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 바. 라. 기.
사슴 / 노천명 본문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난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 사슴 / 노천명
1960대 후반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여자 시인으로서는 노천명이 유일했을 것이다. 당시 시인에 대한 인상은 고고하면서 고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시의 느낌이 그러했으니까. 한참 시간이 흘러 시인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크게 실망했다. 60년대 교과서에 시가 실린 걸 보니 그때는 친일 행위를 몰랐던가 아니면 무시했던 것 같다.
사춘기 시절 처음 만났던 옛 시를 오랜만에 다시 읽어본다. 시인의 친일 반민족 행위에 대해서는 비판해 마땅하지만, 시 작품까지 도매금으로 내팽개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사슴'은 1938년에 발표했으니 시인이 본격적으로 일제에 부역한 1940년대보다 전이었다. '슬픈 모가지를 하고 / 먼 데 산을 바라본다'에서는 인간적인 연민마저 든다. 시인 역시 내적인 고독과 번민으로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이 신문사에 근무할 때 같이 있던 백석 시인을 흠모했다고 한다. 일종의 짝사랑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사슴'은 노천명 자신이 아니라 백석을 그린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시의 내용에 백석을 대치시켜도 그럴듯하다. 백석에게 사슴만큼 잘 어울리는 이미지도 없어 보인다. 백석의 첫 시집 제목도 <사슴>이었다. 백석의 마음을 얻지 못한 노천명은 설마 그래서 평생을 독신으로 산 것은 아니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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