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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단상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샌. 2025. 11. 13. 10:41

컴퓨터의 무선 키보드가 이상을 보인 건 여러 달이 되었다. 키를 누르면 바로 뜨지 않고 지체되거나, 한 번 눌렀는데도 같은 글자 수십 개가 동시에 찍히는 것이었다. 문장을 완성하기가 힘들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는 건 아니고 가끔씩 나타났고,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하며 불편을 감수하고 지내왔다.

 

일주일 전쯤 상태가 심각해졌다. 키 입력이 제멋대로 놀아서 아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전문가가 와서 고쳐주길 기대하고 서비스 센터에 연락했다. 상담사가 몇 가지를 묻더니 키보드의 물리적 문제인 것 같다며 가까운 서비스 센터에 가서 이상 유무를 확인받으라고 했다. 갈 때는 본체 뒷면에 꽂혀 있는 키보드 연결 usb를 빼서 같이 가져가라고 알려줬다.

 

무선 키보드와 본체를 연결하는 외부 usb가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런데 usb를 빼려고 하니 얼마나 꽉 끼워져 있는지 도저히 분리할 수 없었다. usb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좌우로 흔들고 당겼지만 꼼짝을 하지 않았다. 한참 용을 쓰다가 포기했다. 키보드만 들고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혹시나 해서 컴퓨터를 켜고 문자를 입력해 봤더니 웬일,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제대로 작동되는 것이었다. 너무나 깔끔하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결국 usb의 접촉에 관계된 아주 단순한 문제였다. 전자기기는 부품의 접촉 불량에서 상당한 트러블이 생기는 것 같다. 작동이 잘 안 될 때 전선이나 부품의 접촉 상태만 살펴보고 만져줘도 상당 부분 해결된다. 이런 현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고등학생일 때 자취하던 집에 작은 라디오가 있었다. 까만 비닐 케이스 뒤에는 라디오보다 더 큰 배터리가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 오락이 거의 없던 그 시절에 라디오는 유일한 심심풀이면서 위안거리였다. 재치문답이나 납량 특집 드라마 같은 걸 즐겨 들었던 기억이 난다. 스포츠도 라디오를 통해서 중계를 들으며 일희일비했다. 야구와 농구를 즐겨 들었고, 마라톤 중계를 하면 풀타임으로 귀를 갖다 댔다. 라디오에 대한 추억을 말할 때 많은 사람이 음악 프로를 떠올리는 데 나는 달랐다. 어릴 때부터 그쪽과는 담을 쌓았으니 정서적인 면에서 결핍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이 라디오를 오래 쓰다 보니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가끔 소리가 끊어지는 것이었다. 그럴 때는 손으로 툭 치면 다시 소리가 나왔다. 라디오 내부 문제인지 배터리와 연결 문제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때리면 됐다.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한 번은 아무리 때려도 반응이 없었다. 라디오에서는 마침 결정적 장면이 나오는 순간인데 소리가 끊어지니 화가 났다. 타격이 점점 심해지다가 결국은 방바닥에 내동댕이를 치는 사단이 벌어졌다. 그런데 웬걸, 그제야 다시 소리가 돌아왔다. 된통 맞으니까 말을 듣는 것이었다. 담임 선생님의 논리와 비슷한 라디오였다.

 

이번에 컴퓨터 키보드 에피소드를 경험하면서 그때의 라디오 생각이 났다. usb를 빼려는 시도가 없었다면 애먼 키보드를 바꾸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키보드 탓이었다고 엉뚱한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usb 접촉 불량이라는 사소한 문제였는데 말이다. 심각해 보이는 문제라도 해결책은 어쩌면 단순한 데 있는지 모른다. 너무 복잡하고 난해하게 여기기 때문에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게 아닐까. 전자기기만 아니라 우리네 인생살이에서도 비슷한 점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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