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851

낙관과 비관

친구가 몇 년 전에 베트남에서 근무했다. 그때 우리 사이에는 많은 메일이 오갔는데 메일함을 열어보니 그 당시 주고받았던 메일들 중에서 하나가 눈에 띈다. 친구와 나는 공통되는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많다.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친구는 낙관적이고 나는 비관적인 편이다. 친구는 세상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나는 비판적이다. 그런 면에서 가끔씩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어느 날 친구가 이런 메일을 보내왔다. 창 밖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문득 잠이 깬다. 커튼이 드리워진 창 위로 야자수잎의 그림자가 물결처럼 일렁거린다. "아. 오늘은 일요일이지" 그냥 누운채로 움직이지 않고 모처럼의 여유를 느껴본다. 「이곳이 어딜까? 물론 베트남이지.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모르지. 꿈일지도 ..

길위의단상 2004.06.18

힘들다! 너무나 힘들어!

오늘 아침에 만난 사진 한 장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한강 다리 난간 위에 '힘들다!! 너무나 힘들어!!'라는 낙서가 적혀 있는 사진이다. 저 글을 쓴 사람은 이 지상에 마지막 짧은 글 하나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까? 과연 무엇이 한 사람을 저토록 절망하도록 만들었을까? 절박했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저 사진을 보면안타깝기만 하다. 경제가 어려워지는 탓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투신을 방지하기 위해 이젠 경찰이 한강 다리를 순찰한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자살 증가율이 OECD 국가 중 최고라는 보도도 있었다.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뭘 하든 못 살까하며 그들을 질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람이 각양각색이듯 충격에 대한 반응의 정도도 사람마다 ..

길위의단상 2004.06.11

명함

한국에서 근무하던 인도인이 우리나라를 떠나면서 그 동안의 한국 생활에서 가장 난감했을 때가 명함을 가지지 않고 외출했을 때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말이 서툴러서 명함이 없으면 자기 소개가 잘 되지 않았다는 뜻인지, 아니면 명함으로 대표되는 지나친 한국 사회의외피 중심주의를 비판한 것인지는 잘 구분되지 않지만 아마도 후자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을 만나고,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명함인 모양이다. 어떨 때는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불쑥 명함을 내밀어서 이상할 때도 있다. 서로 초면의 인사를 나누면서 명함을 받기만 하고, 줄 명함을 갖고 있지 않거나 또는 없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거나 아니면 뭔가 모자라는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래도 예전보..

길위의단상 2004.06.01

한글은 싫다

5월초에 서울시에서 주관한 축제가 있었다. 시청 앞에 잔디 광장을 꾸미고 그곳을 중심으로 10여일간 시민 축제를 열었다. 그런데 그 축제의 이름이 'Hi Seoul Festival'이어서 지나치게 영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있었다. 사실 그 때의 포스터를 보면 온통 영어로 뒤범벅되어서 과하다 싶은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축제의 주제를 'RED'로 정하고 R은 Refreshing하는 식으로 행사의 의미를 설명해 놓아 외국인을 위한 행사같이 여겨졌기 때문이다. 'Hi Seoul' 대신에 '안녕 서울' 한다고 해서 시대에 뒤져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외국인들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리라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 서울시가 이번에는 시내 버스 노선을 개편하면서 버스를 4종류로 나누고 색깔로 구..

길위의단상 2004.05.21

아빠는 꽃처럼 살자고 했죠

나이가 들수록 동요의 노랫말이 가슴에 저며온다. 어릴 때부터 '파란마음 하얀마음'의 노랫말을 좋아했는데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정이 가는 건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더 동요가 주는 분위기에 젖어들게 되고 옛 동무를 만난 듯 반갑기만 하다. 가끔씩듣게 되는 다른 동요의 노랫말들도 어쩌면 그리 이쁜지 모르겠다. 옛날 노래 가사에는 인간의 순수한 그리움이나 정이 자연과 잘 조화되어 표현되고 있다. 며칠 전에 '파란마음 하얀 마음'의 노랫말을 지으신 어효선 선생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하니 옛날에 부르던 동요들이 다시금 생각난다. 그 분이 지은신 노래 중에서 널리 알려진 세 곡의 노랫말을 다시금 흥얼거려 본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

길위의단상 2004.05.18

사람들은 모두 불쌍해

한미르 커뮤니티에 김정란 님의 '현대시 읽기'라는 칼럼이 있다. 몇 번 게재되다가 지금은 글이 올라오지 않아 아쉬운데, 옛 글 중에서 공감이 가는 내용이 있어 옮겨 본다. 김정란 님은 언젠가 TV 프로에서 본 적이 있는데, 시인이 정치 토론 프로에 나온게 특이해서 유심히 지켜 보았다. 보수쪽 공격에 대해 차분하게 대응하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현실에 비판적이면서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따스한 연민의 눈이 느껴졌는데 이 글에서도 비슷한 것을 읽을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불쌍해! 나도 불쌍하고, 너도 불쌍하고, 우리 부모님도 불쌍하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불쌍하다.' 나에게도 그런 느낌이 가끔식 찾아와 가슴이 아려지는 요즈음이다. 누구든 자기 한 몸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지요. 조금씩 그 고통을 가볍게 만들기..

길위의단상 2004.05.11

제비가 오지 않는 땅

제비꽃은 피었는데 제비는 오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제비를 못 본지가 몇 년이 된 것 같다. 옛날이었으면 아마 지금쯤 강남에서 찾아온 제비들이 논밭 위를 날렵하게 날아다니고 마당의 빨래줄 위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지배배 지저귀는 소리가 시작될 때이다. 시골에서 자란 중년의 연배라면 제비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사실 제비는 참새나 까치보다도 더 우리와 친근한 새였다. 그것은 사람과 동거하는 습성 때문인지 모른다. 아니면 흥부전을 통해서 은혜 갚는 새로 우리 머리에 새겨져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제비는 시골 초가집의 서까래와 벽 사이에 집을 지었다. 대부분의 새들이 사람을 두려워하건만 제비는 사람 집에 일부러 찾아들어 온다. 그런데 하필 집 짓는 곳이 사람들이 들고나는 문 위일 경우..

길위의단상 2004.05.03

길 떠난 사람들

우리는 모두 길 위의 사람들이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이젠 잊어버린 고향 집을 떠나 와서 어딘가로 가고 있는 나그네들이고 순례자들이다. 내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인가? 길 위에 올라섰으니 무작정 걷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무언가의 꿈을 쫓아 아니면 신기루에 희망을 걸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는어느 길 모퉁이에서 남은 여정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헤어진 신발에 다리를 절뚝이며 자꾸만 뒤쳐지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런데 여기, 생명평화를 위한 탁발순례의 길에 나선 분들이 있다. 지난 3월에 지리산을 출발하여 3년 계획으로 전국을 순례하며 생명평화의 기운을 일으키려는 도법과 수경, 두 분의 스님이시다. 그리고 이분들 뜻에 동참하는 여러 사람들도 동행하..

길위의단상 2004.04.23

선거 이틀 전

총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선거 분위기가 전에 비해 차분해진 것 같다. 신문이나 TV를 통해서만 선거일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생활에서 체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평소 정치에 무관심하던 사람도 정치 얘기 한 두 마디는 거들 정도는 되었다. 역시 선거는 바람을 잘 타야하는 건지 무슨 풍, 무슨 풍에 민심이 왔다갔다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한 때는 구태의연한 썩은 정치판에 실망한 국민들에게 이대로는 안 된다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도 했다. 특히 탄핵 사태의 충격이 그런 바람에 불을 지펴서 그 열기는 전국을 휩쓸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고개를 드는 지역주의 앞에서 촛불의 빛도, 변화의 바람도 슬그머니 사그라지는 느낌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국민의 의식 수준을 넘을 수 없다..

길위의단상 2004.04.13

산다는게 뭔지

"산다는게 뭔지....." 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에 나갔을 때 이 말을 늘 입에 달고 사는 분이 계셨다.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언제나 넋두리 비슷한 독백으로 말하곤 했다. 그 어투가 특이하고 재미있어서 모두들 그 말을 들으면 빙긋이 웃었다. 그래서 그 분의 별명이 곧 `산다는게 뭔지`였다. 똑 같은 말을 계속 들으면 식상하기도 하련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듣는 소리인데도 그 분의 독백에는 어떤 울림이 있었다. 그것은 경박하지 않은 진지한 그 분의 태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말을 할 때 그 분의 주름진 얼굴에는쓸쓸함이랄까 우울함이랄까 뭔지 모를 묘한 분위기가 번져 나왔다. 그말에 누구도 결코 농담으로 대꾸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의 독백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는 철학적 질문같기..

길위의단상 2004.04.01

살다 보면

살다 보면 맑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흐린 날이 더 많다. 바람 불고 비 내리고 어느 때는 폭풍우를 만나기도 한다. 우산도 준비하지 않아 궂은 비를 흠뻑 맞기도 한다. 인생길이 탄탄대로이지는 않다. 도리어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 자갈길일 경우가 많다. 어느 때는 튀어 나온 돌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정갱이에서는 피가 날지도 모른다. 앞에 가로놓인 벽이 너무 단단하고 높아서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인생살이가 어찌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랴마는 그래도 이건 아닌데 하며 운명이 야속해질 때가 있다. 겉으로 보이는 세상은 분명 불평등이다. 어느 하루살이는 맑은 날 이 세상에 나와 창공을 마음껏 날아다니며 제 몫을 다하지만, 어느 하루살이는 장마철에 이 세상에 나와 비에 젖은 날개는 찢어지고 무너져 ..

길위의단상 2004.03.21

바쁘고 힘들다

바쁘고 힘들다. 하루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일과를 끝내고 나면 지쳐 녹초가 된다. 잠시나마 블로그에 들러 보기도 어렵다. 익숙했던 생활부터의 결별이 이렇게 힘드는구나. 정말 인생에는 공짜가 없는 것 같다. 그동안 너무 편하게 지냈지. 그 편한 날들의 보상을 하라고 이렇게 힘들고 무거운 업무를 맡겨주는가 보다. 어느 분의 말을 신문에서 보았다. `인생의 길엔 과 이 있다. 가기 위한 길엔 목표가 있지만 걷기 위한 길엔 목표가 없다. 나는 한번도 목표를 정하고 살지 않았다. 산보하듯 걷기만 했고, 매 순간 충실했을 뿐이다. 남들이 원하는 영예의 자리는 정말 부산물에 불과하다.` 산보하듯 걸었고, 매 순간 충실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이 무척 부럽다. 범인들이야 생각은 있어도 그런 마음자리..

길위의단상 2004.03.04

원판 불변의 법칙

첫 직장에서 같이 근무했던 분을 25년 만에 처음 만났다. 이런 만남에서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이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는 건 별로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물론 그간의 세월 흔적은 얼굴과 몸에 눈에 띄게 드러나 있었다. 머리는 이미 반백이 넘어섰고 이마와 목에는 겹쳐진 주름살이 그 동안에 흘러간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말투나 웃는 모습, 또 그 뒤에 숨어있는 그 분의 성품이나 분위기는 25년 전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똑 같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대화를 계속하다보면 다음 말이 어떻게 나올지도 정확하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 분이 세상을 보는 눈이나 가치관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가끔씩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옛 학교 동창들에서도 늘 똑 같은 사실을..

길위의단상 2004.02.25

莊子의 행복론

莊子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옆의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그건 패자(敗者)의 철학이야." 그리고 부연 설명을 했다. 사회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이 정신적으로 위안을 찾는 도피처일 뿐이라고. 사실이 그러하든 아니든 莊子는 내가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시절 나를 구원해준 책이었다. 아직도 수박 겉핥기식 莊子 읽기에 그치고 있고,莊子가 담고 있는 거대한 지혜의 스케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멍해지지만그래도 지금껏 莊子는 내 삶을 지탱해주는 큰 기둥이 되고 있다. 莊子 철학의 특징은 현세 너머를 가리키는 초월성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신비적 경향이 가미된 종교적 색채를 띄기도 한다. 중국의 토양에서 자라난 사상으로는 독특하지 않나 싶다. 莊子는사회적 관습에 따라 생활하고, 아무 비판없이 세속의 전제 조건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길위의단상 2004.02.20

미친 세상

시장을 지나가는데 두 사람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솔직히 우리나라에서 검은 돈 안 먹은 놈이 어디 있냐?" "나는 안 먹었다. 왜?" "넌 임마 능력이 없어서 그런 거야." 요사이는 9시 뉴스를 보기가 겁이 난다. 그런데 안 봐야지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TV 앞에 앉게 된다. 하긴 언제 편하게 뉴스를 볼 때가 없었지. 무슨 대규모 스포츠 행사나 하면서 국민들 넋을 뻬놓고 열광시키기 전에는.... 어제는 일부러 MBC 뉴스를 보면서 보도 제목들을 적어 보았다. 삼성이 한나라에 준 불법 자금 170억 추가 확인 -- 불법 대선자금 청문회 -- 인간 배아 줄기세포 배양 성공 -- 땅 투기자 7만명 적발 -- 한국인 해외서 잇단 실종 -- 손자를 버린 비정한 할머니 -- 외출이 불안하다 -- 돈 뺏으러 살인 ..

길위의단상 2004.02.13

도시락의 추억

지난 설날에 가족들이 모였을 때 홍천의 작은 중학교에 다니는 조카에게서 산골 학교 이야기를 들었다. 작은 학교라 그런지아이들과 선생님이 가족같이 지내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졌다. 여러가지아기자기한풍경 중에서 겨울이면 교실 난로에 도시락을 데워 먹는다는 얘기가 있었다. 아직 이런 분위기의 학교가 있다는게 신기했고,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몇 년 전부터는 학교 급식이 시작되었으니 이젠 도시락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도시락 세대라고 할 정도로 도시락은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중년의 세대에게 도시락은 단순한 밥 그릇이 아니라 가족의 정이 담긴 따스하고 소중한 기억으로 누구에게나 남아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난과 배고픔으로도 연결될 것이다. 나의 경우도 ..

길위의단상 2004.02.07

사랑의 찬가

하늘에서 한 천사가 추방되어 지상에 내려온다. 그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알아내야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 그 후 구두장이인 세몬의 집에서 6년을 지내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리고 마지막에 잘 자란 쌍둥이 자매를보고나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쌍둥이 자매가 갓 태어났을 때 천사는 산모의 영혼을 거둬오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았는데 산모의 불쌍한 처지를 보고그만명령을 어기게 된 것이었다. 결국 산모의 영혼을 빼앗았지만 그는 추방되었다. 그런데 부모없이도 이웃의 사랑에 의해 잘 자란 쌍둥이를 보고 천사는 사람이 무엇으로 살아가는지를 확신하게 된다. 모든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일을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속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신을 걱정함으로써 ..

길위의단상 2004.02.01

행복한 사람

설을 지내면서 가장 많이 주고받은 인사말은 아마 `건강하세요`와 `복 많이 받으세요`였을 것이다. 세배를 다니면서 윗 어른들에게는 주로 건강을 묻게 된다. 시골 어르신들 대부분이 몸에 질병 한 두 가지는 달고 사시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복잡하고 오염된 환경과 정신적 스트레스가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지만, 농촌에서는 과도한 육체적 노동이 몸을 망가뜨리는 주범이 되고 있다. 현실은 도시나 농촌 모두 건강의 조건인 조화로운 삶에서 일탈되어 있다. 서로 건강을 기원하지만 사실 삶의 패턴을 바꾸지 않는 한 건강한 삶으로 가는 길은 멀어 보인다. 현대 사회의 특징이 병 주고 약 주는 사회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건강은 최고의 관심사가 될 것이고, 의료 산업은 번창할 것이다. 그래서 머리 좋은 학생..

길위의단상 2004.01.24

[펌] 신문 칼럼

한겨레신문(1/12)에 실린 칼럼 두 편을 옮깁니다. 다시는 아이가 되지 말렴 / 오수연(소설가) 어른이 되면 아이가 아니다. 아이가 아니어도 괜찮아서 나는 나이든게 다행스럽다. 어린 시절 나는 죄수였다.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였다.)에 입학하는 날, 어머니는 아기로만 알았던 막내가 또래들 중 키가 큰 편이라서 놀랐다. 나는 키 순서에 따라 뒷줄에 서서 ‘앞으로 나란히’를 수십 번 하고, 구령에 맞춰 교실로 들어가, 마찬가지로 뒷줄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너무나 긴 세월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어린이들의 지력과 체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 45분의 수업이 15분의 휴식 시간을 두고 반복되었다. 받아쓰기가 거의 전부였던 수업 내용이야 둘째치고, 수업 시간 동안 우리는 짝을 건드려도, 창 밖..

길위의단상 2004.01.13

헤일-밥 혜성

1986년에 핼리혜성이 찾아왔다. 워낙유명세를 타는 혜성이라 기대를 잔뜩 모았는데 실제로는 실망만 주고 떠나갔다. 밝기가 이름값을 못했던 것이다. 그때 연세대 천문대에서 주관한 관측 행사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맨눈으로는 보일락 말락 하던 혜성이 망원경 파인더 안에서는 온 시야를 다 덮으며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의 감동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쌍안경과 망원경을 가지고 별을 보러 다녔다. 토성을 찾아 그 고리를 확인했을 때의 환희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별 사진도 관심이 생겨 주로 일주운동을 찍기도 했다. 1997년에는 헤일-밥 혜성이 찾아왔다. 맨눈으로도 하늘에 걸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던 큰 혜성이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며 우주의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 당..

길위의단상 2004.01.08

[펌] 신문 칼럼

한겨레신문 신년호에 실린 칼럼 두 편을 옮깁니다. 경제종교 / 황대권(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 오늘 아침 신문을 들추다가 열두 살 어린 아이가 천만 원을 모았다는 책을 선전하는 광고를 보고 가슴이 덜컥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어른들의 광포한 돈 놀음이 아이들의 영혼까지 갉아먹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다가올 미래가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도대체 아이가 천만원씩이나 모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단돈 만원에도 신의를 밥 먹듯 저버리는 세상 인심을 모르고 이런 일을 기획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아주 어릴 때부터 돈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겠지. 아직 읽어보지도 않고 책에 대해 긴 얘기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충격적인 광고카피만으로도 ..

길위의단상 2004.01.03

할아버지, 여긴 여자 화장실인데요

시간의 흐름은 연속적이다. 분명히 내 육체도 연속적으로 늙어갈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평상시에는 잘 의식하지 못한다. `마음은 청춘`이라는 말대로 마음이 몸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세월의 흐름을 알아채게 된다.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감지하고 불현듯 놀란다. 어떤 때는 옆의 사람을 통해서 내 나이를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주름진 얼굴에서, 또는 훌쩍 큰 조카가 갑자기 나타났을 때에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음을 느낀다. 또 아내의 돋보기 쓴 모습이나 하나 둘씩 늘어나는 흰 머리칼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이때는 마음까지 아리다.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럴 때는 무척 어색하다. 내 나이가 얼만데, 도대체 외모가 어떻게 보이..

길위의단상 2003.12.15

오래된 미래

어제 서강대에서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의 저자인 호지 여사의 강연이 있었다. 500석의 좌석이 다 차고 일부는 서서 강연을들을 정도의 성황이었다. 그러나 내용은좀 아쉬웠다. 그분의 생생한 삶의 체험을 듣고 싶었는데,현대 문명의 부작용과 대처 방안에 대한 개론적인 설명만 있었다. 아마도 유명세에 따른 기대 탓인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미래`가 우리나라에서만 30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그리고 청중들의 열성도 대단했다. 약 3/4 정도는 여성이었다. 어린 아이를 안고 온 아주머니도 있었고여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의 진지한 표정이 도리어 감동적이었다. 역사를 주도한 것이 지금까지는 가부장적 문화의 남성 중심이었지만 그 부정적 측면이 현대에 들어와서파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는 역사의 ..

길위의단상 2003.12.11

한가한 오후

한가한 오후 시간이다. 창 밖의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덮여 있다. 금새라도 비가 내릴듯 하다. 하늘은 연한 잿빛 도화지같다. 긴 붓에 무지개빛 물감을 묻혀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고 즐거워 할 그런 그림이면 좋겠다. 텅 빈하늘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타서 마신다. 찻잔의 온기가 따스하다. 달콤한 향이 오늘따라 특히 고맙다. 근 한 달 가까이 술과 커피를 멀리 했다. 속이 아파서 식사도조심하며 지냈다. 가끔씩 속이 그렇게 심술을 부린다. 오랜만에 맛보는 커피 향이 그래서 고맙고 향기롭다. 사실 산다는게 별 것아니지 싶다. 인간이 뭐 대단한 것 같아도 내적 만족이나 행복은 거창한 데서 오지 않는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 반짝이는 보석은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곳에 숨어있는지 모..

길위의단상 2003.12.05

침묵의 달

12월의 첫 날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이 달을 `침묵의 달`로 불렀다고 한다. 12월로 시작되는 겨울은 침묵의 계절이면서 휴식의 계절이다. 쉼없이 일하던 자연도 잠시 숨을 고르는 계절이다. 무수한 잎들을 대지에 돌려주고 나무는 고독한 철학자의 모습으로 이 겨울을 맞는다. 뭇 생명들도 분주하던 삶을 멈추고 안식의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점점 차가와지는 날씨에 사람들도 몸을 움츠리며 따스한 방과 가정의 품으로 모여든다. 겨울은 바쁜 삶 속에 묻혀 보지 못하던, 듣지 못하던, 망각하고 있던 것들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절이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들이 오히려 소중하고 귀한 것임을 알게도 된다. 어둠과 침묵의 가치가 다시 되살아 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소리와 너무 많은 이론들에 노출되어 있었음을 알게..

길위의단상 2003.12.01

슬프게 하는 것들

일전에 테헤란로를 지나게 되었다. 서울에 살면서도 가보지 않은 거리가 많다. 테헤란로를 지상으로 지나가게 된 것도 처음이었다. 길 양편으로 솟은 빌딩들, 깔끔한 거리 모습이 선진국의 도시에 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만큼 잘 살게 되었다는 뿌듯함도 있었지만 왠지 주눅도 들었다. 같은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설명을 해 주었다. 저건 무슨 빌딩이고, 저게 그 유명한 ○○○이라고 했다. 이때 같이 있던 한 사람이 무심결에 "에라, 확 무너졌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다들 에이 하면서 핀잔을 주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마음 속에도 그런 감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 무서웠다. 그만큼 빈부격차의 문제는 심각하다. 전체적 평균은 나아지고 있을지라도 이런 상대적 소외감이 우리 모두를 아프게 하고 있다. ..

길위의단상 2003.11.25

절망하는 농심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다. 그저께는 농민들의 시위가 있었다. 급기야 도심에서의 폭력으로까지 이어졌다. 작년의 농민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현장의 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다.그 때 접한 농민들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한이 가득차 있었다. 대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한 젊은 농민은 울고 있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다. TV로 보는 전경과의 충돌은 농민들의 속마음이나 울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우리 사회가 가는 길이 어디인지 심각하게 자문해 볼 때가 아닌가 한다. 그것은 농민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 그리고 이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쪽의 공통된 정서는 박탈감이다. 빛 좋은 개살구식 경제 성장의 이면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길위의단상 2003.11.21

새벽 전화벨 소리

새벽에 전화벨 소리가 잠을 깨운다. 방안은 온통 깜깜한데 가슴이 철렁한다. 수화기를 드니 고향에 계신 어머님이시다. 이젠 심장이 방망이질친다. ".....무슨 일이세요?" "응, 별 일 없나... 다음 주말에 전부 모여서 김장 하기로 했으니까 그 때 내려 온나..." 아이구..... 그렇다고 이 꼭두새벽에 전화를 하시다니..... 새벽 전화벨 소리는 너무 무섭다. 고향에는 96세 되신 외할머니가 계신다. 몇 년 전부터는 치매 증상이 나타나서 함께 계시는 어머니가 무척 고생하신다. 금방 한 말도 잊어버려서 외할머니 옆에 있으면 똑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한다. 우습기도 하지만 짜증이 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이제 그만 돌아가셨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임종 소식이 올까 봐 늘 불안하다. 외할머..

길위의단상 2003.11.20

산이 아프면 우리도 아프다

새벽첫차를타고내려오신어머님께서 그만가자. 이젠그만가자 다그만두고 이제,그만가자하신다. 단식서른여덟날 천성산 고속철도 관통을 반대하는 지율 스님 단식이 오늘로 41일째입니다. 천성산은 경남 양산에 있는 산세는 크지 않으나 수려한 경관으로 경남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산입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설화도 있는 이 산에는 고산 습지와 함께 희귀식물과 동물들의 보고라고 합니다. 지금 정부는 이 산을 관통하는 고속철도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오직 개발과 편리와 경제성의 논리만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미미한 꽃과 동물일지라도 함께 공존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산이 아프면 우리가 아프고, 우리의 다음 세대가 그 고통을 짊어집니다. 출세간의 자식을 찾아온 어머니의 모습..

길위의단상 2003.11.13

친구가 견진 받는 날

오늘은 친구가 견진을 받는 날이다. 이 친구와는 시골 중학교를 같이 다녔다. 그런데 서로 가까와진 건 서울에 있는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었다. 당시 4명이 올라 왔는데 이 친구와는 1학년 때 같은 반에 배정되었다. 60년대 말, 모두가 어려운 때였다. 시골 학생들은 대부분 셋방을 얻어 자취 생활을 했다. 친구도 형들과 함께 산동네 좁은 방에서 어렵게 지냈다. 그래도 우리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한 친구는 도시락을 싸오지 못할 정도로 곤궁했다. 어떤 때는 셋방에서 쫒겨나독서실서 살기도 했다. 그런 힘든 환경에서도 모두들 공부는 열심히 했다. 그리고 웃음을 잃지도 않았다. 아마도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그 때에 가장 꽃 피지 않았는가 싶다. 친구는 법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사시에 도전했으나 계속 ..

길위의단상 2003.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