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643

우리는 낙오자가 아닌 거부자입니다

수능을 앞두고 대학 입시를 거부하는 30인 선언이 다시 있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곳저곳에서 자본주의와 학벌중심 체제에대한 균열이 생기고 있다. 비록 처음 세력은 미약할지라도 그런 움직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조만간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붕괴되는 조짐이 나타날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거대 패러다임이 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동참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변화를 재촉하는 물결은 노도가 되어 흐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행복이 유예된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 오늘이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꿈꾸고 행동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그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우리는 낙오자가 ..

참살이의꿈 2011.11.04

소용없다

박목월 시인의 부인은 생전에 자식들이 속상하게 할 때마다 부채에 써놓은 글귀를 보며 마음을 달랬다고 전해진다. 부채에는 '소용없다'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부인은 자식들이 말썽을 부릴 때면 부채를 펴서 자식들에게 보이고 스스로에게도 자경(自警)의 의미로 삼았던 것이다. 그분의 아들인 박동규 선생의 회고로는 어머니가 부채를 펴 보이면 조심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천륜을 어찌할까? 그러나 무엇이건 지나치면 병이 된다. 특히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집착으로 변질되기 쉽다. 아이가 다 컸는데도 불구하고 정신적 탯줄을 끊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아내는 딸을 시집보내고 나서부터 잠을 이루지 못한다. 병원 약이 아니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자식이 ..

참살이의꿈 2011.11.03

할아버지는 무엇을 했나요

아침 3시 23분 나의 귀한 손자 손녀들이 나를 자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 잠에서 깬다. 나의 귀한 손자 손녀들이 꿈속에서 내게 질문을 한다. 지구가 약탈당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무엇을 했나요? 지구가 위태로울 때 할아버지는 무엇을 했나요? 계절이 바뀌지 못할 때 포유동물, 파충류, 새들이 모두 죽어갈 때 할아버지는 정말 무엇을 했나요? 민주주의가 짓밟힐 때 할아버지는 거리에서 저항했나요? 이전에 알고 있었을 때 할아버지는 무엇을 했나요? 이라는 책을 보다가 이 시를 만나 뜨끔했다. 생각과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실천하지는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강이 죽어가고, 정의가 짓밟히고, 지구가 약탈당할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먼 훗날 내 사랑스런 손자 손녀들이 “그때 할아버지는 무엇을..

참살이의꿈 2011.10.13

풍랑이 없으면 풍어도 없다

그날, 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으며 이런 말을 들었다. 바다에서 평생을 보낸 늙은 어부가 전해준 말이었다. “풍랑이 없으면 풍어도 없습니다.”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풍랑 없기를 바랄 수는 없다.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고비가 길지 않은 인생에서도 여러 차례 있다. 그러나 풍랑이 어부를 단련시키고 먼 바다로 나갈 용기를 준다. 먼 바다로 나갈 용기가 없다면 만선의 기쁨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이유 없이 찾아오는 고난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되도록 풍파 없이 무난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고난이 주는 선물이 반드시 있다. 풍랑을 뚫고 나아갈 때 풍어의 선물이 주어진다. 인간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성장한다. 인간은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다. 모든 것이 ..

참살이의꿈 2011.10.05

고독의 능력

친구와 등산을 하고 내려와 작은 마을을 지날 때였다. 어느 허름한 집 앞에서 노인이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자세로 보아 아마 하루 종일 그렇게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앞을 지나가도 별 반응이 없었다. 친구가 말했다. “늙어서 저렇게 될까봐 두려워.” 그러나 노인에게는 노인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없을까. 쇠약하고, 일을 못하고, 외롭다는 게 저주일까.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꽃에 찾아드는 나비를 보면서 하루를 보내는 게 꼭 쓸쓸하기만 한 걸까. 저 노인은 혼자만의 여유와 고독을 즐기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과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바쁘고, 젊고, 새로운 것을 찬양한다. 또 그런 관점에서 인간이나 사물을 바라보고 판단한다. 게으르고 낡은 것은 부덕이다. 외로움과 고독도..

참살이의꿈 2011.09.18

우리의 일상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활동할 때마다 그리고 거래할 때마다 기록되고, 등록되고, 과세되고, 날인되고, 측정되고, 숫자가 매겨지고, 평가되고, 허가되고, 인가되고, 경고를 받고, 금지되고, 선도되고, 교정되고, 처벌받는 것이다. 그것은 공익이라는 구실 아래 그리고 일반의 이익이라는 이름 아래 기부금 납부를 강요받고, 훈련을 받고, 배상금을 물고, 착취당하고, 독점의 희생자가 되고, 탈취당하고, 쥐어짬을 당하고, 현혹되고, 강탈당하는 것이다. 사소한 저항을 하기만 해도, 불만의 '불'자만 꺼내도 억압당하고, 벌금이 부과되고, 멸시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고, 추적되고, 학대를 받고, 구타를 당하고, 무장해제되고, 질식당하고, 투옥되고,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하고, 추방되고, 희생되고, 팔려가고..

참살이의꿈 2011.09.08

자신의 현실을 껴안는 것이 행복이다

마음은 아직 허공에 떠있다. 허전하고, 고맙고, 부끄럽다. 큰일을 치른 후유증인지 쓸쓸하고 우울한 기분이 오래 이어진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인가 보다. 세상살이가 어찌 내 입맛대로 될 것인가. 체념도 인생을 사는 지혜 중 하나다. 행사를 치르며 이런저런 인생 공부를 많이 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자. 신달자 시인의 행복에 대한 정의가 오늘은 마음에 와 닿는다. “자신의 현실을 껴안는 것이 행복이다.”

참살이의꿈 2011.09.05

잠들지 못하는 나라

언젠가 친구 집 문상을 마치고 밤 두 시경에 서울 시내를 지난 일이 있었다. 이 시간쯤이면 거리가 한가해 쉽게 집에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사당동에서 이수 사거리를 지나는데 차들이 밀려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거리는 온통 불야성이었고 한밤중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여느 초저녁 풍경과 다름없었다. 우리나라 도시는 밤이 없다. 어쩌다 모임이 늦게 끝나 밤거리에 나서면 낮보다 더 복잡하고 북적인다. 이 사람들은 언제 잠을 자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밤 12시 이전에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한밤중도 낮의 연장일 뿐이다. 그러니 출근 시간의 지하철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졸고 있다. 잠이 부족하지만 다음날도 일찍 잠들지 못한다. 아이들이..

참살이의꿈 2011.08.28

답다는 것에 대하여

제나라 임금이 정치에 대해서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 공자가 말한 본뜻이 무엇이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다. 단순히 자기 위치와 신분에 맞게 처신을 잘 하라는 것 이상의 의미가 들어있다고 믿고 싶다. ‘~다워야 한다’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교직에 있었을 때 학생들에게 잘 썼던 말이기도 하다. 학생이면 학생답게 행동하라고 훈계할 때마다 써먹었다. 그런데 학생이 학생다워야 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선생 말 잘 듣고 교칙 잘 지키고 공부 외에 다른 데는 관심을 가지지 말고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이 되라는 뜻은 아닐까. 내가 썼던 학생다워야 한다는 말에는 분명 그런 뜻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니 속..

참살이의꿈 2011.08.22

세월의 강물이야 어떻게 흐르든

세월이 너무 빠르다. 퇴직 전에는 하루 보내기가 지겨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서 빨리 저녁이 왔으면 싶었다. 그만큼 낮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하루는 느릿느릿한데 일 년은 금방 지나간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도 순식간이다. 아침을 먹으면 점심이고, 점심을 먹으면 어느새 저녁이고 밤이다. 일 없으면 지루하지 않느냐고 사람들이 자주 묻는데 나는 반문한다. 지루해져나 봤으면 좋겠다고. 구멍 뚫린 풍선에서 바람 빠져 나가듯 시간이 도망가니 여생의 무게가 깃털보다도 가볍게 느껴진다. 힘이 빠지니 스쳐가는 시간 쫓아가기도 벅차구나. 여윈 마음에 숨결만 가쁘게 허덕거린다. 그러나 샌, 빠른 세월에 쫓겨 너마저 조급할 필요는 없는 거지. 발동이 걸린 세월이야 가고 싶은 대로 가라고 해. 너는 흐르는 ..

참살이의꿈 2011.08.08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유시민 씨의 '항소이유서'를 다시 읽어본다. 에서 만난 김진숙 씨의 '항소이유서'가 준 감동 때문이다. 하나는 1985년에 쓰였고, 하나는 1995년에 쓰였다. 하나는 복학대학생이었고, 하나는 해직노동자였다. 한 글은 논리적이고, 한 글은 감성적이다. 한 사람은 정치판에 들어갔고, 한 사람은 지금도 노동운동가로 현장에서 뛰고 있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인간의 열정이 두 글 모두에 뜨겁게 살아있다. 이 항소이유서는 1984년의 '서울대 학원 프락치 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살면서 감옥에서 쓴 것이다. 벌써 26년 전 일이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살이었다. 정치인으로서의 유시민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이 항소이유서를 통해 영민했던 한 젊은이를 만날 수 있다. 김진숙 씨의 항소이유서도 그렇지만 이런..

참살이의꿈 2011.08.02

어느 바보의 삶

윤구병 선생이 감동을 받은 이야기라며 소개한 걸 보았다. 실화라고 한다. 충청북도 어느 시골에 농부 한 분이 살았는데, 아주 성실하고 총명하였다. 이분은 1920년대에 야학에서 한글을 깨우쳤다. 해방이 되기까지 스무 해 남짓 걸핏하면 주재소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한 행적으로 보면, 한글과 함께 민족의식도 깨우쳤던 모양이다. 어떤 때는 하도 많이 맞아서 지게에 실려 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똥물을 마시면서 몸을 추슬렀는데, 동네 사람들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 닮아서 법 없이도 살 이분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몰랐다. 다만 어쩌다 철없는 동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운 왜놈 말을 쓰는 걸 보면 몹시 야단을 친다든지, 대동아전쟁 말기 왜놈들이 쇠붙이란 쇠붙이는, 하다못해 부러진 숟가락 몽당이까지 빼앗아 갈 ..

참살이의꿈 2011.07.21

중용의 노래

세상일은 중용이 최고라고 믿고 살았네. 그러나 이상하군, 이 ‘중용’은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네. 중용의 기쁨보다 더 한 것이 없네. 재미있다, 모든 것이 절반. 당황치 않고, 서두르지 않으니, 마음도 편하다. 천지는 넓은 것 도시와 시골 사이에 살며 산과 강 사이에 농토를 갖네. 알맞게 지식을 얻고 알맞은 지주가 되어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노네. 아랫것들에게도 적당히 대한다네. 집은 좋지도 않지만, 너무 누추하지도 않고 가꾼 것도 절반, 가꾸지 않은 것도 절반 입은 옷은 헌 옷도 아니고, 새 옷도 아니네. 먹는 것도 적당하네. 하인은 바보와 똑똑이의 중간, 아내의 머리도 알맞은 중간이고 그러고 보니 나는 반은 부처이고 반은 노자일세. 이 몸의 절반은 하늘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자식들에게 남기네. 자식의..

참살이의꿈 2011.07.15

우산의 나무

‘맹자가 말하기를, 우산(牛山)의 나무가 전에는 아름다웠다. 그런데 대국(大國)의 성 밖에 있어서 도끼에 찍혀 고이 자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밤낮이 양육시키고, 비와 이슬이 적셔 주어 그루터기에 싹이 돋아났지만, 소와 양을 놓아먹이니 저렇게 벌거숭이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그 벌거숭이산을 보고 우산에는 큰 나무가 있던 적이 없는 줄로 알지만, 그게 어찌 산의 본성이랴. 사람으로 태어난 자, 어찌 본디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었으랴. 그 양심을 잃음이 또한 도끼로 나무를 찍음과 같은 것이다. 날마다 이를 찍어내면 양심이 밤낮으로 되살아나고, 새벽 공기에 소생하나, 인의를 좋아하고 불의를 미워함이 남과 같지 못함은 낮에 하는 행위가 또 이것을 어지럽혀 잃게 하기 때문이다. 이 양심 해치기를 되풀이하면 ..

참살이의꿈 2011.07.07

은행과 병원

가고 싶지 않은 곳이 은행과 병원이다. 은행 출입 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어쩌다 들르게 되면 낯선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다. 기계 앞에서 버튼을 누르든, 대기 번호표를 뽑은 뒤 불려나가든 마찬가지다. 은행은 거대한 컴퓨터 같다. 창구 직원도 컴퓨터 단말기의 한 키로 보인다. 컴퓨터가 계산해주는 숫자에 의해 내 생활이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다. 무언가에 의해 내 삶이 조종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은행에 있으면 그냥 초라해진다.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가능하면 은행을 들락거리지 않으려 한다. 현대식 병원도 그렇다. 퇴직을 한 뒤 어쩔 수 없이 D 병원에서 장 내시경 검사를 받게 되었다. 최신 시설을 갖춘 전문병원이었는데 접수에서부터 검사까지 겉으로는 친절하고 완벽했다. 그러나 너무 쓸쓸하고 공..

참살이의꿈 2011.06.27

화백이라 불러다오

교직을 퇴직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선생’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아마 어느 누구에게나 써도 무난한 호칭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선생이라는 호칭이 별로 달갑지 않다. 40년 가까이 들어왔으니 신물이 나기도 했지만 선생이라는 말에서 잊고 싶은 현장의 기억들이 되살아나 괴롭기 때문이다. 정말로 과거로 돌아가기는 싫다. 그래서 몇몇 친구들에게는 선생 대신 ‘화백’이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화백은 ‘화려한 백수’의 준말이다. 그랬더니 짓궂은 B는 화백이 당치않다며 ‘초백’이라 불러야 옳다고 대꾸했다. 초라한 백수라는 뜻이다. 별로 하는 일 없이 집에 있으니 그가 보기에는 화백이 아니라 초백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B는 ‘아무 하는 일이 없는 화려함’이 있는 줄은 모르는 것 같다. 세상에서 ..

참살이의꿈 2011.06.22

자유와 불안

얼마 전에 어느 보험회사에서 17개국을 대상으로 은퇴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다. 그 항목 중에 은퇴라고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다른 대부분의 나라들은 자유라는 답이 가장 많았는데 우리나라는 반 이상이 불안이라고 대답해 대조를 이루었다. 선진국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나 중국 같은 나라들도 은퇴라고 하면 자유와 행복, 만족이 우선 연상되었다. 비단 우리나라만 은퇴를 불안과 두려움, 외로움과 지루함 등의 부정적인 개념들과 연결시키고 있었다. 은퇴를 불안과 연관시키는 건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보다 소득 수준이 훨씬 낮은 나라에서도 은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걸 보면 꼭 경제적인 문제만도 아닌 것 같다. 사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퇴..

참살이의꿈 2011.06.13

과잉과 결핍

과잉과 결핍은 동의어다. 과잉 속에 결핍이 들어 있고, 결핍 속에 과잉이 들어 있다. 지금과 같은 욕망 과잉의 시대에 사람들 가슴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다. 많은 것을 갖고 있어도 공허하고 불안하다. 결핍은 결코 과잉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결핍의 치료제는 결핍이다. 과욕(過慾)이 아니라 과욕(寡慾)이다. 작아져야 커지는 것은 역설의 진리다. 밖으로 목표를 줄이고 안으로 욕망의 바람을 잠재우자. 허실생백(虛室生白), 마음이 비고 고요해야 행복이 찾아온다. 욕망과 목표를 낮추자. 어느 정도의 선에서 멈출 줄 알고 자족(自足)을 배우자. 더 많은 것을 욕심내며 초조해 하는 한 평화는 없다. 과잉과 결핍 사이의 조화,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거기에 중도(中道)의 묘(妙)가 있다.

참살이의꿈 2011.05.31

어렸을 적에는,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라는 질문이 제일 곤혹스러웠다. 되고 싶은 게 없었으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사람들이 판검사를 좋아하는 걸 알고는 판사나 검사라고 답할 때도 있었지만 외교적 수사였을 뿐이다. 아버지는 이런 내 성격을 아셨는지 교사가 되기를 희망하셨다. 초등학교 때 통지표에 나오는 부모 희망란에는 항상 교사라고 적혀 있었다. 교수가 아니고 교사라는 것에 서운하기도 했지만 덩달아 내 희망도 교사가 되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교사가 인기가 없었다. 교사가 되길 바라는 건 창피한 일이었고 그건 청소년기에 가져야 할 야망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별다른 꿈이 없었던 건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청소년기에 가졌던 꿈에 대해서 자신 있게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지금도 부럽다. 나는 그런 ..

참살이의꿈 2011.05.22

633의 법칙

은퇴 이후의 삶에 관심이 많은 친구가 있다. 나에게 ‘은퇴생활백서’라는 책을 선물해준 친구다. 자신의 말로는 이미 10년 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친구가 자신의 은퇴 이후의 계획을 말하며 ‘633의 법칙’을 말해 주었다. 퇴직 이후의 즐거운 생활을 위해 만든 기준이라고 한다. ‘633의 법칙’이란 일 년 중에 집에서 6개월, 시골에서 3개월, 외국에서 3개월을 보내며 살겠다는 계획을 말한다. 집은 친구들과 만나고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도시에 둔다. 집에서는 일년에 6개월 정도만 지낸다. 3개월은 고향이나 시골에서, 또는 국내여행을 하며 보낸다. 나머지 3개월은 외국에서 지낸다. 친구는 외국에서 거주할 숙소를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는 듯하다. 일에서 떠나 인생을 즐기며 살고픈 친구의..

참살이의꿈 2011.04.29

도시 유목민

올해가 결혼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돌아보니 그동안 참 많이도 이사를 다녔다. 면목동의 단독주택에서 시작하여 며칠 전 광주로 이사한 것까지 포함하면 30년 동안에 열두 번이나 옮겨 다녔다[면목동-잠실동-가락동-장안동1-장안동2-문정동-성남-문정동-암사동-여주-구의동-사당동-광주]. 30년 동안 평균 2.5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닌 셈이다. 도시 유목민이라고 할 만하다. 열두 번의 이사 중에서도 이번이 제일 힘들었다. 전에는 이사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직장에 나가면 되었으나 이젠 내 할 일이 많아졌다. 나이 탓도 있어 몸살까지 났다. 집안 일이 만만치 않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피곤해지니 짜증이 생기고 아내와는 티격태격도 자주 했다. 전세살이도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며 다양하게 살아보는 맛이 있다며 ..

참살이의꿈 2011.04.19

우린 할 말이 없습니다

영재들만 모인다는 카이스트에서 최근 네 명의 학생들이 잇달아 자살했다. 모두가 과도한 경쟁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서남표 총장이 부임해서 학교를 개혁하며 '징벌적 등록금제'를 도입할 정도로 공부에 경쟁을 시킨 뒤에 나타난 부작용이다. 그런데도 총장은 학생들의 나약한 정신 상태를 나무라고 있다. 얼마나 더 죽어나가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지 모르겠다. 세상 어디서건 어느 정도의 경쟁은 필요하다.그러나 자살률 세계 1위의 한국은 이미위험 사회의 경보가 켜져 있다. 친구의 웃음 뒤에는 불안감이 스며 있고,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중압감이 모두를 내리누른다.어른들도 해고의 두려움, 어떻게 먹고사느냐는 절박한 문제, 부에 대한 욕심 또한끝이 없다.부모의 이기적 심리는 자식들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가정도..

참살이의꿈 2011.04.16

뭘 하고 지내나요

은퇴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이것이었다. “퇴직하면 무슨 일을 할 계획인가요?”은퇴 후에도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이 대동소이하다. “뭘 하고 지내나요?” 아무 일 하지 않으려고 일찍 퇴직을 했는데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대략 난감이다. 사람들은 일 없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에 대해 못 미더워한다. 그래, 지금은 큰 소리 치지만 좀더 지내봐라, 남는 시간 못 견딜 걸, 대체로 그런 눈치다. 가끔은 산에 다니고 꽃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그건 일이 아니라 취미라고 한다. 매일 그렇게 보낼 수는 없으니 뭔가 규칙적으로 하는 일이 있어야 된다고 말한다. 일을 통해 먹고살아야 하는 경우라면 어쩔 수 없이 또 일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충분히 여유가 되는 사람도 관성에 의해 일에 매달리는 경우를 본다. 사람들..

참살이의꿈 2011.04.03

직업 선택 십계명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원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춰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 다투어 모여드는 곳에는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거창고등학교에 걸려 있다는 '직업 선택 십계명'이다. 이런 가르침을 펼 수 있는 학교가 대한민국에 존재한다는 게 신기하고 놀랍다. 세상에서 가르..

참살이의꿈 2011.03.22

쌍용의 비극

1년 넘게 혼자 집안에서 숨어 지내는 남자가 있다. 가족이 찾아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굳게 닫힌 창문에는 감시 카메라까지 설치해 놓았다. 급기야 119에 신고해서 집안에 들어가 보니 생수, 라면이 몇 무더기나 쌓여 있다. 베란다에는 망원경도 있다. 농성장의 모습 그대로다. 이 남자는 2009년 쌍용 사태 때 농성 투쟁을 하다가 해고된 사람이다. 혼자서 아파트에 숨어 나름의 싸움을 하고 있다. 옛 동료들과도 만나려 하지 않는다. 정신적 외상이 심각한 경우다. 지난 달 26일에는 역시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임모씨가 평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아내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자살한지 10개월 만이다. 고3 아들과 중3 딸, 두 아이만 남았다. 지난 1일에는 조모씨도 취업난과 생활고를 못 이겨 자살했다. 쌍..

참살이의꿈 2011.03.10

만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던 때 이야기다. 그들이 시나이 산 가까이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 불평한다.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다. “우리를 굶겨 죽이려고 이 광야로 끌고 왔소?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빵을 배불리 먹던 때가 더 좋았소.” 모세는 곧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자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었고, 아침에는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렸다. 이것이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주신 양식인 ‘만나’다. 그 맛이 꿀 섞은 과자 같았다고 한다. 성경은 계속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 주님께서 내리신..

참살이의꿈 2011.03.03

[펌] 이런 마을을 꿈꾼다

이런 마을을 꿈꾼다. 뒷산은 그렇게 높진 않지만 위엄이 있고, 개울이 흘러 저 멀리 강이 보이는, 서남향이라 햇볕이 오래 오래 머무는, 감나무에는 홍시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온갖 새의 먹잇감이 되어주는 그런 마을. 사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여울목에는 구름 한 자락 떠 있는, 동네 가운데쯤 디딜방아가 다소곳한, 키 큰 시누대가 휘파람을 부는 그런 동네를 그려본다. 처마 낮은 집집마다, 그 주인 닮은 개들이 꼬리만 흔들 뿐, 짖지 않는 동네, 견성한 개들이 탁발 나온 스님들과 막걸리 잔을 돌리는 주막이 있는 동구 밖, 두 사람 이상만 모여도 서로의 눈망울 속에서 산새 소리, 바람 소리, 개울물 소리를 읽을 수 있는 동네. 따스한 햇볕을 닮아, 뜨내기가 마당에 어슬렁대도 누구 하나 큰소리치지 않는 수더분한..

참살이의꿈 2011.02.16

소유와 자유의 황금분할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으려 한다. 돈이 많으면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갖고 싶은 것도 무엇이든 살 수 있으며, 가고 싶은 곳도 얼마든지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황홀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벌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것이 자유의 전부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토록 원하던 돈을 조금이라도 만지기 시작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는 얻는 듯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는 박탈당하기 시작한다. 점점 가족들과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사적인 휴식도 줄어만 간다. 아무것도 안하고 멍하니 있을 자유는 손톱만큼도 얻을 수 없게 된다. 무한한 자유를 얻으려고 했지만 사실 일할 자유 외에는 다른 어떤..

참살이의꿈 2011.02.09

걷기의 의미

발을 다쳤다. 추운 날 시멘트길을 다섯 시간 가까이 걸었는데다리에 무리가 된 모양이다. 오른발을 디디면 통증이 온다. 열흘 가까이 긴 외출은 삼가고 있다. 마음대로 걷질 못해 답답하긴 하지만 하릴없이 집에서 쉬는 것도 괜찮다. 마침 지난주 경향신문에 박홍규 선생의 칼럼이 실렸다. 자신만 보고 주변을 돌아볼 줄 모르는 내 근시안적 걷기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었다. 이제 길도 상품이 되었다. 올레길, 둘레길 같은 상품명도 있고, 고객을 끌려는 광고도 한다. 사람들은 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멀리 걸으러 간다. 이름난 길은 도시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로 몸살을 앓는다. 서점에 가면 걷기에 관한 안내서적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전국이 걷기 열풍이다. 강을 살린다고 강을 파헤치고, 도로를 만든다고 산을 깎아낸..

참살이의꿈 2011.02.01

무위

얼마 전에 TV에서 노년 생활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거기서 한 강사가 노년에 제일 경계할 것으로 무위(無爲)를 들었다. 아마 이분은 무위를 할 일이 없는 상태로 해석한 것 같다. 보통 사람이라면 노인이 되었을 때 일 없이 빈둥거리게 되는 걸 제일 두려워한다. 그것이 무위라면 강사의 말도 맞다. 하긴 무위도식(無爲徒食)이라는 부정적 말도 있으니무위를 좋게 보긴 어렵다. 그런데 무위(無爲)란 원래 노장철학의 중심 개념이다. 특히 노자의 사상을 대표하는 말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여기서 무위는 유위(有爲)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인위적이지 않은 행위를 말한다. 무위란 무심하게 함, 무욕으로 함, 또는 이기적 욕망에 근거하지 않는 행위다. 그러므로 무위는 가장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범주..

참살이의꿈 2011.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