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허수아비 / 조오현

샌. 2018. 5. 31. 20:43

새 떼가 와도 손 흔들고 팔 벌려 웃

사람이 와도 손 흔들고 팔 벌려 웃고

남의 논 일을 하면서 웃고 있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 논두렁 밟고 서면 -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 가을 들 바라보면 -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손 흔들어주고 숨 돌리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 허수아비 / 조오현

 

 

무산(霧山) 스님의 다비식이 어제 건봉사에서 열렸다. 속명을 따라 오현 스님이라고도 한다. 시인이기도 한 스님의 선시(禪詩)는 수도 정신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핵심을 드러낸다. 스님은 거침없는 언행으로 무애의 삶을 살았다. "가장 승려답지 않으면서, 가장 승려다운"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듯하다.

 

언젠가 신문에서 스님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불교의 진리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스님은 이렇게 답했다.

 

"절에 부처 없다. 각자 자기 자신이 미완의 부처다.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 선에도 집착하지 말고, 악에도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차별과 분별심을 버리라는 것이 불교다. 불교를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불교 가르침은 우리 속담에 다 들어 있다. 팔만대장경을 줄이면 '사람 차별하지 마라',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하지 마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가 전부다."

 

다비식 사진에는 스님이 남긴 마지막 시가 보인다. 스님의 임종게다.

 

天方地軸 氣高萬丈 虛張聲勢로 살다보니

온 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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