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 바. 라. 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본문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나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기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난주에 대구 계산동에 있는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시인 고택을 찾았다. 시인이 말년을 보내다가 광복을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곳이다. 고졸한 한옥 마당에 이 시가 새겨진 시비가 있었다. 시비를 마주 보며 툇마루에 앉아 안타까운 마음쉼을 했다.
설명을 보면 이 시는 1926년 잡지 <개벽>에 실렸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독립을 염원하는 이런 저항시가 허용되었나 보다. 일제강점기 후반이라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으리라. 시에는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시인의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특히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시작하는 첫 문장이 강렬하다.
나의 일흔 번째 암송시로 정하고 외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암기하기가 쉽지 않다. 시가 길기도 하려니와 익숙히 않은 단어가 자주 나와 멈칫한다. 일주일은 걸릴 것 같다. 시인의 간절한 염원의 일단이나마 가 닿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다가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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