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 바. 라. 기.
한 장의 사진(38) 본문
인생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그 짧고도 긴 길에는 수많은 고비와 우여곡절이 있다. 한숨과 탄식, 절망이 곳곳에 배어 있다. 그렇다고 눈물만 있겠는가. 기쁨과 보람이 발걸음을 가볍게 하기도 한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행복도(幸福度)를 그래프로 그려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족도(滿足度)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일흔을 넘겼으니 전체 일생을 돌아보는 일도 괜찮을 것 같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순탄한 인생이었을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누구나 제 손톱 밑의 가시가 제일 아픈 법이니까. 대충 그려 본 내 삶의 만족도 그래프다.

대체로 10년 주기로 부침이 생기고 있다는 걸 알겠다. 과거에 명리학을 잠깐 공부했을 때 '10년 주기설'을 접했던 것 같다. 퇴직 후를 제외하고는 그 리듬에 거의 맞는다. 내 인생의 다섯 개의 봉우리와 다섯 개의 골짜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봉우리에 올랐을 때는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된 듯한 기분이었으리라. 기쁨도 슬픔도 영속하지 않는다. 화려했던 시간은 덧없이 지나갔다.

이 사진은 1988년 J여중에 있을 때 동료 교사들과 찍은 것이다. 그해에 전출하는 교사들이 마지막으로 교장실에 모여 차를 나누고 헤어지기 전에 기념으로 남겼다. 40년 전이지만 하나하나의 얼굴에서 그때의 추억이 희미하게 새롭다. 몇을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저 때가 내 나이 30대 후반이었으니 인생 그래프에서는 세번째 봉우리에 들어서고 있을 때였다. 모든 여건이 상승기에 진입하고 있었다. 30대 가장이 되면 내 집 마련이 제일 큰 과제다. 운 좋게도 서울에서 번듯한 아파트가 당첨되고 입주를 앞두고 있었다. 쭉 10평대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30평대를 장만한 것이다. 내 집에 들어선 날, 거실이 운동장보다도 더 넓어 보였다.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자식들도 유치원에 다녀 한창 귀여울 때였다. 아이를 키우는 재미가 제일 좋을 때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 아닌가 싶다. 외벌이 교사 월급으로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없었으나 가정은 단란하고 행복했다. 몇 해 전의 디스크 수술 후유증에서도 벗어나 몸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디스크 수술이 간단하지만 그때는 한 달 가까이 입원해야 했을 정도로 힘들었다. 돌이켜 보면 수술이 전화위복이 된 측면도 있었다.
직장 생활도 제일 여유있을 때였다. 주임을 맡았던 터라 수업 시간이 주당 16시간이었다. 담임도 없었다. 하루 두세 시간만 교실에 들어가면 온전히 내 남는 시간이었다. 뒤에 실업 학교에 있을 때는 아이들이 실습을 나가 2학기는 통째로 수업이 날아갔다. 요새 말로 하면 '꿀직장'이었던 셈이다. 쥐꼬리 월급이었지만 그마저 받는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가 내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었나 싶다.
J여중에 있을 때 낯 뜨거웠던 일도 기억난다. 그때는 자연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무지했다. 꽃도 노란 꽃, 빨간 꽃, 흰 꽃 정도로만 구별했다. 어느 이른 봄, 교사 앞 화단에 핀 노란 꽃을 보고 옆에 있던 동료가 감탄하며 말했다.
"벌써 민들레가 꽃을 피웠네."
가만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할 것을, 가벼운 입이 나불댔다.
"저 노란 꽃이 민들레야?"
"아니, 뭐라고? 민들레를 모른다고? 생물을 가르치면서 민들레를 모르는 게 말이 돼?"
그해는 생물 교사 T/O가 부족해서 내가 생물 수업 시간을 지원하고 있었다. 장님이 길을 인도하는 격이었다. 겉으로는 잘난 척 뻐겼으나 너무나 미숙했던 시절이었다.
연말이 되어선지 앨범을 들쳐보는 일이 잦다.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헤어진 흔적이 옛 사진에 남아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수년간 같은 직장에서 애환을 함께 한 인연의 깊이는 얼마나 깊고 진하겠는가. 되돌아보는 옛사람들 얼굴이 예쁘게 핀 꽃처럼 보인다. 한 해가 저물듯 각자의 인생도 결실을 맺으며 익어가고 있으리라. 인생 3막의 풍경이 저녁 하늘에 펼쳐지는 노을처럼 곱고 아름답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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