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 바. 라. 기.
아무것도 아니다 본문
미시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원자들의 아득한 이합집산이라는 운동 외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은 우주의 태초 이래 형성된 것들로 일시적으로 지금 내 몸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백 수십 억년 전에 만들어진 원자들이 잠시 이런 결합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때가 되면 다시 흩어질 것이다.
우리 앞을 살았던 선조들 몸속에 있었던 모든 원자들은 땅이나 대기, 다른 생명체의 성분이 되어 있다. 세종대왕의 몸속에 있던 원자가 현재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원자로 연결된 하나다. 인연이 되면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진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른 배열, 다른 패턴을 지을 뿐이다.
창 밖으로 소나무가 보인다. 소나무의 목질을 구성하는 탄소는 광합성 과정을 거쳐 대기 중에서 왔다. 결국 나무는 공기 덩어리인 셈이다. 나무와 공기는 다르지 않다. 불이(不二)인 것이다. 만약 나무가 불에 탄다면 탄소는 이산화탄소의 형태로 다시 대기로 돌아간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다. 원자적 관점에서 사람 몸속에 있는 탄소나 나무에 있는 탄소나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다. 둘이 나누어지지 않는다. 우주는 천변만화하는 원자들의 춤이라고 해야 할까.
동물의 의식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 역시 인연에 의해 생겨난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원자 운동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조직체의 해체와 더불어 의식도 소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종교의 가르침처럼 불멸하는 영혼이 있을까. 현재로서는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그냥 껍데기만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유물론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불교에서는 본무자성(本無自性)이라고 한다. 공(空) 개념을 이해하는데 이런 원자론적 관점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사물의 본질 개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본질의 부정과 같은 의미다.
또한 삶과 그에 따르는 온갖 애착을 멀리 하는데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개체 존재는 일시적으로 그러한 몸을 받았을 뿐이다. 인연이 다하면 흩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해가 뜨면 안개가 사라진다. 누구나 알 듯이 없어졌느냐면 그렇지 않다. 외부 여건 변화로 물 분자가 기화했을 뿐이다. 원자는 여전히 그대로다. 죽음 역시 소멸로만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무지로 인해 생기는 두려움에서 어느 정도의 해독제는 되지 않을까.
마음의 눈으로 원자 세계의 어지러운 춤을 구경한다. 거기에는 죽음도 없고 시간의 흐름도 없다. 무슨 연유에선지 시공간이 생기고, 시간이 단선적으로 흐르고, 어떤 변화는 소멸이라 이름 붙이며 괴로워한다. 인간의 의식은 분별(分別)과 애집(愛執)에 다름 아닌 것 같다. 해탈이거나 성불(成佛)한다는 것은 이런 우주의 춤에 동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손에 손 잡고 '아무것도 아님'의 댄싱을 추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우주는 너무나 신비하다. 사고도 없고 의지도 없는 단순하기 그지 없는 원자들의 운동에서 이처럼 다채로운 파노라마의 세계가 펼쳐지다니.
'참살이의꿈'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책을 훔쳐가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서 좋은 말로 타이를 것 (0) | 2026.06.30 |
|---|---|
| 분별망상 (0) | 2026.06.15 |
| 왜 일상을 전시하는가 (0) | 2026.05.16 |
| 시 60 (0) | 2026.04.20 |
|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 (0) | 2026.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