여당이 40석을 싹쓸이한 것은 뉴타운에 대한 기대가 한몫을 했다는 분석이 있다. 지역구에 여당 국회의원이 있어야 개발이 쉬울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총선 후에 서울시장이 더 이상의 뉴타운 지정은 없을 것이라고 해서 개발 공약만 믿고 한나라당 후보에 표를 찍은 주민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하긴 뉴타운으로 개발한다는 풍문만 돌아도 땅값이 몇 배나 뛰니 환장할 노릇이긴 하다. 속았다는 한탄이 나올 만도 하게 생겼다. 그러나 이런 코미디 같은 세태를 보면서 한없이 서글퍼지고 연민이 생기는 걸 어찌할 수 없다. 표를 모으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후보자들보다도 자신의 이익만 좇아 부화뇌동하는 대중들의 어리석음과 탐욕이 더 밉다..

길위의단상 2008.04.23

꽃은 절벽에서도 웃으며 핀다

사무실 밖에 수직으로 서 있는 시멘트 축대의 갈라진 틈에서 제비꽃 한 송이가 꽃을 피웠다. 틈이래야 폭이 실처럼 가는데 그 안으로 씨가 들어간 것도 신기하거니와 속에 무슨 흙이 있는지 싹이 트고 꽃을 피운 것이 희한하기만 하다. 빗물조차도 그 틈으로는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도 꽃은 여느 기름진 땅에서 핀 제비꽃에 못지않게 크고 튼실하다. 나는 생명의 신비가 놀라워 매일 한 번씩 그 제비꽃을 찾아가 본다. 어떤 때는 물이라도 뿌려주고 싶지만 괜히 쓸데없이 간섭하는 것 같아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제비꽃을 바라볼 때면 아무 이유 없이 서글프고 고맙기만 하다. 작은 들꽃은 자신의 위치나 입장을 비관하지 않는다. 씨앗이 자갈밭에 떨어지든 옥토에 떨어지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

길위의단상 2008.04.14

정과 정의 대결

어제는 제 18대 총선일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곳은 정동영 씨와 정몽준 씨가 출마해서 전국적으로 관심을 모은 지역구였다. 덕분에 TV로만 보던 두 사람과 악수도 해 보았다. 가까이서 본 그분들은 선거 운동에 지쳐서인지 무척 안스럽게 보였다.워낙 유명인들이라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과는 뭔가가 다르리라는 선입견이 무의식 중에 있었는데 그저평범한 이웃 사람의 모습이어서 조금은 의외였다.그분들을 통해서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유명인들에 대한 환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대결의 승패는 여론조사에서부터 예상된 것이었다.지역구민들이 왜 그렇게 선택했는지는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국회의원은 지역의 일꾼을 뽑는 측면이 강하므로힘 있는 여당 의원을 선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당선된 정몽준 씨..

길위의단상 2008.04.10

정말 해로운 사람들은 아름다워

열심히 산다거나 성실하다는 것이 늘 칭찬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열심은 이웃과 생명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미로 밭을 매던 옛날에는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당연했고 긍정적인 보상이 따랐다. 그러나 전기톱을 든 사람이 무조건 열심히 나무를 벤다면 온 산을 헐벗게 할 뿐이다. 현대에 들어 개인이나 사회적 열정이 위험한 이유다. 우스갯소리로 '멍부'란 말이 있다. '멍청하면서 부지런한' 사람을 빗대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주변의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피곤하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차라리 게으른 것이 본인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훨씬 낫다. 어떤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이 악에 가깝다면 성실하게 사는 것보다는 반항해야 옳은 일이다. 침묵하는 다수는 본인이 믿든 안 ..

길위의단상 2008.04.05

값싼 희망보다는 절망이 낫다

값싼 희망보다는 차라리 절망이 낫다. 왜냐하면 절망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고 다시 솟아날 구멍을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값싼 희망은 절망적 현실을 절망으로 인식하기는 커녕 희망으로 착각하고 그 속에 안주한다. 거짓 희망에서 위안을 구하고, 비극적 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것이 희망이 절망보다 무서운 이유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절망하는 것이다. 온 땅을 파헤치고 온 강을 파내어 시멘트로 바르고 대운하를 만들어국토를 온통 만신창이로 만들어야 한다. 농촌을 없애고 식량자급률을 0 %까지 떨어뜨려야 한다. 혼자서 만 명, 십만 명을 먹여살릴 수 있는 엘리트를 키워내는 천재학교만 집중육성해야 한다. 그래서 밑바닥까지 내려간 다음에라야, 절망의 심연에 이르른 뒤에라야, 정신을 차리고 새로 출..

길위의단상 2008.03.29

그랜드 캐니언에 가고 싶다

EBS TV에서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를 소개하는 다큐 프로를 우연히 보았다. 그랜드 캐니언이 나에게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새겨진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때 국어 교과서에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분이 쓴 그랜드 캐니언[그랜드 캐년] 기행문이 실렸다. 그 기행문이 준 감동 때문에 나는 그때 어른이 되면 언젠가는 꼭 그랜드 캐니언에 가 보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도 어언 40 년이 되어가는 아직까지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랜드 캐니언은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살아있다. TV 프로를 보면서 가슴이 뛰는 걸 보니 그 바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해외여행에 대해 별 흥미가 없다. 특히 단체로 가는 패키지 관광여행은 더욱 그렇다. 동료들을 보..

길위의단상 2008.03.24

하숙생

아내는 가끔 날 보고 하숙생이라고 놀린다. 집에 들어와서는 별로 하는 말도 없이 그저 주는 밥 먹고 방에 들어가 혼자 있다가 소식도 없이 자 버리니 아내 입장에서는 하숙생 한 사람 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겠다. 정말 어떤 날은 아내와 한두 마디밖에 하지 못할 때도 있다. 특히 이곳으로 이사 와서는 방에 여유가 있어서 아내와 나는 거의 각방살이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부부가 떨어져 자는 것이 이상했는데 지내고 보니 그것이 훨씬 더 편하다. 그건 표현은 안하지만 아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정이 멀어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은 하지만 말만 그럴 뿐 밤이 되면 ‘마이 웨이’를 간다. 각방살이의 핑계를 대자면 잠자는 습관의 차이와 내 코골이 때문이다. 아내는 밤 12시를 넘겨 한두 시가 되어야 잠자리에 든다. 반..

길위의단상 2008.03.20

이은하와 지율 스님

'우리나라 아름다운 산천과 물줄기가 있는데 그 경치를 이제까지 버려두고 있었네 모두가 버려진 물줄기 속에(새로운 희망이 있어) 모두가 노력한다면(우린 웃을 수 있어)...' 이렇게 시작하는'한반도 대운하'라는 노래를 가수 이은하 씨가 불러 논란이 되고 있다. 본인도 운하 찬성론자라고 말했지만 가사를 보면 영락없는 '대운하 찬양 송'이다. 하필새 정권이 출범한지 얼마 안 된 민감한 시기에 이런 노래가 나왔으니 그 저의를 의심할 법도 하게 생겼다. 대운하 건설은 후보 시절 이명박의 공약이었지만 그에 대한 논란은 흐지부지 되었다. 지금은 수면 아래로 잠복된 상태지만 신정부 측에서는 언제라도 강행할 태세다. 그런 점에서 운하 건설에 대하여 찬반 논란이 가열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하다. 그런 논의 과정을 ..

길위의단상 2008.03.14

사무치다

사무친다는 게 뭐지? 아마 내가 너의 가슴속에 맺히고 싶다는 뜻일 거야. 무엇으로 맺힌다는 거지? 흔적... 지워지지 않는 흔적. - 안도현의 '연어' 그대가 사무친다고 할 때마다 내 가슴은 두려움으로 떨립니다. 그것은 한 사람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는 일이 얼마나 큰 고통과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무친다는 것은 그대를 향한 간절함이 뻣속까지 스며들어 대책없이 흐느끼게 되는 일입니다. 그대 가슴속에 맺히고 싶은 나의 그리움은 오늘도 그대를 향해 날아갑니다. 그대 가슴에 닿는 거기까지가 바로 나입니다.

길위의단상 2008.03.06

고상한 야만인

영화 '부시맨'에서는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서 살고 있는부시맨이라는 종족이 나온다. 그들은 문명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원시적 생활을 하지만 전쟁과 싸움을 모르고 평화스럽게 살아간다. 이런 경우를 보면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는데 문명과 사회 속에서 타락되어 간다는 견해에도 일면 수긍이 간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욕심이 없고 평화로우며 탐욕, 근심, 폭력 등은 문명이 가져다 준 산물이라는 것이다. '고상한 야만인'(Noble Savage)이란 이런 생각을 대변하는 용어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관한 논란과 관계되는데, 문화인류학자들의 연구로는 부시맨과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이 보고되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살육, 기근이 원시 부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한 마디로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적나라..

길위의단상 2008.02.24

철길을 따라 보행로를 만들자

옛날에 철길은 기차와 함께 사람들이 같이 다녔다. 철로 양편으로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어렸을 때 이 길을 따라 학교에도 가고, 엄마를 따라 장에도 갔다. 그때는 기차 속력이 느려서 기차가 지나가도 걷는데 별 지장이 없었다. 발 빠른 어른들은 뛰어가다가 기차를 타기도 했다.그런데 증기기관차에서 디젤기관차로 바뀌고 속력이 빨라지면서 철길은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철로 옆 길은 자갈로 덮이고 폐쇄되었다. 철길에는 더 이상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은 자꾸 없어지고 있다. 도로도 자동차를 위한 길이지 사람을 위한 길은 아니다.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해 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 때문에 시골에서도 도로를 따라 걷기는 쉽지 않다..

길위의단상 2008.02.11

확신의 구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확신의 구름에 둘러싸인 채 살아간다. 그 구름은 여름날의 파리떼처럼 그를 따라 이동한다.' - 버틀란드 러셀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 가장 용감하다고 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확신의 구름은 두텁고 완고하다. 그는 구름 속에 갇혀 바깥 세상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편안함과 안락함을 즐긴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구름이 벗겨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꿈을 꾸는 사람은 확신의 구름 너머의 세계를 궁금해 한다. 의심과 성찰과 회의만이 확신의 구름을 옅게 만들고 그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비록 또 다른 확신의 구름에 둘러싸일지라도 그것만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진실을 향해 비틀거리며 가는 길이다.

길위의단상 2008.02.04

영혼이 없는 사람들

얼마 전 서울대 교수 80여 명이 한반도 대운하 정책을 입안하는 자들을 보고 ‘영혼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대운하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닌 진실과 거짓, 과학과 허구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학자적 양심에 따라 침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성인들의 이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그래도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는 절망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대운하 논쟁은 지금 수면 아래로 잠복한 상태지만, 또 하나 새 정부 들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영어교육이다. 마치 점령군처럼 행동하는 인수위원회가 가장 역점을 두는 사업 중의 하나가 교육개혁이고, 그 중에서도 영어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도대체 나는 왜 우리가 영어에 그렇게 올인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영어몰..

길위의단상 2008.02.02

높은 분들 위해 비워놓은 자리

난감했다. 공연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들은 공연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시립 국악관현악단 정기 연주회였다. 여수 같은 소도시에선 자주 접할 수 없는 공연이고 더구나 우리 마을 아이들 중엔 처음 접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덕양리에 사는 나는 어버이날 마을잔치 때 함께 사물놀이 공연을 했던 마을 아이들과 뒤풀이로 공연 관람을 약속했다. 드디어 공연이 있는 지난 14일, 거북공원에 도착한 우리들은 연주 모습을 잘 지켜볼 수 있는 맨 앞줄 가운데 부분에 자리를 잡았다. 오후 7시 공연이었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아이들과 나는 5시부터 교대로 김밥이며 떡볶이를 먹으며 공연 리허설까지 지켜보았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져 오니 행사 관계자인 듯한 분이 오셔서 자리를 비켜줘야겠단다. 난 단호히 거절했다. 올지도 안 ..

길위의단상 2008.01.28

개와 고양이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중에서도 개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 아주 어렸을 때 '도꾸'라고 불렀던 개가 있었다. 어린 동생들이 방에서 응아를 하면 어른들은 먼저 개를 불렀다. "도꾸" "도꾸"하고 부르면 어디선가 달려와서 응아를 깨끗이 핥아먹었다. 뒷자리는 걸레로 닦아내면 되었다. 당시는 아이들 응아는 그냥 방바닥에 누게 했고, 밖에서 놀던 개가 방안까지 들어와 그 뒷처리를 했다. 내 덩치보다도 더 컸던 도꾸는 어린 내가 가까워지기에는 너무 힘이 세고 사나웠으며 더러웠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 유일하게 기억나는 도꾸와도 친근하게 지냈던 기억은 없다. 수년간 식구처럼 지냈을 그 개가 어느 날 멍석에 둘둘 말리고 몽둥이찜질을 받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아프게 바라보았던 슬픈 기억만이 남아 있다..

길위의단상 2008.01.21

VIP

아무렇지도 않게 듣고 사용했던 말들이 어느 때부터 생경맞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는 말도 그에 해당된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는 말은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듣고 자란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을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쓸모 있는 인간이 있다면 당연히 쓸모 없는 인간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과연 쓸모 없는 인간이 있을까? 그리고 '쓸모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말 속에는 인간을 도구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들어있음이 분명하다. 그런 말 중에 VIP도 있다. VIP는 말 그대로 Very Important Person,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지, 세상에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길위의단상 2008.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