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 바. 라. 기.
읽을, 거리 본문
김민정 시인의 산문집이다. '김민정의 1월'이라는 부제에, 1월 1일부터 1월 31일까지 날짜별로 목차가 짜여 있다. 일기, 시, 에세이. 인터뷰 기사 등 마치 비빔밥 같이 여러 형식이 글이 섞여 있다. 이럴 거면 앞으로도 제목 걱정 없이 책을 펴낼 수 있을 것 같다.
책에 나오는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김화영 선생 인터뷰에 나오는 내용이다. 선생이 군대 군사학교에서 교사로 있을 때의 일화다. 문맹인 군인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는데 어느 병사의 아내한테서 편지가 왔다. 글을 읽지 못하는 그 병사는 편지를 가지고 와서 읽어달라고 했다. 선생이 전하는 사연은 이렇다.
"봉투 속에서 편지를 꺼냈더니 양면 괘지라고 하는, 줄이 죽죽 그어진 종이 위에 손바닥을 펴서 짚고는 각 손가락의 윤곽을 따라 연필을 손을 그린 그림이야. 마누라가 자기 손을 대고 그린 거야. 아직도 기억이 선명해. 그리고 그 밑에 쓰여 있어. '저의 손이어요. 만져주어요' 아, 얼마나 감동적이냐. 아내는 그리운 심정을 거의 동물적으로 표현한 거지. 애아버지 병사가 글을 깨쳐 드디어 내 도움 없이 편지를 읽던 날, 아내의 편지를 손에 펴들고 큰 소리로 울더라고."
다른 하나는 시인과 아버지와의 애틋하면서 격의 없는 따스한 관계다. 특히 아버지의 유머가 압권이다. 병중이지만 유머로 상황을 부드럽게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투병중에도 쓰는 어느 날의 일기다.
"오후에 민정이가 배를 마사지하는데 별안간 배가 풀려서 대변을 390그램 보았다. 민정이에게 미안했다. 수북한 배가 쑥 들어갔다. 비누로 항문을 스무 번 넘게 손으로 닦아줬다. 미안했는데 뜨거운 물로 씻어주니 솔직히 아주 시원했다. 아무개 내과 의사보다 더 의술이 좋았다. 아빠 똥을 해결해준 보약 같은 큰딸. 힘이 좋아서 손이 매워서 배를 누르는데 방귀가 줄줄 나왔다. 민정이가 정화조 냄새가 난다고 했다. 간호사 오기 전에 향수 뿌리라고 했더니 걔는 참 아끼는 게 없어 너무 팍팍 뿌렸다."
아버지의 병상 일기를 책으로 내면 히트칠 것 같다. 늙거나 아플수록 필요한 게 유머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화나 짜증 대신 유머 한 마디로 상황을 비틀어버리면 얼마나 상쾌한가. 이건 타고나야 한다. 마음의 여유에다 재치가 있어야 한다. 나는 애초에 유머와는 거리가 멀다. 가벼운 것도 진지하게 말한다. 그래서 위트나 유머 멘트를 쉽게 사람이 너무 부럽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다양하다. 가끔 타인의 말이 행동이 곱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나한테서 그런 경험은 주로 책을 통해서 한다. 뉴스에 나오는 험한 소식과 달리 세상에는 이쁜 사람들도 많다는 생각이 들면 행복하다.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지탱되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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