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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살이의꿈

639년 동안의 음악

샌. 2026. 2. 4. 10:49

음악 한 곡 연주하는데 639년이 걸린단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긴 곡이 아니고, 악보는 고작 8 면밖에 안 된다. 2001년에 시작한 이 공연은 지금도 연주 중에 있다. 다만 한 음을 연주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길 뿐이다.

 

곡명은 'Organ2/ASLSP'다. 존 케이지가 1985년에 작곡한 오르간 곡으로 부제가 '가능한 한 느리게(As Slow as Possible)'이다. 이 곡을 최대한 느리게 연주하는 프로젝트가 2001년에 시작되었고 2640년에 종료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특수 오르간이 제작되었고 독일 할버슈타트의 한 교회에 설치되었다. 할버슈타트는 1361년 세계 최초로 오르간이 만들어진 곳이다. 숫자 639도 이와 연관이 있다.

 

오르간은 건반을 누르는 모래주머니와 바람을 뿜는 모터로 작동한다. 한 음이 바뀌는 데는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까지 걸린다. 2001년부터 지금까지 고작 열여섯 번밖에 음이 바뀌지 않았다. 다음 음은 올 8월에 바뀔 예정이다. 새로운 음을 듣기 위해 멀리서 비행기를 타고 교회로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 연주 프로젝트는 어지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느림의 미학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우리는 일생을 사는 동안 고작 몇 개의 음만 듣는다. 나머지는 다음 세대가 이어받는다. 느리게 울리는 이 음악 앞에서 우리는 유장한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며 겸손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정록 시인의 '더딘 사랑'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달이 기울고 차는 것을 한 달에 한 번 하는 윙크로 묘사한 게 절묘하다. 달의 윙크을 본받아 639년 동안의 음악을 시도할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다. 요사이는 긴 영상 보는 게 지루해 짧은 쇼츠가 인기라고 한다. 저녁에 인터넷으로 물건을 구입하면 새벽에 문 앞까지 배송해 준다. 로켓 배송이라나 뭐라나. 어쨌든 'As Fast as Possible'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 사람의 마음도 그만큼 여유가 없어지고 조급해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2640년 9월 4일 토요일 폐막식 입장권을 예매하세요. 당신이 그 날짜에 올 수 없다면 양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자손을 초대하세요." 이 음악 프로젝트 홈페이지에 쓰여 있는 글귀라고 한다. 지금은 2026년이다. 앞으로 614년 뒤의 날을 상상해 보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이며 멋진가. "우리는 시작도 끝도 모르는 거대한 곡의 한 음표일지 모른다. 전제 악보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내는 음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영원처럼 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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