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펌] MB씨는 진정하다

샌. 2009. 7. 13. 09:53

MB씨는 진정하다

 

"나는 진정성을 갖고 접근하는데 잘 안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나를 만나고 나가면 마치 무슨 지시를 받는 것처럼 비쳐지고 해 아쉽다." 우리의 MB씨께서 한나라당과의 불화와 불통에 관해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말과 사건을 날마다 접하게 된 지가 17개월째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이번에는 두드러지게 어처구니가 없다. 왜 그런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겠는데, 맡은 칼럼의 난을 채우기 위해 적어본다.


MB씨는 진정하다. 미국 소고기에 반대하는 촛불시위를 사탄의 장난이라고 보면서 지금까지 진정으로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신영철 씨는 서울중앙지법원장으로 있을 때 대통령의 그런 진성성을 바로 읽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재판에 개입할 생각을 했겠는가?


MB씨는 진정하다. 재개발을 통해 지주와 건설업자가 이익을 챙길 때 세입자들은 귀찮기만 한 걸림돌이라고 진정으로 생각한다. 김석기 씨는 서울경찰청장으로 있을 때 대통령의 그런 진정성을 바로 읽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자기 부하를 포함해서 멀쩡한 생목숨을 여섯이나 희생시키면서 무모한 작전을 펼쳤겠는가?


MB씨는 진정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KBS를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진정으로 생각했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그런 대통령의 진정성을 바로 읽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정연주 사장을 몰아내기 위해 먼저 신태섭 이사를 억지로 해촉했겠는가? 그리고 신태섭 이사가 동의대와 KBS에서 당한 해임처분이 부당하다며 법정에 호소한 소송의 결과를 기다릴 생각도 해보지 않고 이사 자리를 채워서 정연주 해임안을 통과시켰겠는가?


MB씨는 진정하다. 미네르바가 인터넷에 올린 글 때문에 환율이 불안해졌다고 진정으로 믿는다. 김경한 법무장관은 그 진정성을 바로 읽었고, 검찰은 그런 대통령과 장관의 진정성을 또 바로 읽어서 미네르바를 기소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죄가 뻔한 재판을 왜 시작했겠는가? 재판정에서 무죄판결은 몇 달 후의 일이고, 일단은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MB씨에게 충성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MB씨는 진정하다. 예술에서 이론은 좌파고 실기는 우파라고 진정으로 생각하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스며든 좌파를 색출해서 뿌리 뽑아야 한다고 진정으로 생각한다. 유인촌 문광부 장관과 신재민 차관은 그런 MB씨의 진정성을 바로 읽고 감격에 겨워 신바람이 났다. 그렇지 않다면 황지우 총장에게 치사하기 이를 데 없는 혐의를 뒤집어씌워서 물러나게 만들고, 진중권 교수에게 계약된 강의를 안 주고 나서 반년 치 연봉을 돌려받는다는 치졸한 발상이 왜 나왔겠는가?


MB씨는 진정하다. "잃어버린 10년"을 복수하기 위해서는 고 노무현 대통령을 확실하게 밟아야 한다고 진정으로 생각했다. 김경한 법무장관과 검찰은 그런 대통령의 진정성을 제대로 읽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왜 전직 대통령을 먼지털이식으로 수사하면서, 쓰레기 언론사들과 합작해서 토끼몰이식 인격살인극을 벌였겠는가?


MB씨는 진정하다. 개인의 인권이나 표현의 자유는 말장난이고, 통치자의 뜻을 무조건 받들면 법과 질서가 실현된다고 진정으로 믿는다. 다시 김경한 장관과 검찰은 대통령의 토건주의 법치가 곧 진시황식 법치와 똑같다는 진정성을 바로 읽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피디수첩>을 기소한다는 발상이 가능했겠으며, 어떻게 작가의 개인 이메일을 뒤져서 짜깁기로 "반정부성향"을 조립한 것을 증거랍시고 공표한다는 발상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MB씨는 진정하다. 4대강 정비사업이 곧 대운하나 마찬가지라고 진정으로 생각하면서, 동시에 4대강 정비사업은 대운하가 아니라고도 진정으로 생각한다. 다시 유인촌 장관은 같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이 오묘한 대통령의 진정성을 바로 읽고서, 단지 그 신비한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일부 몰지각한 국민들만 따돌리면 된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대한늬우스' 따위 선전으로 계몽이 된다고 믿겠는가?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유머로 봐달라는 소리가 나오는가? MB를 조롱하는 풍자와 패러디와 유머가 넘치는 것은 국민들이 한가하고 여유로워서가 아니라, 치솟는 분노를 자제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각고의 고통이 뒤에 있는 것이다.


MB씨는 진정하다. 경기도 농촌 아동들에 대한 무상급식은 MB식 교육개혁에 반대하기 위한 좌경 정책이라고 진정으로 생각한다. 경기도 교육위원들은 대통령의 교육목표가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진정성을 바로 읽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아이들의 급식 예산을 깎았겠는가?


MB씨는 진정하다. 북한에 대해 아무 정책도 없이 무작정 한미동맹만 되뇌다보면 한반도 평화가 저절로 찾아오리라고 진정으로 느낀다. 현인택 통일부장관은 그런 무작정 대북정책의 진정성을 바로 읽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지금처럼 6·15선언을 이행할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대안을 내놓지도 못하면서, 그냥 시간만 보내면 북한이 스스로 핵개발을 포기하리라는 상상을 할 수가 있겠는가?


MB씨는 진정하다.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입만 벙긋해도 혼찌검으로 다스려야 위신이 선다고 진정으로 믿고 있다. 안병만 교육부장관은 박정희 흉내를 내고 싶어 하는 마음의 진정성을 바로 읽었다. 그렇지 않다면 위법이 아니라고 나온 내부 검토의견까지 무시하고, 전교조에 대한 징계를 강행할 리가 있겠는가?


MB씨는 진정하다. 이 땅 위의 인구 가운데 30%만이 국민이고 나머지는 하청업체의 인부일 뿐이라고 진정으로 확신한다. 인부들에게는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다. 그렇지 않다면 도처에서 갈등이 유발되고 확대일로에 있는데 자기 때문임을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 남 탓만 할 수가 있겠는가?


MB씨는 진정하다. 콘크리트 위에 녹색 페인트칠을 하면 녹색환경이 된다고 진정으로 믿고 있다. 퇴임한 후 환경운동을 하고 싶다는 말도 그래서 틀림없이 진정이다. 콘크리트와 녹색 페인트의 결합이 그에게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MB씨의 진정성은 확실히 믿는다. 한나라당 의원들도 그의 진정성만은 믿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반대하는 것이고, 한나라당 의원들도 그래서 그가 말만 하면 지시로 듣는 것이다.


내 눈에 분명하게 보이고, 아마도 장관들과 한나라당 의원들 눈에도 분명해 보일 이 모든 진정성이 MB씨에게는 잘 안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 모든 일들 중 단 한 가지에 관해서라도 대통령이 사과하고, 후속 조치를 통해 잘못을 인정하고 교정하려는 태도를 보였다면, 지금만큼 원성이 자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요구를 거부하고 오만하게 버틴다는 것은 결국 저 모든 일에 대해 자기에게 책임을 물으라는 배짱이다. 세칭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김진홍이라는 사람이 자기 입으로 "배째라"가 전공이라면서, 이명박 씨를 천재라고 부르는 소리가 뜬금없지만은 않은 까닭이다.


국민이라는 불특정다수와 소통이 되려면 주변 사람들과 먼저 소통이 돼야 한다. 주변 사람들과 소통이 되려면 자기 자신과 먼저 소통이 돼야 한다. 자기 자신과 소통이 되려면 자아가 하나의 영혼으로 통일이 되어야 한다. 자아가 통일되려면 자기가 하는 행동과 자기가 하는 말이 어떤 관계인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말과 행동이 아무리 따로 놀아도 개의치 않는 재주를 가지고 70평생을 살면서 돈도 벌고 서울시장도 지낸 사람이 남은 임기 안에 자아를 통일시킬 수 있다는 쪽에 내기를 걸 수는 없다. 그러니 MB씨 버리기, 또는 MB 없는 세상, 또는 MB와 상관없이 사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몰리더라도 인지상정이랄 밖에.


이미 그렇게 돌아선 사람들은 접어두고, 눈치 빠른 OO일보도 인제부터는 슬슬 MB씨를 버리는 시나리오를 고려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내 눈에는 비친다.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노태우를 쳐야 했고, 이회창과 정동영은 김영삼과 노무현을 때리고도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자기네 당의 현직 대통령을 공격해서 차별화해 보겠다는 뱃심은 한국정치에서 흔한 관행이다. 다음번 선거에 즈음하여 한나라당에서 꿈틀거릴 존재라면 잠룡이든 살모사든 지렁이든 싫든 좋든 모두 "MB와 다르다"고 부르짖어야 할 꼴이 뻔하다. 한국정치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나쁠 것 같지는 않지만, 인간적으로는 불쌍한 생각이 들 것 같다. 무엇보다 잘못 배운 기독교 탓인 것 같아서 종교적으로 미안한 맘도 든다. 그랬다가도 앞으로 3년 반 이상을 계속 날마다 점점 더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살아야 할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하다.

이명박 장로는 뭘 믿을까?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다. 이 말은 누구라도 "종교"라는 이름만 걸면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별로 사회적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이비" 종교, 또는 "사교(邪敎)"라고 불린 집단들이 적지 않았고, 그 안에서 교주의 횡포나 사기, 착취, 폭행, 심지어 살인이 있었다고 의혹이 제기된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공권력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실태를 조사한 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양심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볼 수는 없다. 전교조는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방식을 우려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했다가 수색 대상이 되었다. 민주노동당의 한 간부는 친북활동혐의로 체포되었는데,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집안 책꽂이에 꽂혀있었던 것이 증거물로 압수되었다고 한다. 마르크스를 비판한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표지가 빨개서 압수되었다든지, 막스(Max) 베버의 저서가 칼 맑스(Marx)의 저서로 오인되어 압수되었다는 전설의 시대가 다시 찾아오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 같다. 김경한 법무장관이나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막스 베버와 카를 마르크스의 차이를 얼마나 알 것 같으냐고 누가 내게 물으면, 뭐라 대답해야할지 사실 자신이 없다.


양심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과거에는 가끔, 지금은 자주, 아주 과거에는 일상적으로, 이뤄지다 보니까,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양심의 자유를 국가권력에게 침해당하는 사람들이 대략 어떤 양심을 가지고 사는지를 비교적 분명하게 이해할 수가 있다. 반면에 종교의 자유는 과거나 현재나 거의 무제한으로 허용되다 보니까 한 가지 나쁜 점이 있다. 무슨 무슨 종교라는 집단, 또는 거기 속한다고 하는 어떤 개인이 어떤 종류의 양심을 가지고 사는지 종교의 명목만 봐서는 거의 알 길이 없다.


나는 명목상으로 장로교단에 속하는 세례교인이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처음부터 줄곧 기독교도들이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불가지론 이상으로는 수용한 적이 없다. 유학 시절에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를 받은 직후, 학교에서 미국인 동료와 대화하던 중 "믿는 사람(believer)"과 "믿지 않는 사람(non-believer)"을 구분해서 말했다가 바로, "그때 '믿는다'는 게 뭘 믿는 건데?"라는 반문을 받았었다. 대답을 못했고, 그 후로 다시는 그런 식으로 구분하는 어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직도 "뭘 믿는지"에 관해 대답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보도를 보니 소망교회의 장로라고 한다. 한국 장로교에서 흔한 어법으로 말한다면 "신앙이 좋은 사람"에 속할 확률이 모르긴 몰라도 꽤나 높을 성싶다. 그런데 그는 뭘 믿는 것일까? 아마 "여호와"라고도 불리고 "하나님"이라고도 불리는 모종의 신을 믿는다는 데까지는 대답이 금방 나올 것이다. 그런데 "신을 믿는다"고 할 때, 그 "신"이 뭘까? 나는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인간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신이 뭔지를 대답한다는 것은 인간이 사용하는 범주 안에 신을 체포하는 셈과 같고, 그렇게 인간에게 포박당하는 존재라면 전지전능한 만유의 창조주로서 시간 밖에서 영원히 언제나 어디에나 편재(遍在)하는 신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뭘 믿는 건데?"라는 반문에 대답을 못했고 지금도 못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만약 말로 뭔가를 얘기해 보려면 "신이 뭐냐"고 묻기보다는 "신을 믿는다는 일이 뭘 어떻게 하는 일인지"를 묻는 편이 좀더 낫다고 본다. 물론 질문을 이렇게 바꿔도 까다롭고 논쟁적이기는 마찬가지라서 신학이나 철학계의 논문이라면 몰라도, 대중적인 신문 칼럼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기는 곤란할 듯하다. <프레시안>의 독자들이 아무리 참을성이 많아도 그런 (아주 장황하면서도 초점이 흐리멍덩할 수밖에 없는) 논의까지 참기에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다행히 대략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훌륭한 소재가 있다.


"바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한국인 둘이 2009년에 이승을 하직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인데, 기독교 얘기니까 노무현보다는 김수환이 훨씬 좋은 예일 것이다. 바보 김수환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고 한다. "사랑"이라는 말 역시 "예수"라는 말이 커져버린 만큼이나 너무나 거창한 포장으로 덮여버려서 군데군데 때가 끼고 어쩌면 고름까지도 한구석에 맺힐 지경이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의 이명박 장로가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 잘 안 보이는 게 내 영혼이 각박한 탓은 아닌 것 같다.


김수환 추기경은 친일의 혐의도 있고, 독재자에게 좀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겪었으며, 만년에는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지적도 받았다. 그 정도 유명했던 인물에게 그 정도 논란이야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대체로 신사였고,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겸손한 언행을 보이면서 평화를 위해 많이 참는 사람이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그가 실지로 살 수밖에 없었던 삶보다 더 높고 많은 기대치를 설정해놓고 거기에 못 미쳤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그가 한 사람의 기독교도로서 상대적으로 돋보인다는 데에는 시비를 걸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신을 믿는다는 게 뭘 어떻게 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예시적인 대답으로서 김 추기경의 사례가 괜찮은 소재일 것 같다.


온유하고, 겸손하고, 많이 참는 신사라면 일단 신을 제대로 믿는 사람으로서 후보군에 안전하게 들어 갈 것 같다. 반면에 강퍅하고, 오만하고, 성질 급한 독선적인 사람이라면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를 믿는다고 연관 짓기 위해서 상당히 특별한 해명이 필요할 것 같다. 조지 W. 부시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고, 아랍계라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까지 하면서, 말로만 떠들어댄 신은 하마스나 탈레반 같은 이슬람 전사들이 무기 끝에 매달아 놓은 신과 닮았지 기독교의 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세 가톨릭의 십자군이나 종교재판과 영락없이 닮은꼴이지 십자가에 못박혀죽은 예수와는 어떤 각도로 투영해도 겹쳐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미국에서는 마크 샌포드라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지사가 공무로 출장 간다고 거짓말을 해놓고 숨겨놓은 애인과 밀회를 즐겨온 사실이 발각 되었는데, 이 역시 틈만 나면 기독교를 팔아서 진보이념을 공격해 온 사람이라고 한다. 이 일이 발각된 다음에도 계속 신과 성경을 들먹이면서 "가족의 가치"를 입에 담는다고 한다. 나는 남의 연애지사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연애를 한 것까지는 별로 논평할 가치가 없는데, 기독교의 이름으로 문화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사람이 스스로 정반대의 행태를 보여 놓고서, 계속 기독교를 팔아먹는 언행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여하간 기독교가 무엇인지 논쟁거리임은 분명한 것 같다. 이명박 장로 대통령이 믿는 기독교는 어떤 버전인지 대단히 불투명한 것도 분명한 것 같고, 그게 어떤 버전이든지 김수환 추기경의 버전과 크게 다른 것도 의문의 여지가 별로 없을 것 같다. 사랑, 온유, 겸손, 인내 등에서 너무나 딴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계산을 잘 뽑아보면 한국에 기독교도가 천만 명도 넘는다고 통계가 잡히는 모양인데, 그들 가운데 이명박 장로의 행태를 기독교도로서 승인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누가 이런 것은 여론조사를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한국 기독교에서는 개인의 양심이라는 것이 별로 중시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도이기만 하면 장로 대통령을 무조건 지지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속으로 승인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기독교도로서 장로를 비판한다는 게 민망해서 말을 안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더 많은 기독교도들이 자기 생각과 양심을 공개적으로 토로하는 것이 기독교 정신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신이 뭐냐"라는 형태로 묻건, "신을 믿는다는 게 뭘 어떻게 하는 것이냐"는 방식으로 묻건, 기독교의 신도라는 명목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가 드러나려면, 자기 생각과 양심을 공론장에서 도마 위에 올려놓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퍅하고 오만하고 성질 급하고 독선적인 행태는 신을 믿는 사람이 보일만한 행동으로서 썩 제격은 아니다. 이 나라의 검찰과 경찰과 구청과 문화관광체육부와 교육과학기술부와 기타 등등 정부기관들이 지금 나타내는 작태들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으로는 전혀 보이지가 않아서다.

 

- '프레시안'에 실린 박동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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