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한강길 30km를 걷다

샌. 2005. 11. 21. 15:28



어제는 오랜 시간 한강 둔치길을 걸었다. 배낭에 가벼운 간식거리를 챙긴 후 아내와 같이 10시 30분에 집을 나섰다.집이 한강에서 가까운 관계로 10여분이면 한강에 닿을 수가 있다. 걸어서 잠실대교를 건너 남쪽 잠실지구 둔치로 갔다. 사람들은 대개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려고 하지 않지만 시끄러운 자동차 소음을 견딜 마음만 있다면 다리를 건너보는 맛도 색다르다.

 

여기서 한강 둔치의 남쪽 길을 따라 선유도까지 걸을 예정이었다. 거리로는 약 25km, 7시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어제는 맑고 바람도 잠잠한 좋은 날씨였다. 그러나 한강공원에는 늦가을의 조금은 쌀쌀한 날씨 탓인지 놀러나온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즐기는 젊은이들의 행렬이 가끔씩 바람을 가르며 지나갔다.

 

두 시간 정도 걸어 성수대교 아래를 지날 때쯤 되니 아내가 발바닥이 아프다고 하는데 발목이 아니어서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한강은 시원하고 스케일이 큰 강이다. 88 올림픽을 계기로 대대적으로 정비가 되었지만 막상 와보면 아쉬운 점도 많다. 그 중에서도 제일은 나무가 없다는 것이다. 강벽은 시멘트로 발라버리고 나무나 풀들이 자랄 여지가 없다. 그리고 둔치에도 거의 나무를 심어놓지 않았다. 또 당장해결될 성질은 아니지만 강변에서보이는 무질서한 스카이라인의 문제, 한강 다리들의 미관상 느껴지는 별로 아름답지 못한 디자인 문제 등이 있다.

 

다행히 잠원지구에는 넓은 갈대밭과 억새밭이 조성되어 있어 좋았다. 인공적인 시설물보다는 이렇게 자연 상태를 유지시켜 주는 것이 나에게는 훨씬 나아보였다.

 



그런데반포지구를 지나갈 때 문제가 생겼다. 용돈으로 쓰려고 주머니에 넣어가지고간 3만원이 없어진 것이었다. 아마 장갑을 넣었다 뺏다 하면서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여의도에 가서 점심을 먹고, 선유도까지 간 다음 거기서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돈이 한 푼도 없으니 이젠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막막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적선을 구하지 않은 한 되돌아서 가는 길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아내가 아무리 발이 아파도 중도에서 그만 두고 차편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멍청하게 돈을 흘려버린 나 자신에 무척 화가 났다.

 

힘들어하는 아내를 독려하며 잠실까지 돌아오니 해가 늬엿늬엿 저물었다.저녁이 되면서는 바람도 불기 시작하고 기온도 많이 떨어졌다. 간이매점을 지날 때는따뜻한 오뎅국물이 간절했지만 돈 없는 설움만 더해질 뿐이었다. 잠시가 아니라 돈을 못 벌어 정말 생활이 춥고 배 고프다면 그 심정이 어떠할지 상상키 어려울 것 같았다.

 

잠실에서보이는 북서쪽 방향의 서울 하늘에는 탁한 매연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어두워져서야 잠실대교을 다시 걸어서 건너는데 교통 체증으로 차들이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밀려서 나아가는 차들의 속력이 우리가 걷는 걸음보다 못했다.

 



집에 도착하니 저녁 6시가 넘었다. 둘이서 일곱 시간이 넘게 약 30km를 걸은 셈이었다. 특히 아내가 내내 고생을 했다. 집에 와서 양말을 벗으니 벌겋게 부어오른 발바닥에는 여러 군데 물집이 생겨 있었다. 너무 많이 걸어서 그냥 단순히 발바닥이 아픈 줄 알았는데 저렇게까지 심한 줄은 몰랐었다. 억지로 걷기를 강요한 내 탓이어서 미안하고 안스러웠다.

 

나는 군대서 며칠간 연속으로 행군을 해 본 경험이 있다. 그러나 아내는 이렇게 길게 걸어본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상황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내 고집대로 밀고 나간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아내는 다시는 따라가지 않겠다고 했다.

 



멍청하게도 돈을 잃어버려서 생고생을 했듯이 인생길에도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고 그래서 삶의 길이 180도로 바뀌어지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는 식으로 우리들 앞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치 어제처럼 빈털털이가 되는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 그럴 때어떤 삶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걸어오며 여러 가지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걷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올 겨울에는 산길 뿐만 아니라 한강길도 걸어보고 싶다. 혼자 걷는 것도 좋고, 둘이서도 좋다. 탁 트인 자연 속에서 걸으면서얘기를 나누면 꼬인 매듭도 훨씬 수월하게 풀릴 수 있다.

 

아내가 이제는 다시 나와 같이 안 간다고 했지만 발이 나으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걸 기대하며 좋은 신발 하나를 선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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