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 바. 라. 기.
수학여행은 이렇게 우울하게 끝났다 본문
"국민학교 내 마지막 수학여행은 이렇게 우울하게 끝났다."
박완서 작가가 자신의 국민학교 6학년 수학여행을 회고하면서 끝맺음한 문장이다. 1940년대 초반 일제 강점기 때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면 원족 대신 수학여행을 갔나 보다. 지금처럼 몇 박을 하는 수학여행이 아니고 버스나 기차를 타고 멀리 나가는 당일치기 소풍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매동국민학교에 다니던 작가는 6학년 수학여행을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개성으로 갔다.
서울역에서 떠날 때 엄마가 배웅을 나왔고 개성역에 도착하니 할머니가 또 마중을 나왔다. 개성은 작가의 고향으로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어린 작가에게 그게 그리 창피하고 싫었단다. 기차에서 내려 동무들과 줄을 서 있는데 시골 할머니가 자기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찾아오고 있으니 오죽했으랴 싶다. 할머니는 담임 선생님 몫까지 송편을 싸가지고 와서 맡기더란다. 작가는 이때 심정을 참담했다고 썼다. 개성 명소를 도는 동안 내내 우울했고 송편은 아무하고도 나누어 먹지 않았고 담임 선생님께도 주지 않았단다. 유달리 친족 간의 끈끈한 유대감과 과보호가 참을 수 없이 짜증스러웠다는 것이다. 저녁에 서울역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오빠가 마중 나와 있었다. "수학여행은 이렇게 우울하게 끝났다."
작가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내 우울했던 국민학교 6학년 때의 수학여행이 떠올랐다. 나는 작가와는 정반대의 경우로 망친 수학여행이었다. 1964년 봄, 우리 역시 기차를 타고 영월로 2박3일의 수학여행을 떠났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촌놈들이었기에 기차를 처음 타 보는 친구도 있었다. 몇몇은 기차 의자의 쿠션이 좋다며 의자 위에 올라가서 널뛰기를 하듯 콩콩 뛰며 좋아했다. 나는 여러 번 기차를 탔던 경험이 있기에 표현은 안 했지만 우월감에 젖기도 했던 것 같다. 무시하듯 젊잖게 앉아 있었을 것이다.
영월에 내려서 공장 견학 등을 하며 명소를 돌아다녔다. 단종릉에도 들렀다. 문제는 기념사진을 찍을 때 일어났다. 담임 선생님은 나를 보고 혀를 끌끌 차더니 "옷 꼴이 그게 뭐냐"라면서 사진 찍을 때 안 보이는 뒷줄에 서라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내 옷이 형편없다는 걸 알았다. 낡은 잠바에 단추는 떨어져서 옷핀으로 고정시킨 것이 내가 봐도 너무 허름했다. 우리보다 훨씬 못 사는 집 아이들이 입은 옷과도 비교가 됐다. 비싼 옷은 아니어도 수학여행을 한다고 깔끔하게 차려 입힌 흔적이 보였다. 그런데 나는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선생님한테 지적을 받고 뒤로 쫓겨났겠는가. 그룹으로 나누어 사진을 찍을 때는 다른 아이 옷을 빌려 입었다. 그것 역시 선생님의 명령이었다.
너무 부끄러웠고 선생님에 대한 서운함으로 서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이들 앞에서 어찌 이런 창피를 줄 수 있느냐 말이다.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일어났다. 어머니는 농사에는 억척이었지만 자식한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자상한 어머니는 아니었다. 서울에서 유학할 때 여름방학이 되어 내려가면 어두컴컴할 때가 되어 집에 닿는다. 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부모님은 들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분명 연락을 드렸건만 자식보다는 농사일이 먼저였다. 몇 달 만에 내려오는 자식을 위해 따뜻한 밥상을 기대했건만, 그때의 공허했던 심정은 아직도 마음속 한 구석에 쓸쓸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런 정(情)을 갈구한 것은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형제들이 만나 얘기할 때면 공통적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워한다. 자기만 홀대를 받았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나는 그때 결심했다. 커서도 절대 일에 매몰되지는 않겠다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며 살겠다고. 성인이 되고 나서 한 가지는 지켰다. 여유있는 삶을 누릴 직업을 가졌고 일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성취를 위해 나를 희생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 가지는 선대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자식들에게 무심하며 엄격한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를 이어 내려가는 그 무엇이 있는 걸까. 핏줄의 힘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녁을 먹고 밤이 되면 여관방에서 춤 파티가 벌어졌다. 누가 무엇을 틀었는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유행가를 부르고 신나게 흔들어댔다. 그게 제대로 노는 것이었다. 어른들한테 배운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러함에도 소심한 나는 그 자리에 낄 수가 없었다. 음치며 몸치이기도 했지만 옷 사건으로 마음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상태였다. 모든 게 싫었다. 혼자 빠져나와 여관 뒤뜰 나무 아래에 앉아 아이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흐느꼈다. 세상에서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중에 노자의 <도덕경>에서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我獨泊兮(세상 사람들 다 희희낙락하는데...)'라는 구절을 읽을 때면 항상 어린 시절 이 장면이 떠올라 쓴웃음을 짓곤 한다.
그 와중에 내가 없어진 걸 알아채고 곁에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어 준 친구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밤하늘에 쳐들고 아무 것도 아닌 척했다.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 눈이 따가워서 나온 거야." 그 친구는 누구였을까?
국민학교 내 수학여행도 이렇게 우울하게 끝났다. 박 작가와 정반대였지만 결과는 같았다. 작가는 과잉보호에 질렸고, 나는 무관심과 핀잔에 서러웠다. 둘 모두 어린아이의 예민한 반응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나 선생님이나 여전히 생존해 계신다. 당시는 두 분 다 파릇한 30대 청춘이었을 것이다. 국민학생이었던 부끄럼을 잘 타던 아이는 어느덧 70대가 되었다. 선생님과는 얼마 전에 통화를 하면서 근간 찾아뵙겠다고 약속을 했다. 옛 기억은 거대한 용광로와 같다. 이 속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씁쓸하면서 감미로운, 또한 사랑스런 추억으로 변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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