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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읽는기쁨

향아 / 신동엽

샌. 2025. 12. 30. 07:36

향아 너의 고운 얼굴 조석으로 우물가에 비최이던 오래지 않은 옛날로 가자

 

수수럭거리는 수수밭 사이 걸쭉스런 웃음들 들려 나오며 호미와 바구니를 든 환한 얼굴 그림처럼 나타나던 석양....

 

구슬처럼 흘러가는 냇물 가 맨발을 담그고 늘어앉아 빨래들을 두드리던 전설 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눈동자를 보아라 향아 회올리는 무지갯빛 허울의 눈부심에 넋 빼앗기지 말고 철 따라 푸짐히 두레를 먹던 정자나무 마을로 돌아가자 미끄덩한 기생충의 생리와 허식에 인이 배기기 전으로 눈빛 아침처럼 빛나던 우리들의 고향 병들지 않은 젊음으로 찾아가자꾸나

 

향아 허물어질까 두렵노라 얼굴 생김새 맞지 않는 발돋음의 흉낼랑 고만 내자 들국화처럼 소박한 목숨을 가꾸기 위해서 맨발을 벗고 콩바심하던 차라리 그 미개지에로 가자 달이 뜨는 명절 밤 비단 치마를 나부끼며 떼 지어 춤추던 전설 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냇물 굽이치는 싱싱한 마음밭으로 돌아가자

 

- 향아 / 신동엽

 

 

2025년이 저물고 있다. 연말이면 쓸쓸함과 아쉬움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못 본 척 외면해도 침공군의 함성까지 막을 수는 없다. 덩달아 겨울바람이 차갑다.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것은 서럽다. 떠난 것들은 왜 하나같이 정겨운가. 전설 같은 유소년 시절은 안갯속에서 흐릿한 그림자만 보인다. 동화가 스쳐지나간 흔적 위로 아득한 그리움이 피어오른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시절 그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음이나, 그런 그리움마저 없다면 삶이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새로운 문명의 쓰나미를 마주하며 나는/우리는 너무나 왜소하다.

 

그리운 이름, 그리운 그곳을 불러라도 보고 싶다. 이 시를 2025년의 송년시로 삼으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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