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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살이의꿈

시 60

샌. 2026. 4. 20. 10:30

젊어서 한창이었을 때는 외울 수 있는 시가 백 수십 편이나 되었다. 머리가 그만큼 팽팽 돌아갔을 것이고, 남몰래 애태우는 그리운 사람이 있기도 했을 것이다. 그 뒤로도 쭉 시를 좋아하고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암송하는 일은 잊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외울 수 있는 시가 없어졌다.

 

올 들어 한 모임에서 어느 분이 시를 외우는 걸 들었다. 조지훈 시인의 '완화삼'이었다. 술잔을 앞에 놓고 은은하게 시 읊는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좋은 것은 따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다시 시를 외울 결심을 하게 되었다.

 

예전 기억을 떠올려 생각나는 대로 하나씩 외워나가기 시작했다. 의외로 수월했다. 수십 년 전이건만 그때 외웠던 언어와 운율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이걸 외울 수 있을까, 싶은 긴 시도 리듬을 타니 구렁이 담 넣어가듯 술술 풀려나갔다. 아직 살아있네, 라며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숫자에는 약해도 문장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석 달쯤 지났나, 그간 외운 시가 60편이 되었다. 

 

박두진 / 도봉

박목월 / 윤사월, 나그네

조지훈 / 완화삼, 낙화, 승무

김소월 / 진달래꽃, 산유화

윤동주 / 서시

백석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유치환 / 그리움, 행복, 깃발, 생명의 서, 바위

이영도 / 그리움

이육사 / 광야, 청포도

김영랑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원수 / 겨울나무

윤석중 / 낮에 나온 반달

주요한 / 빗소리

한용운 / 알 수 없어요

나옹선사 / 청산가

윤선도 / 오우가

이백 / 山中問答

두보 / 登岳陽樓

백거이 / 對酒

도연명 / 飮酒

 

정지용 / 호수, 향수

고은 / 그 꽃

나태주 / 들꽃

최영미 / 선운사에서

이형기 / 낙화

김춘수 / 꽃

천상병 / 귀천

매창과 유희경

황진이와 서경덕

 

워즈워드 / 무지개

구르몽 / 낙엽

프로스트 / 가지 않은 길,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서서

김광균 / 설야

신경림 / 갈대, 목계장터

김사인 / 공부

김용택 / 그랬다지요

안도현 / 연탄 한 장

 

신동엽 / 껍데기는 가라 

김남주 / 죽창가

고정희 / 상한 영혼을 위하여

김지하 / 회귀

김수영 / 풀

노천명 / 사슴

서정주 / 국화 옆에서

신석정 /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박인환 /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

 

이걸로 일단 마무리하고 하루에 스무 편 정도씩 매일 아침저녁으로 암송하고 있다. 주로 침대에서다. 어떤 사람은 하루를 시작하거나 마감하면서 명상이나 기도로 마음 정리를 한다지만 나는 시 암송을 택했다. 시가 담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나도 같이 느끼면서 그리워하고, 애틋해하고, 위안을 받는 것이다.

 

외우다 보니 몇몇 시에는 옛 추억이 묻어나 아련하다. 그 시절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는 치기 어린 술자리의 어쩌다 레퍼토리였다. '목마와 숙녀'는 술 마시는 분위기를 돋우는 마약 같은 시였다. 폼을 잡고 읊으면서 중간중간에서 소주를 들이켜던 기억이 난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당시의 분위기를 재현해 보고도 싶다. 시가 풍기는 염세적 분위기가 작금의 세계 상황과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도 좋은 시가 떠오르면 하나씩 추가해 나갈 예정이다. 그렇게 가다 보면 연말에는 한 백 편쯤 모이지 않을까. 암송은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하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반복해서 읊다 보면 시심(詩心)을 닮지나 않을까,라는 기대도 하는 것이다. 그날 '완화삼'을 절절히 읊어주신 그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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