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 바. 라. 기.
한 장의 사진(36) 본문
기억에 남아 있는 첫사랑을 떠올려본다. 나는 1959년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경상도 농촌 지역은 유교문화가 엄격해서 남자와 여자가 분리되어 반이 편성되었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을 학교에서부터 실천한 것이다. 한 학년에 두 반이 있었는데 남자 반이 1반, 여자 반이 2반이었다. 이런 남녀 분리 정책은 한 해만 제외하고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으니 우리들은 국민학교 시절을 노상 한 교실에서 보낸 셈이었다.
예외가 4학년 때 있었다. 왠일인지 그해에만 남녀 합반을 편성했다. 아마 실험적으로 실시해 본 모양인데 여론이 좋지 않았는지 다음 해에는 원상복구가 되었다. 합반이라 해도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까리였다. 그러니까 교실 왼쪽에 남자 분단 오른쪽에 여자 분단이 있었고, 가운데 분단에는 앞에 여자가 뒤에 남자가 앉았다.
그때 나는 가운데 분단 분단장이었다. 분단장이 하는 일은 담임을 대신해 숙제를 검사하고 과제물을 모아서 제출하는 등의 담임 보조 일이었다. 이러면서 우리 분단에 있는 S라는 소녀를 알게 됐다. S는 예쁘고 공부를 잘했다. 숙제 검사를 하다 보면 금방 눈에 띄었다. 은근히 좋아하게 되었고 S 옆을 지날 때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쭈뼛거렸다. 선생님 설명을 들으면서 눈은 S의 뒷모습에 끌렸다. S도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짝사랑으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다른 아이들도 눈치채고는 놀리기도 했다.
합반이라지만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놀았지 서로간에 대화가 없었다. 아이들은 남녀간에 소통하는 방법을 몰랐다. 남자와 여자가 얘기를 하면 놀림감이 되었다. 남자아이들이 짓궂은 장난을 쳐서 여자아이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은 있어도 대화 상대는 아니었다. 나와 S도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다. 학교가 파하고 귀가할 때도 교문을 나서면 둘이 가는 방향이 달랐다. 그저 애틋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남녀가 사귄다는 것은 상상도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우리 동기 중 연인이 되었다거나 결혼한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기억에 남아 있는 한 장면이 있다. 수업이 끝나면 분단별로 교실 청소를 했다. 책걸상을 한켠으로 밀고 난 뒤 걸레로 교실 바닥을 닦는 조와 밖에서 걸레를 빨아 건네주는 조로 나뉘었다. 우리는 남녀가 섞여 있어 남자가 교실을 닦고 여자가 밖에서 걸레를 빨았다. 더러워진 걸레를 창틀에서 건네주면 여자아이가 받아 깨끗이 빨아 주었다. 나는 청소할 때마다 S가 내 걸레를 받아주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합법적으로 두 손이 가까워질 수 있는 때였기 때문이다. 잘하면 손끼리 접촉할 수도 있었다.
한 번은 S와 다른 여자아이가 같이 다가왔다. 그런데 마음은 응당 S를 향했지만 걸레는 다른 여자아이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묘한 일이었다.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어쩌다 S에게 전하기라도 하면 옆에서 아이들이 놀렸다. 얼굴 빨개진 것 보라고 손가락질하며 깔깔댔다. 흐뭇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이 장면을 AI에게 부탁했더니 아래와 같은 사진을 만들어줬다. 교사 벽면이나 창문은 당시와 똑같다. 시커먼 색깔로 칠해진 나무판자를 겹쳐서 만든 교실벽으로 군대 막사 같았던 학교였다. 요사이 초등학교의 동화 같은 건물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다만 여자 아이들의 옷과 신발은 그때와 다르다. AI는 상당히 곱게 만들어줬다.

다음해에는 남녀가 따로 반 편성이 되면서 S와 같은 교실에서 있을 기회가 사라졌다. S가 나한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도 못 한 채 우리는 졸업을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S와 나의 인연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 재회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대학생이 된 해였다. S가 서울의 같은 동네, 그것도 지척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걸어서 채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골목에서 우연히 만났는지, 아니면 그동안에도 둘 사이에 어떤 연락이 있었는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어쨌든 우리는 졸업하고 6년이 지나 청춘남녀가 되어 다시 만났다.
S는 참한 처녀가 되어 있었다. 여러 차례 데이트를 했을 것이다. 시외버스를 타고 구파발 딸기 농장으로 놀러 가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서 손을 잡아볼까 망설이기도 했을 것이다. S는 결혼한 오빠 집에 있으면서 회사에 다녔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야간대학을 다니고 싶다는 꿈을 말했다. 그러다가 S는 떠나갔다. 왜 그때 뒤로 물러서고 말았을까, 둘이서 계속 인연을 이어가는 평행우주가 다른 차원에서는 존재하고 있으리라.
옛날을 추억하노라면 때때로 S가 생각난다. 그녀는 내 첫사랑이면서 결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첫 여자이기도 했다. S는 결혼을 하고 신앙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전언을 들었다. 만나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뭔가 발목을 잡는 게 있었다. 그러면서 사람의 인연이란 걸 생각한다.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고, 떠나갈 사람은 떠나가게 된다지 않는가. 그러면 다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또한 백발이 되어 만난다면 어떤 기분일지, 즐거운 상상도 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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