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 바. 라. 기.

고향집 가세 / 정태춘 본문

시읽는기쁨

고향집 가세 / 정태춘

샌. 2025. 10. 5. 07:53

내 고향집 뒤뜰의 해바라기 울타리에 기대어 자고

담 너머 논둑길로 황소마차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무너진 장독대 틈 사이로 난쟁이 채송화 피우려

푸석한 스레트 지붕 위로 햇살이 비춰오겠지

에헤 에헤야 아침이 올 게야 에헤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내 고향집 담 그늘의 호랭이꽃 기세등등하게 피어나고

따가운 햇살의 개흙마당 먼지만 폴폴 나고

툇마루 아래 개도 잠이 들고 뚝딱거리는 괘종시계만

천천히 천천히 돌아갈게야 텅 빈 집도 아늑하게

에헤 에헤야 가물어도 좋아라 에헤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내 고향집 장독대의 큰 항아리 거기 술에 담던 들국화

흙담에 매달린 햇마늘 몇 접 어느 자식을 주랴고

실한 놈들은 다 싸 보내고 무지랭이만 거우 남아도

쓰러지는 울타리 대롱대롱 매달린 저 수세미나 잘 익으면

에헤 에헤야 어머니 계신 곳 에헤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마루 끝 판장문 앞에 무궁화 지는 햇살에 더욱 소담하고

원추리 꽃밭에 실잠자리 저녁 바람에 날개 하늘거리고

텃밭에 꼬부라진 오이 가지 밭고랑 일어서는 어머니

지금 퀴퀴한 헛간에 호미 던지고 어머니는 손을 씻으실 게야

에헤 에헤야 수제비도 좋아라 에헤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내 고향집 마당에 쑥불 피우고 맷방석에 이웃들이 앉아

도시로 떠난 사람들 얘기하며 하늘의 별들을 볼 게야

처자들 새하얀 손톱마다 새빨간 봉숭아물을 들이고

새마을 모자로 모기 쫓으며 꼬박꼬박 졸기도 할 게야

에헤 에헤야 그 별빛도 그리워 에헤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어릴 적 학교길 보리밭엔 문둥이도 아직 있을는지

큰 길가 언덕 위 공동묘지엔 상여집도 그냥 있을는지

미군부대 철조망 그 안으로 융단 같은 골프장 잔디와

이 너머 산비탈 잡초들도 지금 가면 다시 볼 게야

에헤 에헤야 내 아버지는 그 땅 아래 에헤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 고향집 가세 / 정태춘

 

 

이 노래 가사를 쓴 때가 1980년대였다고 한다. 40년 전이다. 시인은 1954년생이니 나와 비슷한 연배다. 5, 60년대에 유소년기를 보냈을 테니 시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옛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이 애절하게 담겨 있다. 아마 40대 이하라면 시골에서 자랐더라도 이런 고향을 노래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일이 추석이고 몇 시간 뒤면 나도 어머니 계신 고향에 내려간다. 그러나 머릿속 고향과 현실의 고향은 다르다. 우리 세대에서는 그 괴리가 너무 커서 적응하기가 힘들다. 배신감 비슷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가족과 이웃도 마찬가지다. 화목, 순박, 따스함, 그리움 등은 오래전에 물 건너갔다. 명절은 이상과 현실이 맹렬하게 충돌하는 지점이다. TV에서는 여전히 화사하게 웃으며 선물꾸러미를 들고 귀향하는 사람들을 보여주지만 내 고향 가는 길은 체증에 걸린 듯 답답하다. 젊었던 부모는 이제 노인이 되어 당신 몸 거두기도 힘들어하신다. 고향은 더 이상 피곤해진 마음을 기대거나 위안을 주는 곳이 아니다. 머릿속에서만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는 일 / 나태주  (0) 2025.10.27
고향 / 신동엽  (0) 2025.10.14
그리운 몽매 / 유안진  (0) 2025.09.25
구름과 바람의 길 / 이성선  (0) 2025.09.14
그만 내려놓으시오 / 공광규  (0) 2025.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