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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본느낌

다읽(30) - 박하사탕

샌. 2025. 9. 26. 10:34

 

2000년에 개봉한 영화이니 벌써 25년이 흘렀다. 오래전이라 그때의 느낌이 대부분 증발했는데,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영호의 외침(이걸 잊을 수는 없지), 영호의 인생이 망가지면서 왜 그런 극단적인 행동으로까지 끌려갔는지에 대한 당위성이 부족하지 않았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다시 보면서 이번에는 영호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그의 선택을 상당 부분 납득하게 되었다. 영화는 시대의 역순으로 진행하며 영호가 어떤 인생 경로를 겼어왔는지 보여주는데, 젊었을 때 그는 착하고 감성이 예민한 청년이었다. 첫사랑 순임과의 데이트에서 작은 풀꽃에 관심을 보이며 꽃사진을 찍고 싶다고 수줍게 말하는 데서 그의 순수한 마음이 보인다. 그런 그에게 80년 5월의 경험은 영혼에 치명적인 상흔을 남겼다. 출동하던 날 순임이 보내준 박하사탕이 흩어지고 발에 밟히는 장면은 모든 것이 파탄날 것임을 암시한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개인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권력자들이 일으킨 전쟁이나 분쟁에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희생되었는가. 이창동 감독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영호의 서사를 통해 보여준다. 브레히트가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면피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지 모른다.

 

경찰이 된 영호에게 순임이 찾아온다. 순임은 첫 만남 때 영호의 '착한 손'에 대해 말하며 영호와의 관계를 회복하길 바란다. 영호는 일부러 식당 종업원의 엉덩이를 만지며 '나쁜 손'이란 걸 드러내는 장면은 너무 슬펐다. 영호의 자기파괴적인 행위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영호의 영혼은 서서히 병들어가고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기 이전에 치유가 먼저여야 했다. 영호는 심각한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요사이는 심리 상담이 따르지만 그때만 해도 방치되기 일쑤였다. 더구나 영호의 직업인 경찰이나 사업은 그가 감당하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상황을 악화시켰다. 신앙과 기도에서 살 길을 찾던 아내와의 결혼생활도 파탄 났다. 80년 5월부터 누적되는 현상들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달리는 기차처럼 그의 인생행로도 이미 결정된 길을 따라 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영호 역을 맡은 설경구 배우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배우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이 정도면 배우로서의 자질을 타고났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풋풋했던 문소리 배우를 만나는 재미도 있었다. 다시 봤지만 처음보다 훨씬 더 감동으로 다가온 영화 '박하사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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