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향기

마지막 변산바람꽃

샌. 2021. 3. 4. 10:56

 

수리산에 핀 변산바람꽃을 처음 본 건 15년 전이었다. 병목안 계곡을 따라 작은 꽃밭이 펼쳐진 광경은 넋을 잃을 정도로 황홀했다. 바람 따라 살랑거리는 가녀린 변산아씨는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 뒤로 3월 초순이면 수리산을 찾아 변산바람꽃과 만났다.

 

그러나 해가 지날수록 소문이 나고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변산바람꽃은 사람의 발길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나중에는 눈을 부릅떠야 겨우 몇 송이를 만날 수 있었다. 너무 안타까워 더는 찾아갈 수가 없었다.

 

지금은 어떤 상태일까 궁금증이 일어 어제 수리산 그 장소를 찾아갔다. 찾는 사람 없이 입구가 조용한 걸 보니 예상대로 변산아씨가 사라진 게 분명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며 들어가 봤지만 역시 변산바람꽃은 없었다. 실망하고 되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한 송이를 발견했다. 나무 뒤에 홀로 숨어 있는 변산아씨였다. 꽃이 때가 지난 데다 혼자여서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이 계곡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변산바람꽃 사진을 딱 한 장 찍었다. 꽃잎에 묻은 물방울이 마치 변산아씨가 남몰래 흘리는 눈물 같았다. 꽃 사진 찍는다고 덤벙대면서 나 역시 알게 모르게 못된 짓을 많이 했을 것이다. 눈으로 즐기고 마음에 담는 게 진정한 감상 태도임을 알건만 왜 자꾸 사진 욕심을 부리는 걸까.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주차장에는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계속 들락거려서 물어보니 변산바람꽃은 30분 정도 도로를 따라 군부대 쪽으로 올라가면 볼 수 있다고 했다. 사진 찍는 사람이 많을 테니 금방 알아볼 수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접기로 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데서 눈치 보면서 사진을 찍고 싶지는 않았다. 그곳 역시 이곳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을 것이다.

 

양자론에 따르면 관찰하는 행위는 대상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세상 모든 일은 상호작용의 결과다. 나에게는 바람직한 일이 상대에게는 원치 않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연을 해치는 의도치 않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사진은 좋은 취미지만 타자에게 주는 피해를 늘 염두에 두면서 조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너무 폐쇄적인 태도도 문제다. 서식지 파괴를 염려해서 꽃이 피는 장소 같은 정보를 감추는 경우가 많다. 물어봐도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 서식지 보존이 중요하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을 함께 누릴 타인의 권리도 소중한 것이다. 좀 더 넓은 눈으로 볼 필요도 있다.

 

7천만 년 전에 거대 운석이 충돌하면서 지구 상에 있는 생물종의 90%가 멸종했다. 1억 년 이상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도 그때 끝이 났다. 그 여파로 포유류가 전면에 등장했고 호모 사피엔스로까지 진화했다. 만약 그 사건이 없었다면 지구는 아직 공룡으로 우글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파괴는 새로운 생성의 시작이다. 그렇다고 지구를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다.

 

수리산 계곡에서 마지막 변산바람꽃을 보면서 든 이런저런 생각이다. 소문난 장소는 어디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모여든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남기려는 마음이야 누구나 가질 수 있고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진에도 지켜야 할 금도가 있는 법이다. 무엇을 하든 자연을 아끼고 귀히 여기는 마음씨가 기본이리라. 자격이 안 된 사람이 든 카메라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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