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이것은 사람의 말

샌. 2009. 6. 11. 09:42

봇물 터지듯 시국선언이 줄을 잇고 있다. 선언에 참여한 대학 교수들만 4천 명이 넘었다. 그저께는 188 명의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이 '이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6.9 작가선언'을 했다. 역시 작가들이라 선언문 내용이 인상적이었는데, 발표 현장에서는 한 사람씩 연단에 나와 '한 줄 선언'을 낭독했다. 촌철살인의 경구들이 눈길을 끌었다.

선언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작가들이 모여 말한다.

우리의 이념은 사람이고 우리의 배후는 문학이며 우리의 무기는 문장이다.

우리는 다만 견딜 수 없어서 모였다.


모든 눈물은 똑같이 진하고 모든 피는 똑같이 붉고 모든 목숨은 똑같이 존엄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은 극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절대 다수 국민의 눈물과 피와 목숨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한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다. 본래 문학은 한계를 알지 못한다. 상대적 자유가 아니라 절대적 자유를 꿈꾼다. 어떤 사회 체제 안에서도 그 가두리를 답답해하면서 탈주와 월경을 꿈꾸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 본연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차라리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다급한 마음으로 1987년 6월을 떠올린다. 박종철의 죽음이 앞에 있었고 이한열의 죽음이 뒤에 있었다. 그 죽음들의 대가로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힘겹게 그것을 가꿔왔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망각할 권리가 없다. 이명박 정권 1년 만에 대한민국은 1987년 이전으로 후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가 하나의 정부인 작가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조직도, 집행부도, 정강도 없다.


우리는 특정한 이념에 기대어 발언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아무런 이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중도실용주의’라는 가짜 이념은 집권 1년도 못 돼 폐기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도처에서 헌법 위에 군림하는 독재의 얼굴을 본다. 용산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짓밟는 와중에 여섯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고도 이명박 정부는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여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지만 저들이 행한 일은 위선적인 사과와 광범위한 탄압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론 장악을 기도했고 도심 광장과 사이버 광장에 차벽을 치고 철조망을 세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는 이 정부가 시대착오적인 색깔론과 천박한 관료주의로 문화예술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전직 대통령을 겨냥한 사상 최악의 표적수사와 비열한 여론몰이는 그를 벼랑에서 투신하게 하였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매장되었다.


이 모든 일에 적극 가담한 정치검찰과 수구언론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울린 종지기들로 고발한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굴종하고 죽은 권력에는 군림하면서 영혼을 팔고 정의를 내던진 정치검찰들, 증오와 저주의 저널리즘으로 민주화의 역사를 모독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조롱하는 수구언론에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가 저들과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혹해진다. 저들을 여전히 검찰과 언론이라고 불러야 하나. 곰팡이가 온 집을 뒤덮었다면 그것은 곰팡이가 슨 집이 아니라 집처럼 보이는 곰팡이일 뿐이다. 저 권력의 몸종들과 함께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와 보편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달려온 이명박 정권 1년은 이토록 참담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서 우리는 깊은 절망을 느낀다. 저들은 수치를 모르고 슬픔을 모른다. 수치와 슬픔을 아는 것이 사람이고, 사람됨이라는 가치에 헌신하는 것이 문학이다. 우리는 문학의 이름으로 이명박 정부를 규탄한다.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 이것은 과장인가?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종이와 펜이 있다. 그러니 동의하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끝내 저항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원을 갈아엎고 있는 눈먼 불도저를 향해, 머리도 영혼도 심장도 없는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저항할 것이다. 가장 뜨거운 한 줄의 문장으로, 가장 힘센 한 문장의 모국어로 말할 것이다. 사람의 말을,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이니까 해야 하며 사람인 한 멈출 수 없는 그 말을. 아름답고 정의로운 모든 문학의 마지막 말, 그 말을.


우리는 작가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글을 씁니다.

우리는 각자의 나라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의 바탕에 언제나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편에 섭니다.


우리는 모였습니다.

참혹한 오늘을 불러온 것도 우리이지만

참다운 내일을 만드는 이도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권의 야만에 분노합니다.

사람의 설 자리가 사라진 현실에 분노합니다.


우리는 보고 싶습니다.

이견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정치가의 얼굴을.

우리는 듣고 싶습니다.

아첨과 왜곡의 목소리가 아니라 공정하고 진실된 언론의 발언을.

우리는 느끼고 싶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확신과 자부를.

우리는 되찾고 싶습니다.

본래 우리 것인 광장과 집과 대지, 스스로 흘러 생명일 수 있는 강물을.

우리는 꿈꾸고 싶습니다.

그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는 사회,

양심과 이성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

자유와 평등은 원래 사람의 것이라 믿고 자라날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를.


우리는 입을 엽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입니다.

2009년 6월 9일

작가선언 6.9

 

그리고 작가들의 '한 줄 선언'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을 골라 보았다. 민주주의 후퇴를 안타까워하고, 우리들의 자성과 다짐을 촉구하며, MB 정권의 종말을 선언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시인이 깨어 있으면 독재자는 잠들지 못한다.” (전성태)

“세스코에 전화하기 전에 냉큼 물러가라!” (정여울)

“이곳은 눈먼 자들의 도시가 아니다. 우리는 장님이 아니다. 우리는 보고 느끼고 표현할 것이다.” (강성은)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이백 살까지 살아남겠다.” (김사과)

“우리의 영혼이 고통스러운 건 민주주의가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손홍규)


“너를 지울 수 없다. 민주주의여!” (박형숙)

“무능한 정권, 썩은 검찰, 역겨운 언론 - 적출 대상 3종 세트. 아차, 나도 문제야.” (명지현)

“한 손엔 곤봉 한 손엔 삽, 머리엔 떡찰 가슴엔 악법, 썩은 입술로 산자를 물어뜯는 괴물, 누가 광장에 MonsterB를 풀어놨는가!” (윤예영)

“밥상도 민주주의도 원탁도, 다 엎은 자여 이제는 당신이 고꾸라질 때!” (문동만)


“누가 내 사랑을 파괴하면 나는 그가 신이어도 나는 그를 파괴할 것이다. 나는 민주주의의 애인이다.” (신형철)

“내 이웃이 헌법적 자유와 권리를 빼앗기고 모멸을 삼키며 죽어갈 때, 나는 어디에 있었나?” (이안)

“잘못 뽑아 개고생, 평생 두고 후회한다! 잠깐 실수 후회 말고, 미리 살펴 재난 막자!” (김정남)

“푸르게 날이 선 6월의 잎사귀로 썩어버린 심장을 찌릅니다. 굿바이 MB!” (유형진)

“너를 지울 수 없다. 민주주의여!” (박형숙)


“나는 부끄러운 손으로 내 삶의 길들여진 부위만을 잘라, 쥐불 놓는다,” (김요일)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고 패배는 당신들의 것입니다.” (김경인)

“이명박 정권은 문화와 민주를 파괴하는 광기의 야만을 국민 앞에 사죄하고 물러가라.” (박민규)

“불법 폭력이 문제라고? 맞다. 늘 그게 문제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그렇게 두들겨 맞아 시퍼렇게 멍들고 피 흘리며 죽어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김명기)

“나는 분노한다. 국가가 없을 때 당한 고통을 국가 때문에 당한다는 것에. 나는 비참하다. 그 국가를 내가 만들었다는 것에.” (박상수)


“하느님, 우리가 이 정권을 무너뜨리지 못하여, 총명하고 선량한 제 딸아이가 커서 감옥 갈 확률만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만교)

"더 이상 갉아먹지 마라. 쥐는 벽을 잊어도 갉아먹힌 벽은 쥐를 잊지 못하는 법이다.“ (박성원)

“피리 부는 사나이여, 이 쥐떼를 다 데려가 우리에게 노래를 허락하길.” (박연준)

“각자 흘린 눈물이 같은 맛을 낼 때, 분노는 만인의 양식!” (강정)

“들쥐들의 교묘한 협잡 더는 못 참겠어. 울화의 향불이 지글지글 타올라 가만 못 있겠어.” (성기완)


“정책이 비문(非文)이다. 언론의 맞춤법은 작위적이고, 미친개들은 국민에게 오타를 남발한다. 당신들의 언어는 번역이 안 된다. 암울한 시국의 문장을 견딜 수 없다. 오래된 생각이다.” (박상)

“절명으로 살아나는 연두! 연두! 연두! 함부로 파묻지 마라. 봄눈(目), 따뜻한 심장.” (권헌형)

“모든 버려진 약속과 빛바랜 희망을 위해 병문안 가는 길입니다. 조심하세요. 우리의 병문안은 지금 너무 뜨겁습니다.” (권희철)

“우리의 혀를 자르면, 우리는 목을 내밀 것이다.” (김남극)

“문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경제발전 운운하는 거창한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 아래 억압된 정직한 욕망이다.” (김남혁)


“권력의 상상력이 상식을 구금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상상력은 너희를 포위할 것이다.” (김성중)

“당신이 도대체 사람입니까? 스스로에게 던져오던 이 질문을 비로소 세상에 내놓습니다.” (김소연)

“우리야말로 故人이었으되, 당신의 죽음이 우리를 살렸으니 우리의 삶은 당신을 살려내리라.” (박대현)

“아름다움과 반성, 내 언어의 피스톤을 작동시키는 힘의 원천, 민주주의.” (송승환)

“공기 속에서 온통 비린내가 납니다. 없는 문이라면 그려서라도 열어젖혀야겠습니다.” (신해욱)


“사람의 마을에는 사람이 살아야 한다. 그곳에도 사람이 지나갑니까?” (우대식)

“사랑이나 꿈 때문에 절망해볼 권리를 달라. 돈 때문이 아니라.” (윤이형)

“우리에게 영웅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 자체이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죽음의 위협과 싸울 것이다.” (정한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 우리의 말은 솟구치고 터져서 광장에 스밀 것이다.” (정혜경)

“이 한 줄은 내 눈엣가시가 되어 바로 보게 하고, 내 입엣가시가 되어 침묵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윤지영)


“너무 어둡지 않은가? 너무 비좁지 않은가? 너무 희박하지 않은가?” (이현승)

“모퉁이를 도니 꽃은 떨어져서 피어나고, 모두 눈을 뜨고 있습니다.” (장무령)

“나는 의문이 죄가 되지 않는 고요한 세계를 원한다.” (조연호)

“시인, 모국어라는 지우개로 독재라는 오자를 지운다.” (조정)

“해가 뜨지 않는다면 해를 그리지요. 탈색하는 피가 아닌 잉크의 푸르름으로.”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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