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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본느낌

늙은 소년의 아코디언

샌. 2026. 6. 1. 10:40

김열규 선생의 산문집이다. 1930년대인 선생의 유년 시절부터 1950년대 청년 시절까지의 회고록이기도 하다. 선생은 고성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부터 부산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책에는 선생이 경험한 부산의 옛이야기가 풍성하다. 장소는 달라도 따스하고 아련한 추억 속 고향은 누구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을 터다.

 

선생의 유소년기와 청년기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파란만장한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동심은 여전해서 옛 부산을 무대로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펼쳐진다. 그때를 묘사한 부산의 모습은 지금과 비교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같다. 부산 인구가 20만 정도였다니 중소도시 규모였으니 말이다. 선생은 엄청난 시대의 변화를 느긋하게 관조하듯 그 시절을 이야기한다.

 

80대가 되어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회고록이니 글에는 여유과 유머가 배어 있다. 행복했던 장면 중심으로 기억에 남아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나라를 빼앗겼어도 사람 사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린아이들이야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 빛나듯 고난의 시절이므로 더 반짝였는지도 모르겠다. 사람 살아가는 정과 재미는 그 시절이 오히려 더 달콤했던 것 같다. 내가 돌아보는 내 어린 시절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선생이 회고하는 그때는 낭만의 시대라 불릴 만하다.

 

6.25 전쟁 중에 선생은 대학생으로 부산에 있었다. 피난 온 대학들이 극장을 빌려 '전시 연합 대학'을 만들고 합동 강의를 했다. 뒤에 대학별로 분리하긴 했지만 선생이 재학한 서울 문리대는 구덕산 아래에 천막을 치고 운영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학사 일정이 계속되었다는 게 신기하다.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 따뜻한 날이다. 종교학 강의를 맡은 교수가 뒷산으로 가서 강의를 하자고 했다. 바람에 나풀대고 삐걱대는 천막 교실보다는 바깥이 나을 거라고 했다. 몇 안 되는 학생들이 비탈을 올라갔다. 비교적 평탄한 풀밭에 자리 잡고 앉았다. 가을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살이 따사로웠다. 멀리로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 풀밭은 소슬했다. 산새들의 울음이 잦아지는 것을 기다려서 교수는 강의를 시작하자도 했다. 우리들은 편하게 다리를 뻗고 앉아서 무릎에 노트를 펼치고 주의를 모았다. 종교학이 전공이라서 그랬을까? 교수는 우선 다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주여, 이 자리에서 강의를 하게 된 것이 기쁩니다. 햇살 눈부신 푸른 가을날의 초원에서 강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습니다. 주여, 감사드립니다."

교수는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는 십자를 그렸다. 이어 '아멘!' 소리가 은은했다. 신도가 아닌 학생까지도 무심코 '아멘!'을 읊었다. 산새의 드맑은 울음이 이에 화답했다."

 

글에서 묘사한 풍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사제지간의 인간적인 정과 믿음 속에서 얻는 지식이야말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가장 보잘 것 없는 교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눈 감으면 나에게도 이런 따스한 장면들이 있어 글로 써 보고 싶은 의욕이 생긴다. 허나 자판에 손가락을 올려놓으면 '동작 그만'을 하니 어쩌랴. <늙은 소년의 아코디언>을 선생이 80세 넘어 냈으니 나에게도 아직 기회가 남아 있는 셈이다. 앞으로 손가락이 더 굳지는 말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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