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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화삼 / 조지훈 본문

시읽는기쁨

완화삼 / 조지훈

샌. 2026. 1. 16. 11:13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 완화삼(玩花衫) / 조지훈

 

 

이 며칠 동안 시시로 읊고 있는 시다. 쓸쓸한 인생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의 애상이 잘 그려져 있어 마음에 와닿는다. 1942년에 조 시인은 박목월 시인의 초대로 경주에 갔다고 한다. 둘은 시를 쓰는 정조가 비슷했으나 서로 만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두 주 동안 함께 있으면서 여러 얘기를 나눈 의미 있었던 추억이 훗날 이 시로 태어났다. 부제가 '목월에게'로 되어 있다. 목월의 '나그네'는 이 시에 대한 화답시다.

 

시의 제목인 '완화삼'은 즐길 완(玩), 꽃 화(花), 적삼 삼(衫)으로 되어 있다. 시에 나오는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라는 문구를 보건대 '소매에 꽃잎 떨어지는 정경을 즐겁게 감상한다' 쯤으로 해석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면 좀 생뚱맞은 게 흠이긴 하다. 그래서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를 '저 마을'은 일본으로, '꽃은 지리라'는 일본이 멸망하리라는 바람으로 쓴 것은 아니었을까, 억지로 유추해 본다. 

 

아무리 난세여도 인생의 본질적 정서는 달라지지 않는다. 쓸쓸함과 외로움 같은 것들이다. 험악한 시대여서 오히려 더 도드라질 수도 있다. 이 시를 썼을 때 시인의 나이가 20대 초반이었다. 내가 젊었을 때 시인이 20대 때 쓴 '지조론'을 읽고 좌절한 적이 있었다. 이 시에서도 그러하다. 스물 나이 속에 어떤 중늙은이가 들어앉아 있길래 이런 절창이 나온단 말인가.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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