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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있는 것들을 위하여

샌. 2026. 3. 4. 08:55

미국의 자연주의자인 베리 로페즈(Barry Lopez, 1945~2020)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사후에 출간된 책으로 회고록이자 자신이 다녀온 여러 지역을 인간 중심이 아닌 자연의 입장에서 아름답게 보여주는 책이다. 부제가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이다.

 

그의 글은 현장에 서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남극을 비롯해 그가 찾아간 특별한 장소를 지구환경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게 되고,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진정으로 자연에 다가가면 우리는 경외심을 품지 않을 수 없으리라. 지은이는 이 시대를 '공포시대'라고 부른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오만과 횡포가 극에 달한 시대라는 뜻이다.

 

자연에 대한 서술 못지않게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지은이가 어린 시절에 겪은 고통스러운 체험이다. 지은이는 의사였던 소아성애자로부터 일곱 살 때부터 4년간 동성 성폭행을 당했다. 이혼한 어머니와 살고 있던 어린 로페즈는 자신의 집을 도와주는 의사한테 꼼짝없이 당한 것이다. 그 실상이 너무 끔찍해서 여기에 적을 수도 없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여기에는 어머니의 방관도 있었다. 자식이 험한 꼴을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건만 어머니는 먹고살아야 하는 현실 앞에서 외면했다.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로페즈는 10대 후반이 되어서야 새 아버지를 통해 사실을 말하고 가해자를 고발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1960년대의 인권 의식이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한참 미달할 것이다. 로페즈의 설명으로는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학대당하는 아동들이 남아는 일곱 명당 한 명, 여아는 세 명당 한 명이라고 한다. 은폐되는 아동 범죄가 너무 많아서 소름이 끼친다.

 

결국 로페즈는 자연을 통해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근원적인 자연의 힘을 마주할 때 깊은 안도감이 찾아왔고 기운이 솟았다는 것이다. 그가 자연주의자가 된 것은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한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최종적으로는 50대 때 심리 치료를 받으면서 완전히 극복하고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을 옥죄던 공포와 분노가 연민으로 바뀐 것이다.

 

유소년기의 상처가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로페즈의 사례를 통해 확인한다. 그래도 로페즈는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며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인물이 되었다.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해결하지 못하고 내내 시달리면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인간 사회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사람한테서 타격을 받지만 - 주로 가족과 이웃 - 또한 사람한테서 위안과 인정을 받는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인 것 같다. 로페즈는 자신의 어릴 적 슬픈 체험을 서술한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삶의 예의로 다시 데려다줄 타인이 필요하다. 이것이 내가 최종적으로 얻는 교훈이었던 것 같다. 타인이 포용을 용서나 우호적인 판단이 아니라 인정으로 받아들여 환영하는 것. 누구나 때때로 남들이 모르는 각자의 삶에서 잔혹한 역경을 맞기도 하며,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를 이루는 서로가 없다면 이 악몽은 언제든 되살아날 기회를 노리며 도사리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

 

이 책의 원제는 <Embrace Fearessly The Burning World>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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