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 100

뒷산 털중나리

꽃이 귀한 뒷산에서는 무슨 꽃이든 반갑다. 그런데 여름 산길을 상징하는 털중나리가 뒷산에도 있다는 걸 이제야 발견했다. 솔직히 말하면 중나리, 털중나리, 말나리 등을 구분할 실력이 나에게는 없다. 각각의 특징을 설명할 걸 봐도 잘 모르겠다. 그저 제일 흔하게 볼 수 있으니 털중나리라고 추정할 뿐이다. 어쨌든 반가운 털중나리다. 당분간은 네가 산길을 걷는 또 하나의 기쁨이 되어 줄 것이다.

꽃들의향기 2021.06.14

뻐꾸기를 따라간 뒷산

뻐꾸기가 뒷산을 호령하는 계절이다. 이때가 되면 뻐꾸기와 검은등뻐꾸기 노랫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하루 종일 집안을 채운다. 뻐꾸기는 자신이 뒷산의 주인이라는 듯 소리도 우렁차다. 오래전부터 검은등뻐꾸기를 만나보고 싶었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오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뒷산을 오른다. 다행히 검은등뻐꾸기는 먼 곳이 아니라 산길 주변을 맴돌며 노래한다. 내 머리 바로 위에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소리만 들릴 뿐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여름이 되면 나뭇잎이 무성해서 새와 만나는 데 방해가 된다. 새들은 은폐하기 좋겠지만 탐조가는 애간장을 태워야 한다. 들리는 소리를 짐작해 검은등뻐꾸기가 있을 나무를 지목하고 샅샅이 훑어도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나중..

사진속일상 2021.06.13

빗속을 걷다

비 내리는 산길은 적막하다. 원래 뒷산을 찾는 사람이 드물기는 하지만 오늘은 완전히 인적이 끊겼다. 빗소리를 들으며 홀로 걷는 느낌도 괜찮다. 비가 오면 어지간해서는 바깥출입을 삼가는데 이젠 생각을 달리 해야겠다. 길에는 아까시 향기가 그윽하다. 비가 오니 더 진해진 것 같다. 비를 이기지 못해 떨어진 아까시꽃은 길을 덮고 있다. 자연의 순리에는 억지가 없다. 반면에 자연에 반하는 역리(逆理)는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나는 주문을 걸 듯 중얼거리며 걷는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1시간 반 정도 마을과 뒷산 언저리를 산책한 뒤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비에 흠뻑 젖은 운동화를 빨아서 베란다 창가에 세워두었다. 며칠 햇볕을 쬐고 나면 보송보송해진 운동화를 신을 수 있겠지.

사진속일상 2021.05.17

억지로 뒷산

졸지에 5kg이나 늘어난 난감한 몸을 일으켜 뒷산으로 향했다. 억지로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그냥 몸이 망가질 것 같다. 지금도 거울 앞에 서면 배불뚝이 노인의 모습이 가관이다. 배낭도 카메라도 놓아둔 채 휴대폰 하나만 들고 오른다. 천천히 걸으니 호흡이 가쁘긴 하지만 그런대로 올라갈 만하다. 산은 어느새 녹색의 나뭇잎으로 풍성하다. 산바람이 시원한 걸 보니 벌써 여름이 가까워졌나 보다. 산에 드니 계절의 변화가 실감 난다. 자연에 둘러싸인 몸과 마음이 평온하다. 집에서 나오는 결단을 내리길 참 잘했다. 사람 없는 산길은 호젓하며 고요하다. 이런 길을 걸으면 잠시나마 마음도 그리 닮을 것이다. 산정 나무 의자에서 오래 쉬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 한 점은 수시로 모양을 바꾸면서 남쪽으로 사라진다. 처음 들..

사진속일상 2021.05.07

뒷산 목련

뒷산에 우리 토종 목련이 있다. 산속이라 누가 심은 것 같지는 않고 야생 상태의 목련 같다. 그래서 사람이 가꾼 정원에서 보는 목련과는 느낌이 다르다. 목련은 백목련에 비해 단정하지는 않지만 틀에 매이지 않는 자유가 느껴진다. 인공의 아름다움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호방한 멋이다. 뒷산을 산책하다가 목련을 만난 행운의 날이었다. 산을 내려와서 본 동네에 있는 백목련이다.

꽃들의향기 2021.03.30

진달래 활짝 핀 뒷산

뒷산에 진달래가 활짝 폈다. 봄이 찾아오는 속도도 세월이 흐르는 것만큼 빠르다. 뒷산은 꽃이 적은 편인데 그나마 봄 진달래가 제일 볼 만하다. 진달래 때문인지 평상시보다 산에 드는 사람도 많아졌다. 진달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가족의 모습이 보기 좋다. 뒷산에서 제일 먼지 피는 꽃은 생강나무다. 생강나무꽃의 노란색과 진달래의 분홍색이 이맘 때면 잘 어울린다. 산자락에 있는 매화도 만개해 있고, 목련도 꽃을 열기 시작했다. 산 어귀에는 현호색도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뒷산도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다. 봄이 되니 새들의 노랫소리가 다양해지고 볼륨도 높아졌는데 눈에는 잘 띄지 않는다. 멀리서 박새, 곤줄박이, 딱따구리, 직박구리를 봤는데 그중에서는 박새가 제일 많다. 산을 내려오니 역시 참새들 세상이..

사진속일상 2021.03.26

봄 맞는 뒷산

두 달 만에 뒷산을 찾다. 명색이 산이랍시고 오랜만에 오르는 산길에 숨이 가쁘다. 이제 날이 풀렸으니 산과 다시 친해져야겠다. 마침 동서가 등산화 두 켤레를 선물해서 그 값을 하기 위해서라도 산길을 부지런히 다녀야겠다고 다짐한다. 산은 봄 기운이 넉넉히 느껴지지만 시각적으로는 별 변화가 없다. 오로지 생강나무가 병아리 색깔의 꽃봉오리을 내고 있다. 이제 폭발하듯 봄꽃들이 다투어 필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산길에서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무 사이를 두리번거린다. 귀를 쫑긋하니 여러 노래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작은 새를 시야에 넣기는 좀체 쉽지 않다. 오늘은 딱따구리를 만나는 걸 목표로 하고 조심스레 탐색한다. 올라가는 길에 쇠박새를 처음 만나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딱따구리가 나무를 파는 소리가 ..

사진속일상 2021.03.06

2021년 첫 뒷산

소한 추위가 찾아왔다. 낮 기온도 영하 5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고 쌀쌀하다. 하지만 바람 없고 햇빛 쨍한 날이라 중무장을 하고 밖에 나섰다. 올해 들어 첫 외출이면서 첫 뒷산이다. 부지런히 걷다 보면 땀이 배다가 잠깐 머뭇거리면 싸늘해져 다시 모자를 푹 눌러 쓴다. 겨울 산길 위로 나무 그림자가 열을 맞춰 가지런하다. 정상 아래 나의 쉼터는 남향으로 양지바른 곳이다. 오래 앉아 있어도 추위를 잊을 정도로 따스하다. 심리적으로 느끼는 포근함이 더해진다. 한 번 앉으면 일어서기가 싫다. 코로나 탓인지 산길 옆에 있는 골프장은 적막강산이다. 처음으로 필드에 들어가 본다. 골프 선수나 되는 듯 가상의 공을 향해 빈 팔을 휘두른다. 와- 하는 갤러리의 환성이 들리는 것 같다. 현직에 있을 때 수능 검토위원으로 ..

사진속일상 2021.01.07

흔들리지 마

주말에 집에 찾아온 손주의 웃음소리를 뒤에 두고 뒷산에 올랐다. 낮에도 영하의 날씨였지만 산길은 따스하고 포근했다. 집에서 탈출하기는 힘들어도 산에 들면 기분이 환해진다. 이 좋은 길을 거의 한 달 만에 걷는다. 겨울옷은 주머니가 커서 좋다. 똑딱이 카메라는 주머니에 넣으면 딱 알맞다. 요사이는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내던지고 휴대폰을 사용한다. 휴대폰 카메라 성능이 좋아지다 보니 굳이 다른 카메라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휴대폰 카메라에는 적응이 안 된다. 사진을 잘 찍고 못 찍고를 떠나 사진 찍는 맛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밖에 나갈 때는 똑딱이라도 들고 가야 마음이 편하다. "사진이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 주는 수단이다." 어느 사진가의 말이다. 사진은..

사진속일상 2020.12.20

천근만근 무거운 몸

연속적인 재채기와 함께 콧물이 줄줄 흘렀다. 닷새 전 아침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계속 집에 있었는데도 감기를 맞은 것이다. 이런 환절기 연례행사는 건너뛰면 좋으련만 매년 어김없이 찾아온다. 사실 올해는 감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갈 수 없으니 찬 바람을 쐬거나 무리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뭐가 잘못됐는지 불청객이 노크도 없이 침입했다. 굳이 원인을 찾자면 낮에 방 환기를 시킨다고 창문을 활짝 열어둔 것밖에 없었다. 싸늘한 기운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감기에 걸리는 이 유리 몸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다행히 열을 동반하지 않은 콧물감기였다. 약국에서 콘택을 사 먹으니 콧물은 하루 만에 그쳤다. 그러나 미지근한 두통은 계속되었다. 하필 누워 있는 와중에 고모님의 부음을 들었다. 2년..

사진속일상 2020.12.02

산에 대하여 / 신경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

시읽는기쁨 2020.11.27

시드는 풀꽃을 바라보자

늦가을의 산길을 걷다.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해도 한낮이 되면 걷기 적당할 정도로 기온이 올라간다. 따스한 햇살이 점점 반갑고 고마워지는 계절로 접어들고 있다. 오늘은 코로나 하루 확진자 수가 500명대로 올라갔다. 당분간은 사람 만나는 걸 더욱 조심해야겠다. 백수 신세로서 칩거하는 것 외에 세상에 도움이 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집 가까이 있는 산길을 혼자 걷는 떳떳한 명분이 다시 생겼다. 이 시기의 산은 졸음에 겨운 듯 나른하다. 땅에 떨어져 쌓인 나뭇잎이나, 잎을 떠나보낸 나무나 모두 편안한 자세로 서거나 누워 있다. 초봄의 산은 수런거리며 뭔가 음모를 꾸미는 듯하지만, 늦가을의 산은 버린 자의 여유와 한가함이 있다. 늦가을의 산길에서는 자꾸 걸음이 멈추어진다. 늦가을은 내 인생의 계절과 비슷하다. ..

사진속일상 2020.11.26

늦가을 뒷산

늦가을이 되면 산은 순해진다. 자신을 비우고 가벼워진 존재가 가지는 아름다움이다. 사람이 덜 다니는 길은 낙엽으로 덮여 있다. 흐릿해진 경계 위를 따라 낙엽 밟는 소리가 좋다. 자연의 순리에 몸을 맡긴 낙엽은 바스락 소리를 내며 발아래서 부서진다. 하늘 열린 공터에 앉아 햇빛 사냥을 한다. 총도 없고 화약 냄새도 나지 않는다. 은폐, 엄폐 대신 최대한 노출을 많이 시켜야 수확물이 많은 이상한 사냥이다. 옆에는 골프장이 있다.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공이 날아가고, 이어서 "나이스 샷" 하는 외침이 후렴처럼 따른다. 10년째 지켜보지만 아직 무슨 골프장인지 이름도 모른다. 단지 안 단풍나무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다. 코로나로 멀리 나가는 단풍 구경을 못 했지만, 바로 옆에서 이런 화려한 향연을 즐길 ..

사진속일상 2020.11.11

슬기로운 등산법 / 곽은지

가만히 산을 올라보면 알 거야 같은 길도 여러 번 걸어보아야 길이 열린다는 것을 새침한 산새는 휙 지나가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나무도 한 번 지나가는 이에게 이야기를 걸지 않는다 여러 번 걷고 가만히 보는 자에게만 보이는 길 새의 노랫소리 얽혀 있는 나무의 포옹 꽃의 향기 바람결에 스치우는 풀 그리고 걸음마다 들리는 나뭇가지 부서지는 소리 가만히 산을 올라보면 알 거야 같은 길도 여러 번 걸어보아야 길이 열린다는 것을 - 슬기로운 등산법 / 곽은지 딱 우리 동네 뒷산에 맞는 시다. 10년 동안 살면서 제일 많이 찾은 곳이 뒷산이다. 등산이라고는 할 수 없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그래서 부담이 없고 편안하다. 오르는 데 특별한 준비도 필요 없다. 운동화를 신고 나서기만 하면 된다. 늘 같은 길이어서 ..

시읽는기쁨 2020.10.15

가을물 드는 뒷산

아침 기온이 7도까지 떨어졌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뒷산의 나뭇잎도 가을물이 들어간다. 아직은 초록이 우세하지만, 지금 초록은 여름의 초록이 아니다. 깊어지고 잘 익은, 그윽한 초록이다. 체중이 한 달 전보다 2.5kg가 늘었다. 몸이 둔하고 무겁다. 뒷산길을 걷는 것도 전 같지 않다. 여름이라면 무척 헉헉댔을 것이다. 쉬엄쉬엄 가을 뒷산을 한 바퀴 돌았다. 8년 동안 쓰던 휴대폰을 바꾸었다. 수명이 다한 듯 최근 들어 자꾸 고장이 나며 말썽을 부려서다. 선생님 같은 사람만 있으면 자기들은 뭘 먹고 사느냐고 매장 직원이 투덜거렸다. 새로 산 기종은 갤럭시 A31이다. 집 앞 가게에서 37만 원에 샀다. 고급 기종은 아니지만, 렌즈 성능이 전 기계보다 향상된 게 마음에 든다. 카메라가 없을 때 대용으로..

사진속일상 2020.10.14

폭신한 뒷산

열흘 사이에 태풍 세 개(8호 바비, 9호 마이삭, 10호 하이선)가 지나갔다. 세 태풍은 한반도를 북진해서 통과했다. 기상청 설명으로는 북태평양고기압 세력이 강해서 일본쪽으로 휘지 못했다고 한다. 오래 비를 맞아서 뒷산길은 폭신했다. 드디어 산길 걷기 좋은 때가 찾아왔다. 여름보다 습도가 낮아 상쾌하고, 산모기와 날벌레가 없어 깨끗하다. 오늘 산길에서는 두 시간 정도 걷는 동안 예닐곱 명과 마주쳤다. 코로나로 산을 찾는 사람이 늘어났다. 코로나 전이었다면 한두 명 마주치는 게 고작이었다. 평균 20분에 한 명씩 만나는 꼴이니 마스크를 안 써도 괜찮다. 그래도 좁은 산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서로가 조심하며 멀리 떨어져 지나친다. 태풍에 부러진 나무도 보였다. 이 나무는 줄기에 비해 키가 너무 웃자랐다. 나..

사진속일상 2020.09.11

풀어주는 뒷산

나름대로 유유자적을 즐긴다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답답함이 없겠는가. 그럴 때 특효약은 뒷산이다. 숲길을 걷다 보면 어지간한 체증은 뻥 뚫린다. 이만한 소화제가 없다. 코로나가 다시 창궐하면서 일부 종교인들의 행태가 못마땅한데, 부잣집 도련님들의 투정까지 더해졌다. 너무 내 것만 챙기려는 심보가 얄밉다. 20년 전 의약분업을 둘러싼 사태가 재현되는 것 같다. 그때도 명분은 국민 건강이었지만, 투쟁의 실제는 오로지 자기들의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이었음을 잘 안다. 못된 정치인처럼 제발 국민 좀 팔아먹지 말기 바란다. 산에서 비를 만났다. 우산을 쓰고 산길을 걷는 것도 재미있다. 며칠 전 지나간 태풍으로 길에는 나뭇잎이 많이 떨어져 있다. 닭의장풀, 꽃며느리밥풀 등 여름꽃이 눈에 띄지만 오늘은 풀잎에 맺힌 빗방울..

사진속일상 2020.08.29

반짝 뒷산

장마 꼬리가 길다. 다음 주까지 비 예보가 나와 있으니, 잘 하면 장마 종료일 기록을 갈아치울 기세다. 장마가 가장 늦게 끝난 때는 1987년의 8월 10일이었다. 오후에 반짝, 하고 파란 하늘이 열렸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부리나케 배낭을 메고 뒷산에 올랐다. 많이 게을러졌지만 이만한 의욕이라도 남아 있으니 다행이 아니겠는가. 한밤중에 요란하게 비가 지나갔는가 보다. 산길에도 빗물이 흘러내린 흔적이 남아 있다. 목현천은 흙탕물이다. 하천 옆 길은 아직 통제할 정도는 아니다. 앞에 걸어가는 80대 노부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입성으로 봐서 교양 있고 세련된 분들 같다. 씩씩한 할머니는 여행용 가방을 밀면서 앞서고, 할아버지가 뒤따른다. 두 분 간격이 자꾸 벌어진다. 젊었을 때 모습과 반대로 되었다..

사진속일상 2020.08.06

장마 사이 뒷산 한 바퀴

장마 사이에 푸른 하늘이 열렸다. 망설임 없이 배낭을 꺼내서 뒷산으로 나갔다. 요사이는 바깥 걸음이 많이 부족하다. 자꾸 게을러지는 걸 코로나 탓으로 돌리지만, 내심에는 좀 게으르게 산들 어떠랴 싶은 마음도 있는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아보라고, 코로나가 강요하는 이때가 아니면 언제 엄두를 낼 수 있겠는가. 그저께 비바람이 심하게 친 탓인지 산길에는 나뭇잎이 많이 떨어져 있다. 산 정상에 정자가 새로 생겼다. 전에는 돌무더기가 있던 자리다. 뒷산에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바위 중 하나다. 뒷산과 접해 있는 마을은 텃밭에 둘러싸여 있다. 집도 4층으로 된 연립주택 형태다. 그리고 집 밖을 나오면 흙을 밟을 수 있다. 도시와 농촌의 중간 지대쯤 된다. 시멘트로 덮인 동네와는 공기의 내음부터 ..

사진속일상 2020.07.26

7월 뒷산

여름에는 뒷산을 거의 가지 않는다. 집요하게 달려드는 모기를 비롯한 날벌레 때문이다. 이놈들은 한 번 목표를 정하면 절대 포기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덤벼든다. 산길을 걷는 건지, 이놈들과 싸움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된다. 너무 성가셔서 아예 여름산은 가지 않는다. 뉴질랜드 밀포드 트레킹을 할 때 사용했던 얼굴 방충망을 꺼냈다. 밀포드의 샌드플라이 공격은 악명이 높다. 좀 불편하더라도 이걸 덮어쓰고 뒷산에 올랐다. 성가신 날벌레는 물리칠 수 있는데 대신 시야가 흐리고 답답하다. 그래도 쓰는 편이 훨씬 낫다. 살아가면서 귀찮게 하거나 성가시게 하는 근심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름 날벌레쯤이야 산에 가지 않으면 된다. 얼굴 방충망이나 해충 기피제도 있다. 그러나 인생사에서는 내 힘으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

사진속일상 2020.07.03

봄비 내린 뒷산

요란하긴 했으나 반가운 봄비가 내렸다. 공기가 맑아지고 산길의 먼지도 잠잠해졌다. 아내와 함께 봄물 든 뒷산을 찾았다. 진달래 진 자리에 철쭉이 피었다. 뒷산 철쭉은 색깔이 은은해서 좋다. 산이 보여주는 춘색(春色). 지난번에 이어 뒷산을 반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았다. 두 시간 반에 1만 3천 걸음수가 찍혔다. 이 정도면 노인네 하루 운동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다만 게을러서 쉬이 나서지 못할 뿐....

사진속일상 2020.04.18

만만한 뒷산

마음대로 나다니지 못하니 만만한 게 뒷산이다. 뒷산을 찾는 빈도가 두 배는 늘었다. 그 또한 좋은 일이다. 만화방창한 봄이 집 주변이라고 비껴갈 리 없다. 코로나19로 지구가 조용해지고 깨끗해졌다는 보도가 연신 나온다. 인간 활동이 주춤해진 결과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부산스럽게 살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여행' 대신에 '소풍'이라는 말이 되살아날까. 탐욕을 좀 덜어낼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코로나19 전과 후로 세상이 달라질 거라고 말하는데, 과연 어떻게 변한다는 의미일까. 국가간 연대나 차별을 넘어선 인류의 통합이라는 가치가 살아날 것인가. 위기는 기회가 된다지만 IMF나 금융 위기를 겪고 나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방향 전환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코로나로 잠깐 멈칫하겠지..

사진속일상 2020.04.07

뒷산 진달래(2020)

뒷산에 진달래가 만개했다. 진달래를 보니 산과 들판으로 천방지축 뛰놀던 유년 시절이 생각난다. 집에서 보면 뒷산은 봄이면 진달래로 발갛게 물들었다. 소나무가 듬성듬성 있고 진달래가 많은 민둥산이었다. 뛰놀다가 출출해지면 꽃잎을 따먹었다. 소나무에 물기가 돌면 가지를 꺾어 속살을 씹어먹기도 했다. 그런 것이 군것질거리가 된 어린 시절이었다. 그때는 진달래를 참꽃이라고 했다. 철쭉이 진달래였다. 훗날 서울에 와서야 이름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고치는 데 한참 걸렸다. 뇌리에 새겨진 각인이 깊은지 진달래보다는 참꽃이라고 해야 유년의 봄이 쉽게 다가온다. 참꽃 뒤에서 옛 동무가 까꿍, 하면서 뛰쳐나올 것만 같은 산길이었다.

꽃들의향기 2020.03.27

손주와 오르는 뒷산

뒷산에 가고 싶다고 손주한테서 연락이 왔다. 손주와 함께 뒷산에 오를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먼저 요청을 하니 잘된 일이었다. 아내도 따라나섰다. 뒷산조차 겁내던 아내는 손주의 에너지를 빌려 얼떨결에 정상까지 다녀왔다. 할머니에게 손주는 힘이 세다. 아이는 산길에서도 분주하다. 이것저것 만지고, 낙엽을 발로 긁고, 무슨 나무냐고 묻고,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딸이었던 내 자식을 키울 때와는 딴판이다. 딸은 너무 수동적이고 얌전해서 걱정했었는데, 이 녀석은 천방지축이다. 생명의 활기를 보며 감탄하다가도 뭔가 숙연해지며 먼 하늘을 쳐다 보게 된다. 보통 때 평일이면 두세 시간 산길에서 겨우 한두 사람 만나는 정도다. 그런데 이날은 10여 명을 만났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붐비는 바깥 대신 인적 드문 뒷산..

사진속일상 2020.02.25

입춘 지난 뒷산

입춘 즈음에 반짝추위가 찾아오더니 다시 포근해졌다. 이제부터는 양(陽)의 기운이 흥하면서 뭇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며 겨울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햇볕 좋은 날, 뒷산에 올랐다. 주로 집에 있다 보니 햇볕 쬐는 시간이 부족하다. 양지 바른 쉼터에서 태양을 향해 앉아 햇빛바라기를 하다. 얼굴에 닿은 햇살과 그 햇살을 그리워한 피부가 서로 희롱하는 즐거움이 느껴진다. 걸을 때도 파란 겨울 하늘이 좋아 자꾸 고개를 들다. 산등성이 낙엽 가운데 어딘가에 샛노란 복수초가 고개를 내밀고 있을 것만 같다. 한 달 전부터 잎눈을 낸 진달래는 그다지 진도가 안 나갔다. 너무 성급했던 걸까, 봄을 기다리는 대기시간이 길다. 우리 동네 양지 바른 비탈에도 개불알풀꽃이 피었다. 사람들 얘기로는 꽃을 본 지 한참 되었다 한다. 확..

사진속일상 2020.02.08

추위가 사라진 겨울

겨울인데 겨울답지 않다. 올겨울 들어서는 제대로 추워 본 날이 없다. 서울 기준으로 작년 12월 1일부터 오늘(1월 16일)까지 낮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날이 사흘밖에 안 된다. 12월 5일이 -0.2도, 6일이 -1.0도, 31일이 -4.5도였다. 이번 겨울 47일 동안 낮에도 영하인 날이 고작 3일이었다. 겨울이 실종되었다. 강원도에는 겨울비가 내려 얼음축제장이 엉망이 되었다. 앞으로 예보를 보면 1월 말까지는 이런 날씨가 이어진다고 한다. 겨울인데 눈과 얼음을 보기 힘들다. 집 주변 개울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 마치 봄이 된 것 같다. 뒷산에 올랐는데 나뭇가지에는 연초록 잎눈이 돋았다. 기후 변화가 수상하다. 따스한 겨울이 사람 살기에는 다행이다 싶다가도 왠지 꺼림직하다. 예견하지 못하는 변고가 닥..

사진속일상 2020.01.16

12월 중순 뒷산

한 달 반만에 뒷산을 찾다. 걷기를 위한 걸음도 꼭 그만큼만이다. 올해만큼 걷기를 소홀히 한 적도 없다. 등산은 두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핑계는 있지만, 그냥 게을러졌다고 해야겠다. 며칠 전 모임에 나갔더니 다들 휴대폰으로 걸음수를 체크하며 하루 만 보 걷기를 실천하고 있었다. 옆에 앉았던 Y는 11월의 하루 평균 걸음수가 2만 보가 넘었다며 자랑스레 보여주었다. 나도 분발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한 번 발동이 꺼지니 다시 불붙이기 쉽지 않다. 더구나 겨울이 닥쳤으니 해동되는 내년 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다. 오랜만에 걸으니 우선 숨이 차다. 내 몸이 이렇게 무거웠나 싶다. 속도를 늦추고 쉬엄쉬엄 오른다. 등산화를 신고 집 밖을 나서기가 어렵지 어쨌든 나오면 좋다. 맑고 차가운 산기운을 흠뻑 들이킨다..

사진속일상 2019.12.16

혼자 걷는 뒷산

가을 짙어가는 뒷산을 혼자 걷다. 소문난 장소를 찾지 않아도 가을은 바로 옆에 와 있다. 나만의 산길이 무척 호젓하고 좋았다. 두 시간여 산길에서 딱 한 사람밖에 만나지 못한 나를 위한 길이었다. 세상의 일에 대한 성취나 소유에서 오는 즐거움도 있지만 오직 존재 자체가 주는 기쁨도 있다. 지상(至上)의 행복은 지상(地上)의 일을 떠나 있다. 오늘처럼 뒷산을 홀로 걸을 때 오로지 존재에서 오는 행복을 잠깐 맛본다. 오늘 산길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은 환자복을 입은 분이었다. 뒷산 밑에 요양병원이 있는데 주로 중환자가 계신다. 아내가 봉성체 봉사하러 이 요양병원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데 환자의 안타까운 사연을 간접적으로 듣고 있다. 오늘 산길에서 만난 분은 환자복 위에 겨울 패딩을 입고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한..

사진속일상 2019.11.02

초가을 뒷산 한 바퀴

신경이 날카롭고 짜증이 늘어났다. 머리가 무겁고 사는 게 별 재미가 없다. 무엇보다 잠을 편안히 자지 못하는 영향이 크다. 기본에서 덜거덕거리니 우울감이 찾아오지 않을 수 없다. 계절마저 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가볍게 배낭을 매고 뒷산에 오른다. 목 마른 것도 참고 한 번의 쉼도 없이 정상에 이른다. 바지런히 걸으니 꼭 한 시간이 걸린다. 땀을 흘리니 몸이 개운하고 머리도 조금은 가벼워진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다. 모든 게 내 '마음'으로부터 기인한 게 아니겠는가. 바깥 탓을 대지만 사실은 내면에 관한 문제다. 깊게 심호흡을 한다. 산길에서 도토리를 줍는 한 남자를 만났다. 인공관절 수술을 한 사연이며,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를 들었다. 일흔 셋인데 지금도 버스를 몬다고 했다. 직장인을 아침 저..

사진속일상 2019.09.27

뒷산 닭의장풀

뒷산길을 걸을 때 이맘때까지도 제일 자주 만나는 꽃이다. 산꼭대기 풀밭에도 많이 피어 있다.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다는 뜻이리라. 너무 흔해서 귀한 대접을 못 받지만 특이한 모양에 개성이 강한 꽃이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볼수록 매력이 더하다. 특히 두 장의 나비 모양을 한 꽃잎의 푸른색이 예쁘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꽃, 닭의장풀이다.

꽃들의향기 2019.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