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향기

고추꽃

샌. 2010. 8. 18. 18:46


한여름 뙤약볕 아래 고추밭에서 일하다 보면 하얀 고추꽃이 얄밉기도 했다. 왜 그렇게 고추는 쉼없이 달리는지, 꽃이 없으면 고추 따는 일도 수월해지지 않을까 하는 어린 마음이었다.고향의 어머니는 요사이 고추 따는 일로 바쁘실 때다. 따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집으로 실어나를 일이 걱정이라셨는데 내려가 도와드리지도 못하고 있다. 지금쯤 고향집 방과 마당에는 붉은 고추가 가득할 것이다.

 

여름에 피는 고추꽃은더위를 먹은 듯 맥없이늘 고개를 숙이고 있다. 속살을 보자면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추어야 한다. 그 모습이 산에서 피는 애기나리를 닮았다. 어머니는 밭 작물 중에서 고추를 가장 많이 심으시고 제일 정성을 들이신다. 어머니는 오늘도 고추꽃 그림자 아래서 맹물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시고붉은 고추를 핥고 계실 것이다. 아래 시에 나오는 산태할매처럼....

 

장마 걷어낸 햇살 아래

고추밭은 붉은 고추밭이다.

산태할매 이쪽저쪽 가르마를 젖히며

달팽이처럼 기어 붉은 고추만 다 핥는다.

탄저병에 말라죽은 고추나무 꼭대기에 빨간 자마리

커다란 눈 휙- 휙- 돌리며

흔빛 날개 톱날처럼 마른 잎 베고

앉았다. 뛰었다.

앉을까. 말까. 발만 비벼댄다

맥없는 고추밭을 뱅 뱅 돈다.

또 비님이 오실라나?

훅-신한 밭고랑 고추나무 그늘은

노파를 따라다니며 등허리를 감싼다.

그 그늘에 기대어 신음처럼 토해내는 한숨

맹물 한 모금에 목을 적시고

진통제 몇 알 털어 넣고

그저 익숙한 손놀림은 사람나이 넘어선 귀신이다.

산태할매는 팔십 평생의 순수 결정체를

무심히 뚝. 뚝. 따낸다.

 

- 고추꽃 그림자 / 임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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