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6,171인의 교사가 시국 선언을 했다. 지난 달부터 각계각층으로 번지고 있는 시국 선언의 일환으로 내용도 다른 선언과 대동소이하다. 국정 쇄신 요구와 공권력 남용에 대한 사과, 집회 자유 보장 등인데 자사고 설립 등 경쟁만능 학교정책 중단과 교육복지 및 학생 인권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당국에서는 며칠 전부터 법과 원칙을 내세우며 서명을 못하도록 엄포를 놓았다. 서명에 참여할 경우 징계 등의 조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번에 일제고사를 반대했다고 파면이라는 중징계를 내린 전력이 있는 교과부다. 서명에 참여하는 것은 국가공무원법의 성실의 의무, 복종의 의무, 품위 유지의 의무, 집단 행위 금지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작년 촛불 시위 때의 서명에는 별 말이 없던 정부가 이번에는 징계 협박을 하는 걸 보면 법 규정을 떠나 다른 의도가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된다.
또 하나 그들이 내세우는 것 중에 학습권 침해가 있다. 도대체 서명과 학습권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서명을 했다고 수업에 소홀히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앞으로 학습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뜻이라면 어지간히 걱정할 게 없는 사람들이다. 민주사회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정부를 비판한다고 입을 다물게 하고 징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반민주적인 징계감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공무원의 단체행동 금지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집단적인 의사 표현을 단체행동 금지 조항에 연결하는 것은 영 아니올시오 같다.
시국 선언은 처음 서울대 교수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 또한 같은 국가공무원인데 교수의 선언은 괜찮고 교사의 선언은 왜 불법이 되는지도 이해하기 힘들다. 아마 가장 만만한 게 교사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아이들에게 국가 정책과 이념만 충실히 주입하는 앵무새 교원이 되었으면 하는 게 그들의 바람일 것이다.
시국 선언에 대한 서명보다 그런 선언이 나와야 하는 현실,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당국자들의 태도가 더욱 암담하고 부끄럽다.
다음은 교사 시국 선언문이다.
< 6월 민주항쟁의 소중한 가치가 더 이상 짓밟혀서는 안 됩니다. >
6·10 민주항쟁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자랑스러운 민주주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자랑스러운 6월 항쟁의 역사와 가치를 가르쳐야 할 우리 교사들은 국민들의 숱한 고통과 희생 속에 키워온 민주주의의 싹이 무참히 짓밟히는 현 상황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민주주의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심한 당혹감과 자괴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공권력의 남용으로 민주주의의 보루인 ‘언론, 집회, 표현, 결사의 자유’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인권’이 심각하게 유린되고 있습니다. 촛불관련자와 PD수첩 관계자에 대한 수사가 상식을 넘어 무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공안권력을 정치적 목적으로 동원하는 구시대적 형태가 부활되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모한 진압으로 용산 참사가 빚어졌고, 온라인상의 여론에도 재갈이 채워졌습니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공헌해온 시민사회단체들이 불법시위단체로 내몰려 탄압을 받고 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명박 정권의 독선적 정국운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정권의 독선은 민생을 위협하고, 나아가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발전해온 생태와 평화 등 미래지향적 가치마저 위협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을 비롯한 서민들의 생존권이 벼랑에 몰리고 있습니다. 낡은 토목경제 논리로 아름다운 강산이 파헤쳐질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꾸준히 진전되어온 남북간의 화해와 평화가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국민의 생존과 국가의 미래가 총체적 위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교육 또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사교육비 절반, 학교만족 두 배’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도리어 무한입시경쟁을 부추기는 교육정책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학교가 학원화되고, 사교육비가 폭증하며 공교육의 파괴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가진 자만을 위한 귀족학교 설립이 국가 교육정책으로 강행되고 있고, 학교장의 독단적 학교 운영이 나날이 강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과서 수정 등 교육의 정치적 중립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20년간 진전되어온 교육민주화를 거꾸로 돌리는 시대역행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작년 온 나라를 덮었던 촛불의 물결, 올해 노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물결은 시대를 역행하는 현 정부의 독선적 정국운영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22년 전 6월 항쟁 정신의 재현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국민이 선택한 정부가 국민의 버림을 받는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에 우리는 오늘 이 선언을 발표하며, 현 정부의 국정을 전면 쇄신하여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줄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또한 우리의 학교 현장에서도 학교운영의 민주화가 회복되기를 촉구합니다.
1. 정부는 공권력의 남용에 대해 국민 앞에 사과하고 국정을 쇄신하라.
1. 헌법에 보장된 언론과 집회와 양심의 자유와 인권을 철저히 보장하라.
1. 특권층 위주의 정책을 중단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정책을 추진하라.
1. 미디어법 등 반민주 악법 강행 중단하고, 한반도 대운하 재추진 의혹 해소하라.
1. 자사고 설립 등 경쟁만능 학교정책 중단하고, 학교운영의 민주화 보장하라.
1. 빈곤층 학생 지원 교육복지 확대하고, 학생 인권 보장 강화하라.
2009. 6. 18
6월 민주항쟁의 소중한 가치를 기리는 정진후 외 16,171명의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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