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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읽는기쁨

어떤 관료 / 김남주

샌. 2025. 12. 25. 11:06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 어떤 관료 / 김남주

 

 

이 시를 읽으면 어떤 사람이 떠오른다. 윤석열 정권에서 마지막 국무총리를 했던 분이다. 그는 1970년에 경제 관료로 시작하여 여러 정권을 거치며 수 차례 장관을 역임하고, 주미대사와 두 번의 국무총리 등을 지내면서 관료 경력의 최고봉을 찍었다. 그만큼 능력이 있었겠지만 소신이나 이념 없는 처신으로 '기름장어'라는 별명도 얻었다. 격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잘 빠져나가며 용케 살아남았다는 의미였다. 좋게 해석하면 누구와도 융화하는 호인이지만, 다르게는 이리저리 비위를 맞추며 꽃길만 걸으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좌우명에도 분명 '근면, 정직, 성실, 공정'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는 지난달에 '내란 중요임무 종사'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을 구형받았다.

 

애빌린 패러독스(Abilene Paradox)가 있다. 미국의 경영학자인 하비가 소개한 자신의 경험담이다. 어느 날 하비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장인이 "애빌린에 가서 저녁을 먹을까?"라고 제안했다. 애빌린은 80km나 떨어진 곳이고 마땅한 음식점도 없어 망설였지만 다들 동감을 표시해서 하비도 동의했다. 더운 여름에 고물차를 타고 다녀오는 길은 힘들었고, 음식맛도 별로였다. 지쳐서 돌아오고 나서야 다들 불평했다. 장모는 "집에 있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라고 투덜거렸다. 아내는 "미친 짓이었다"며 화를 냈고, 하비도 "다른 사람들이 원해서"라며 변명했다. 장인이 입을 열었다. "나는 너희들이 지루해하는 것 같아 그냥 꺼내본 말이었는데..." 결국 아무도 원하지 않았는데 모두 애빌린에 다녀온 셈이다.

 

'좋은 게 좋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집단의 경향에 반대로 행동하는 것을 싫어한다. 바르지 못한 걸 알면서도 갈등을 피하고 싶어 반대하지 못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은 나서지 말라는 암묵적인 지시다. 그러나 공동체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No!"가 필요하다. 작년 겨울 상황에서도 누군가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다면 동조하는 사람이 있었을 테고 국가적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학교 교훈에 가장 많이 들어 있는 '근면'이나 '성실'이 덕목은 아니다. 무엇을 위한 근면이고 성실인지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에 이재명 대통령이 각 부처 업무보고를 받는 현장이 여러 날 동안 생중계되었는데 대통령이 고위 관료들과 주고받는 대화가 신선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마찰이 있더라도 'NO!"라고 말할 수 있는 관료가 많아지면 좋겠다. 누구처럼 막무가내가 되면 곤란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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