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 바. 라. 기.

왜 암자를 태웠을까? 본문

참살이의꿈

왜 암자를 태웠을까?

샌. 2026. 1. 29. 11:32

"한 곱게 늙어가는 노파가 뒤란 언덕 위에 자그마한 암자를 짓고 선(禪) 공부에 몰두하는 한 비구 스님을 모셔놓고 정성을 다해 공양과 공부 시중을 들어주었다. 오랫동안 시중을 들어오던 어느 날, 노파는 자기 대신 새파랗게 젊으면서도 지혜롭고 예쁜 미녀를 불러 그 비구에게 정성스럽게 차린 밥과 차를 대접하고 그를 시험하게 했다. "스님이 식후에 차를 마시고 나면 그냥 나오지 말고 스님에게 애교를 떨면서 얼싸안고 섬섬옥수로 스님의 몸을 애무하며 입을 맞추어라. 그런 다음 그 느낌이 어떠냐고 물어봐라." 젊은 미녀는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비구 스님은 그녀의 질문에 "나무 기둥이나 차가운 들짐승에게서 애무를 받는 듯싶소"하고 차갑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난 노파는 그 비구를 쫓아내고 암자를 불태웠다."

 

근래 읽었던 책에서 본 일화다.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내용이다. 화두로 삼아 궁구해 볼 만하다.

 

<장자>에 보면 목계(木鷄) 우화가 나온다. 투계를 좋아하는 초나라 왕이 닭 조련사에게 최고의 싸움닭을 만들어달라고 훈련을 맡겼다. 열흘이 지나서 왕이 묻자 조련사는 말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강하긴 하나 교만하여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있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서 물으니 조련사는 말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교만은 버렸으나 상대의 소리와 그림자에 너무 쉽게 반응합니다. 태산 같은 진중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서 묻자 이번에는 이렇게 답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조급함은 버렸으나 상대를 노려보는 눈초리가 너무 공격적입니다."

다시 열흘이 지났다.

"이제 되었습니다. 상대가 소리를 질러도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나무로 만든 닭과 같은 목계가 되었습니다. 닭의 덕이 완전해졌기에 어느 닭이라도 보기만 하면 도망칠 것입니다."

 

투계지만 싸움마저 초월한 상태가 되었다. 감정의 기복에서 해방되어 일희일비하지 않는 평정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노파와 스님의 일화를 보면서 장자의 목계가 떠올랐다. 여자 앞에서도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목석 같은 스님은 이 목계의 경지에 이른 것일까.

 

노파는 왜 비구 스님을 시험하고 자신의 암자를 불태웠을까? 스님의 공부가 완성되었다고 판단하고 내보낸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고수로 보이는 노파가 이 정도로 수준 낮게 평가했을 리가 없다. 정형화된 도덕률의 잣대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공부의 핵심으로 본 게 틀림없다. 스님은 불쌍하게도 초보 단계의 도덕적 계율에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의 유정(有情)을 억누르느라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노파는 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님은 어떻게 반응했어야 할까? 솔직해지자고 여자와 사랑을 나누었어야 할까? 불교의 화두란 정해진 답이 없다. 개인의 마음 그릇 크기에 따라 다른 행동이 나올 것이다. 지금의 나 같으면 어땠을까? 그러나 거기가 종착지는 아니다. 장자의 목계를 차용한다면 자연스레 표출되는 고수의 경지가 어떠할 것인지 상상은 된다. 스님 앞에 선 여자는 스님한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자신이 의도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감히 시험의 대상으로 삼을 생각을 버렸을지 모른다. 노파는 여자의 행위 여부로 공부의 완성을 판단했을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이보더 더 복잡하다.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인지 넘어지고 실패하며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이 아닐까. 쫓겨난 스님은 노파와의 경험이 죽비가 되어 성불했으리라 믿고 싶다. 스님을 쫓아낸 것은 노파의 사랑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결과가 어찌되었든 높은 하늘의 별빛에 모두운 그 눈동자만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참살이의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  (0) 2026.03.08
639년 동안의 음악  (0) 2026.02.04
오유지족(吾唯知足)  (0) 2026.01.06
우리갇이우슴시다  (0) 2025.12.10
살아진다 살아간다 살아낸다  (0) 2025.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