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 바. 라. 기.
즐거운 편지 / 황동규 본문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즐거운 편지 / 황동규
미수(米壽)에 다다른 황동규 시인의 기사를 봤다. "잠깐 기다릴래요? 집에서 보약 좀 가져오게." 그리고 시인이 가져나온 것은 위스키였다. 돼지갈비와 위스키를 즐기며 시인은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건강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최근에는 열여덟 번째 시집 <봄비를 맞다>를 냈다. 시인은 말씀하신다. "사는 것 자체가 축복이며, 그 축복을 제대로 받으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이 시는 시인이 고등학생 시절 여대생을 짝사랑할 때 썼다고 한다. 이 시로 등단했으니 데뷰작인 셈이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일흔 넘은 내가 이런 생각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생각이 있더라도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지, 까마득히 멀다.
젊었을 때도 이 시를 좋아했지만 지금 다시 접해 보니 시인의 '사랑의 비틀기'가 통쾌하다. 울고불고 매달리는 사랑이 아니라, 이불 속에서 질질 짜는 사랑이 아니라, 잊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랑이 아니라, 시인은 사소함과 초연한 기다림으로 물꼬를 돌려버린다. 사랑이라는 애착의 무상(無常)을 진즉에 깨달은 것이다. 하물며 다른 인간관계야 오죽하랴. '즐거운 편지'는 바로 '즐거운 인생'으로 연결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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