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 바. 라. 기.
오리 본문
지인들을 만날 때 서로간에 부르는 호칭이 애매하다. 젊었을 때처럼 이름으로 부르기도 뭣 하고, 적당한 호칭이 없으니 대개는 얼렁뚱땅 지나간다. 이래서 옛사람들이 호(號)를 짓고 허물없이 사용했나 보다.
필요할 것 같아서 나도 호를 생각한 적이 있었다. 몇 후보 중에서 마음에 들었던 게 '오리'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장난 삼아 지어본 건데 괜찮다고 생각했다. 한때 활발하게 활동했던 모임에서 내 닉네임이 '오리온(orion)'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밤하늘의 별자리 이름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별자리여서 그렇게 정했다. 그럼 호는 더 줄여서 '오리'라고 하면 되겠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뿐이다.
그러면 너무 경박해 보이니 '오리'에는 다른 뜻도 첨부할 수 있다. 첫째로, 거리를 나타내는 오리(五里)가 있다. 오리는 애매한 거리지만 친근한 거리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내 행동반경은 거의 오리 안팎이었다. 친구나 가까운 친척 집도 전부 그 범위 안에 있었다. 그 이상 멀어지면 낯선 동네가 되었다. 그러므로 오리는 편안하면서 좋은 이름이다.
둘째로, 오리(悟理)라고 쓸 수도 있다. 사전에는 없고 내가 만든 단어지만, 어쨌든 깨달을 오(悟)에 이치 리(理)다. 이치를 깨닫는다는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이만한 의미라면 나에게는 과분할 터이다.
셋째로, 일사오리(一死五利)라는 고사에서 나온 오리(五利)도 있다. 하나가 죽어서 다섯 가지를 이롭게 한다는,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것을 버린다는 좋은 의미다. 이 역시 내가 감당할 바는 못 되지만 명분이야 좋지 않은가.
넷째로, 실의 가닥을 세는 단위인 '올'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실이나 머릿카락을 한 올(오리) 두 올(오리)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오리에는 '작고 가는'이라는 느낌이 있다. 크고 긴 것보다는 작고 가는 게 내 취향과 맞다.
다섯째로, 오리온과 유사하게 오리지널(original)의 오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오리지널은 '본래의, 참신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세상이 혼탁해질수록 근본에 대한 그리움이 커진다. 나의 지향과 일치하는 말이다.
여섯째로,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오리과의 새인 오리다. 물에 떠다니는 오리는 귀여우면서 고요함과 평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오리과에는 종류가 많다. 고니류, 기러기류, 오리류 등 우리나라에만 45종이 있다. 오리류의 이름만 불러보자. 황오리, 흑부리오리, 원앙, 원앙사촌,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미국오리, 넓적부리, 쇠오리, 가창오리, 청머리오리, 발구지, 알락오리, 홍머리오리, 아메리카홍머리오리, 고방오리, 흰죽지, 붉은부리흰죽지, 미국흰죽지, 큰흰죽지, 붉은가슴흰죽지, 댕기흰죽지, 검은머리흰죽지, 검둥오리, 검둥오리사촌, 흰줄박이오리, 바다꿩, 흰뺨오리, 북방흰뺨오리, 비오리, 흰비오리, 바다비오리, 호사비오리 등.
나도 오리과의 새들을 좋아한다. 처음 새를 보러 따라다닐 때 접한 새가 오리였다. 같은 종이라도 암수에 따라 색깔이나 크기가 달라 구별하는 데 애를 먹었다. 지금도 도감이 없으면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오리를 보면 우선 반갑다. '아이들이 좋아하는[childlike]'이란 말에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보인다. 내가 되고 싶은 노인은 지혜로우면서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다. 오리를 보면서 'childlike'를 동시에 떠올린다.
이렇듯 '오리'에는 다중적인 의미가 숨어 있다. 내 호로 하기에 지나칠 정도다. 그러나 오리는 아직 내 마음속에서만 정해놓은 이름이다. 언젠가는 써먹을 때가 온다면 좋겠다. 누군가 나를 오리로 불러준다면 더없이 기쁘겠다. 지금은 "오리, 잘 지내고 있어?" 이런 목소리를 상상으로만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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