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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살이의꿈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

샌. 2026. 3. 8. 10:07

1980년대 중반 J여중에서 근무할 때 가깝게 지낸 동료 Y가 있었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아이들이 붙여준 별명이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였다. 가수 전영록이 부른 이 노래가 한창 인기를 끌 때였다. Y가 지나갈 때면 철없는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노래를 부르며 킥킥댔다. Y는 씁쓰레한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

하늘엔 반짝이는 별들이

가끔 쳐다 보네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

 

나중에 둘이 만난 자리에서 Y는 나한테 처음으로 선글라스를 벗어 보였다. Y의 왼쪽 눈은 검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고 탁한 우윳빛이었다. 어릴 때 사고를 당해서 그렇다고 슬프게 말했다. 눈이 약간 불편한 정도로 알았는데 상태가 그리 심각한 줄 몰랐다. 선글라스를 쓰는 것은 본인이 아니라 타인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한 배려였다. 이런 사정을 아이들이 알았다면 놀리듯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시절 Y와는 가까이 지냈다. 같은 대학 출신의 동기여서 서로 의지하는 바가 컸다. 활동적인 성격의 Y한테서 내가 더 많은 도움을 받았다. 둘은 주임으로 있었는데 내가 업무상으로 어려움에 처하면 Y가 맨 먼저 발 벗고 나서줬다. 운전면허증을 따고 차를 사니까 시내를 돌며 연수를 시켜준 것도 그였다. 다만 저녁 시간은 불가피한 회식이 아니면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밤에도 선글라스를 써야만 하는 사정과 관계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Y의 고충을 헤아리지 못했지만.

 

나는 작년부터 외출할 때면 고글 안경을 쓴다.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줄줄 흐르고 충혈이 되기 때문이다. 의사가 약보다는 고글이 좋을 것이라고 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효과를 보고 있다. 고글을 쓴 뒤로 증상이 확 줄어들었다. 선글라스 고글이어서 낮에는 관계 없는데 저녁이 되면 시야가 어둡다. 더 어둑해지면 벗게 되는데 세상이 환하게 밝아진다. 그럴 때면 Y가 떠오른다. 눈을 가려야 하는 짙은 선글라스가 밤이면 얼마나 불편했을까.

 

당사자와 같은 사정에 처하지 않는 한, 인간이 인간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걸까.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제 손톱 밑 가시보다 더한 고통은 없다. 인간은 그만큼 이기적인 존재다. 가시가 빠진들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고, 고통이 남긴 교훈은 미미해진다. 인간 사이는 해양을 끼고 떨어진 두 대륙만큼이나 멀다.

 

40년이 지나 고작 고글을 쓰고 벗으면서 나는 옛날의 Y를 떠올리며 그에게 미안해 한다. 당구도 못 치느냐고 힐난할 줄만 알았지 그의 눈을 보지는 못했다. 자주 짓던 쓴웃음이 이제야 다른 식으로 해석되면서 아프다. 다시 만나면 따스한 술 한 잔 나누고 싶건만 이러저리 수소문해 봐도 그의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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