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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본문

읽고본느낌

하얼빈

샌. 2025. 12. 20. 11:21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약소 민족을 짓밟고 세계를 전쟁터로 만드는 제국주의의 심장을 멎게 한 것이다. 동시에 대한국인의 기개를 떨친 의거였다. 김훈 작가가 쓴 소설 <하얼빈>은 1909년 그날의 전후 과정을 작가 특유의 문체로 보여준다.

 

소설을 읽으면서 김훈 작가의 간결하며 힘 있는 필체가 안중근을 서술하는데 최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잡다한 감정이 배제된 글이 서늘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작가의 필체가 안중근 정신과 통하는 것 같다. 차가운 금속성의 총의 질감과 날카로운 총성과도 어울린다. <칼의 노래> <남한산성>과 비슷한 느낌의 소설이다.

 

작가는 안중근을 영웅으로 만들려 미화하지 않고 그의 사상을 선전하지도 않는다. 검찰 심문 기록을 인용해서 짧은 안중근의 발언을 인용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작가의 필체는 안중근의 말과도 일치한다. 거사 하루 뒤에 하얼빈에 들어온 가족들의 심정을 애절하게 묘사할 법도 하건만 작가는 냉정하리만치 무심하게 바라본다. 김훈의 매력이다.

 

안중근 의사는 여순감옥으로 이송되고 석달 간 검찰 조사를 받고 기소되어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의사는 항소를 포기하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 1910년 3월 26일이었다.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암살하는 장면을 작가가 어떻게 서술했는지 옮긴다.

 

"안중근은 러시아 군인들 틈새로 조준선을 열었다. 이토의 주변에서 키 큰 러시아인들이 서성거려서 표적은 가려졌다. 러시아인과 일본인들 틈에 섞여서 이토는 이동하고 있었다. 이토는 가물거렸다.

안중근의 귀에는 더이상 주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시, 러시아인들 틈새로 이토가 보였다. 이토는 조준선 위에 올라와 있었다.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가 방아쇠를 직후방으로 당겼다. 손가락은 저절로 움직였다.

총의 반동을 손아귀로 제어하면서 다시 쏘고, 또 쏠 때, 안중근은 이토의 몸에 확실히 박히는 실탄의 추진력을 느꼈다. 가늠쇠 너머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이토의 모습이 꿈속처럼 보였다. 하얼빈역은 적막했다....

러시아 헌병이 안중근을 몸으로 덮쳤다. 안중근은 외쳤다.

- 코레아 후라

안중근은 쓰러지면서 총을 떨어뜨렸다. 탄창 안에 쏘지 못한 한 발이 남아 있었다.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의 몸을 무릎으로 눌렀다. 안중근은 하얼빈역 철도 가에서 묶였다."

 

책 후기에 보면 안중근 가족들의 뒷 행적이 나온다. 거사 후 부인과 세 자녀(현생, 분도, 준생)는 중국 흑룡강성으로 이주했는데 첫째 아들인 분도는 일곱 살에 죽었다. 부인은 끝내 귀국하지 못하고 1946년에 상해에서 죽었다. 그녀의 고통이나 슬픔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작가는 적고 있다. 딸인 현생과 차남인 준생은 1940년 전후로 귀국해 이토의 위패에 분향하고 사죄하는 못난 짓을 했고 일제는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김구는 광복 직후 안준생을 체포해 사형시켜 달라고 중국 정부에 요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둘은 1952년과 1959년에 죽었다.

 

<하얼빈>은 작년에 영화로 먼저 만났는데 영화보다는 소설이 더 감동이 짙다. 보이는 것보다는 상상하는 것이 훨씬 가슴을 울리는가 보다. 영화에서는 눈 덮인 광활한 시베리아 벌판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나라를 잃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했던 한 우뚝했던 거인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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