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 바. 라. 기.
책을 훔쳐가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서 좋은 말로 타이를 것 본문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가 문을 연 건 1981년이다. 서울의 중심지인 금싸라기 땅에 대형 서점이 들어선 사실은 문화적 자부심을 느끼는 일이었다. 40년도 훨씬 전, 처음 교보문고 매장에 들어갔을 때의 놀라움이 아직 생생하다. 서점을 운영하는 교보생명에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업 입장에서는 돈이 되는 데 투자하는 게 보통인데 반대의 길을 갔기 때문이다. 당시 신용호 회장이 "손해가 나더라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점이 서울 중심에 있어야 한다"라고 밀어붙였다고 한다.
교보문고를 운영하는 다섯 가지 원칙을 다시 본다. 모두가 사람을 존중하는 마인드에서 나온 지침이다.
1. 초등학생에게도 존댓말을 쓸 것.
2. 한 곳에 오래 서서 책을 읽더라도 그냥 둘 것.
3. 책을 이것저것 빼보기만 하고 사지 않더라도 눈총 주지 말 것.
4. 책을 노트에 베끼더라도 그냥 둘 것.
5. 책을 훔쳐가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서 좋은 말로 타이를 것.
이중에서도 '책을 훔쳐가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서 좋은 말로 타이를 것'이라는 다섯 번째 원칙에 눈이 오래 머문다. 아픈 추억이 떠올라서다. 국민학교 6학년에 다닐 때였다. 문제집을 사러 읍내 서점에 갔다가 서가에서 꼭 읽고 싶은 책을 하나 발견했다. 돈이 부족한데 어쩔까 망설이다가 그 책을 몰래 품에 감추고 계산대에 섰다. 어리숙한 아이의 행동을 서점 주인이 놓칠 리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경찰에 붙잡혀 가는 모습이 상상되자 견딜 수 없었다. 대성통곡을 했다.
다행히 서점 주인은 경찰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서점 밖 입구에 서서 한 시간 동안 손을 들고 서 있게 했다.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아는 이가 있을까 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부모님과 선생님 얼굴이 어른거리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서점 주인은 담임선생에게 연락을 하겠다며 무섭게 겁을 주었다.
지금 돌아봐도 왜 그런 탐심을 품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의 것을 훔친 것은 그때가 처음이며 유일했다. 서점 주인은 아이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그랬겠지만 심약한 아이에게는 너무 가혹했다. 잘 타이르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책을 주면서 값은 나중에 갚으라고 했다면 더 고마워했지 않았을까. 그래서 교보문고의 다섯 번째 원칙이 더욱 눈에 들어왔는지 모른다.
기업인 중에서도 존경할 만한 분은 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교보생명의 신용호 회장도 그런 분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이라는 목표로 교보생명을 세웠고, 돈은 보험으로 벌고 서점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말했다. 적자가 나더라도 원칙대로 서점을 운영해 나가라는 유지도 남겼다. 돈보다 사람 중심의 가치를 앞세우는 기업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코엑스에서 열린 '2026 서울국제도서전'이 그저께 막을 내렸다. 가 보려고 계획을 세웠다가 너무 인파가 몰려 대기줄이 엄청나다는 보도를 보고 생각을 돌렸다. 도서전에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몰리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독서 인구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통계를 보면 10년 전보다 10%포인트 줄었다. 그렇다면 도서전은 실제 독서와는 무관한 문화적 소비 행태의 하나란 말인가. 책보다 굿즈에 더 관심을 가지고 금방 품절되었다고 한다. 책은 남고 굿즈는 동나는 도서전은 무엇인가. 도서전은 흥하지만 출판사는 망하는 게 슬픈 현실이다.
서울에 살 때 시내에 나갈 적이면 책 살 일이 없어도 들린 곳이 교보문고였다. 약속 장소가 교보문고이기도 했다. 서점을 한 바퀴 돌기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이제는 일 년에 한 번이나 찾을 정도로 드물어졌다. 퇴직한 후에는 주로 도서관을 출입하고 책을 사더라도 인터넷을 이용한다. 언제 한 번 일부러라도 교보문고에 나갈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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