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다큐멘타리 영화인 '워낭소리'가 400만 가까운 관중을 동원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감동은 입소문을 타고 번졌고 주로중년 관객들의 향수와 눈물샘을자극했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워낭소리'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도 있다는 것을 K 씨의 글을 읽고야 알았다.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관점은 늘 신선하다. 사물이나 현상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지적해주는 것은 시야를 넓히는데 도움이 된다.
'워낭소리'에 대한 K 씨의 짧은 소감은 이렇다.
'나는 궁금하다. 지난 여름 내내 내 새끼에게 미친 소를 먹일 순 없다며 두 눈 부릅뜨고 소리치던 사람들이, 한우라면 없어서 못 먹는다는 사람들이, 평균 수명의 곱절을 살며 죽도록 일해야 했던 한우 이야기에 그토록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대화도 소통도 모르는 남자와 혼인하여, 그의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먹이고 논으로 밭으로 소처럼 노동하며 인생을 다 보내야했던 여성의 한 맺힌 푸념은, 그리 보조적이고 경박하게만 배치되어도 되는 건지, 자신과 소의 늙고 병든 몸을, 꿈쩍도 못하는 순간까지 부리고 또 부리는 사람에게서, 노동의 신성함과 우정을 느낀다는 사람들의 잔혹한 노동관과 우정이.'
'워낭소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로 지적하는 것은여성 차별, 인간중심적인 동물 사랑, 노동의 의미 등인 것 같다. 나도 영화를 보는 동안은 눈물에 가려 지나쳐버렸지만 한 번쯤은 곰곰히 되새겨볼 만한 것들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그 사람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기는 어렵다.
그런 세부적인 것에 대한 논란보다는 영화를 보며 흘리는 중년층의 눈물은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영화의 어떤 요소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을까. 그러나 나를 비롯하여 철저히 도시생활에 적응된 우리들은 영화가 보여주는 그런 삶과는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이다. 할아버지의 고된 노동이나 생태주의적 삶은 우리들 누구에게나 내면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대부분이 그럴 의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린 뒤에는 집에 돌아가 TV의 막장드라마에 빠져든다.
그런 시각에서 쓴 글 중에서 다음 글이 나에게는 가장 인상적이었다.
독립영화 <워낭소리>가 관객 동원 100만을 향해 가고 있다. 한국 독립영화 발전에 좋은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부풀고 있다. 급기야 이명박 대통령 내외까지 영화를 관람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대통령의 영화 관람을 애써 정치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대통령 내외까지 나서서 사이좋게 영화관을 찾게 만든 흥행의 요소가 무엇인지는 한번 따져 봐야 할 것 같다.
<워낭소리>는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풍경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이다. 늙은 소와 할아버지라는 익숙하면서도 특이한 소재를 통해 존재 사이의 교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윤리적 뉘앙스를 물씬 풍긴다. 여기에서 이 소재를 익숙하면서도 특이하다고 한 까닭은 영화를 소비하는 관객의 연령층과 무관하지 않다. 독립영화는 장르의 특성상 젊은 세대들의 관심에 의존하게 마련인데, <워낭소리>는 윗세대까지도 아우르는 흡입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다루는 소재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특이한 소재일 수 있겠지만, 그 윗세대에게는 익숙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세대들에게 이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내용들이 하나의 풍경이라면, 윗세대들에게는 과거에 겪었던 실제 삶의 기억이다.
<워낭소리>의 인기비결 중 하나가 이처럼 다양한 세대 계층을 아우를 수 있는 공감의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일 텐데, 그 요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시대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던 것이다. 이것을 생태주의에 대한 대중의 공감이라거나 아니면 아버지나 고향에 대한 향수라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돌아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곰곰이 따져보면, <워낭소리>를 흥행의 반열로 끌어올린 요소들이라고 언급하는 고향이나 아버지, 또는 농촌이나 자연은 대체로 도시 중간계급의 ‘웰빙’ 개념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도시화와 산업화의 시대에 이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삶의 터전을 뿌리째 옮겨온 경험들을 갖고 있다. 김지하의 <서울길>이 “몸 팔러 간다”는 말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결연한 이주의 경험은 ‘고향=농촌’이라는 등식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런 등식은 농업을 끊임없이 산업화를 위해 해체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도시 생활의 결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분열적 삶의 진실을 은폐시켰다.
김종철은 이런 분열증을 개탄하지만, 사실은 <녹색평론>에 공감하고 이를 지탱하는 힘은 농촌에서 나온다기보다 농촌과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 중간계급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건 실현 불가능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구축하고 있는 유토피아 충동의 운명일 수 있겠지만, 동시에 이른바 ‘생태주의’가 어떻게 한국 사회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국가’라는 좀비를 넘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내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국가를 개조해서 환경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국가-환경론의 생각을 <워낭소리>에서 드러나는 대중의 열망은 어떻게 넘어갈 수 있을까? <워낭소리>의 흥행이 독립영화의 생명에 활기를 불어 넣어줄 지는 모르지만, 이 영화가 구현하고 있는 세계관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질 것 같지 않다는 불길한 예감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촬영지를 찾아가서 노부부의 사진을 찍거나 일대를 돌아보며 영화의 감동을 되새김질하는 ‘성지순례’의 해프닝은 이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워낭소리>의 세계는 도시 중간계급에게 그냥 풍경인 것이고, ‘우리’라기보다 ‘그들’에 속하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소는 항상 그곳에 있었지만 도시 중간계급의 미학은 이들을 볼 수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던 것이 ‘고유한 속성’을 드러냈을 때, 이들은 마치 새로운 것이나 ‘발견’한 것처럼 놀라워하는 것이다.
청계천처럼, <워낭소리>는 자본주의라는 법에 복종하는 도시 중간계급의 과잉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과잉에서 ‘문화’라는 것이 서식하는 것이겠지만, 또한 이 사실에서 <워낭소리>가 ‘농촌의 이야기’라기보다 ‘농촌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겠다. 많은 이들이 할아버지와 소를 “불쌍하다”고 눈물을 흘리지만, 사실은 그 눈물은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질주해온 한국 자본주의의 자기 증식 논리에 대한 반성이어야 할 것이다.
- ‘워낭소리’와 도시 중간계급의 분열적 욕망 / 이택광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사람에 따라 반응이나 감동의 질은 각양각색이다.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영화의 매력이다. 좋은 영화,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영화라면의당 그래야 한다. '워낭소리'의 눈물을 통해 도시인들의 분열적 욕망을 읽어내고 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더 큰 소득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의미를떠나서도 '워낭소리'의 눈물은귀하다. 영화는 수천 세대 동안 계속된 우리들 본래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우리들 가슴에는 그때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을 모두의 눈물이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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