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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읽는기쁨

승무 / 조지훈

샌. 2026. 1. 23. 10:51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승무(僧舞) / 조지훈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담임이 국어 선생님이었다. 그래선지 아침 조회시간이면 무작위로 지명하여 교과서에 나오는 시를 외우게 하고 틀리면 청소 당번을 시키거나 손바닥을 회초리로 때렸다. 덕분에 국어 책에 나오는 시는 달달 외게 되었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을 편애한 것으로 기억한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나만 아니라 대부분이 그렇게 느꼈다. 시에는 암송하기 쉽고 어려운 게 있는데 밉게 보인 아이한테는 힘든 시를 제시했다. 예를 들면, "'승무' 다섯째 연부터 외워 봐" 식이었다. 잠깐이라도 망설이면 불합격이었다. 반면에 귀염을 받는 아이한테는 '나그네' 같은 시를 주어 미소 짓게 만들었다. 담임한테서 나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으니 소외되어 그렇지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다.

 

당시에 이 시는 외우기에 까다로웠다. 고운 우리말이 많이 나오지만 익숙지 않은 표현이어서 그렇다. 하지만 리듬감이 있어서 한 번 암기하고 나면 물 흐르듯 줄줄 이어진다. 이 시는 1939년 <문장> 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시인이 1920년에 태어났으니 약관도 되기 전에 이런 시를 쓴 것이다. 천재 시인이 틀림없다. 청록파 세 명 중에서도 시에 있어서는 첫째가 아닌가 싶다.

 

어린 시절에 외운 가락이 있어선지 몇 번 음송하고 나니 안 보고도 곧 읊을 수 있게 되었다. 한밤중에 승무를 추는 앳된 여승의 모습을 상상하며 시를 따라가니 애절하면서 안타깝다. 그녀 따라 내 눈가도 촉촉해진다.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그녀가 불가에 귀의하게 된 어떤 서러운 사연이 있었을까. 그러나 세사에 시달림이 있었기에 인간은 고개를 들고 별빛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지 않은가. 승무라는 춤은 초월세계를 향하려는 인간의 순수하며 지고한 염원의 동작이리라. 이 시에는 여승에 대한 묘사나 춤추는 장면 등 감탄이 나오게 되는 표현이 연속으로 나온다. 10대 때 이런 시를 쓴 시인에게 오로지 경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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