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851

세상이 무섭다

등 뒤에 한 무리 중학생 아이들이 따라온다. 구급차 한 대가 사이렌 소리 요란하게 스치며 지나간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말 한 마디가 온 몸에 소름을 돋게 한다. “또 하나 디졌다.” 옆의 아이들이 따라서 킥킥대며 웃는다. ‘디졌다’ 또는 ‘뒈졌다’는 죽는 대상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인데 짐승이나 미물에게라도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하물며 사람에게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세상이 너무 살벌해지고 있다. 특히 아이들의 언어 표현은 지나치게 폭력적이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잠시만 있어보면 옆에 있기가 민망할 정도인 경우가 많다. 저 아이들에게 뭐라고 설교를 해야 할까?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고? 생명을 사랑하고, 다른 생명의 아픔에는 같이 연민을 느껴야 한다고? 우리나라가 얼마나 아름..

길위의단상 2005.03.22

대장부

지난번에 살던 동네의 연세가 들었던 이웃 아주머니 한 분은 자신의 남편을 늘 장부라고 불렀다. 집안 얘기를 할 때면 “우리 집 장부가.......” 하는 식으로 말을 시작했다. 그 말이 익숙하지 않아서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장부(丈夫)란 뜻이 다 자란 건강한 남자라는 의미 외에도 남편을 부르는 호칭으로도 쓰일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도 왠지 어색했는데 그것은 장부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어떤 호탕하고 소위 남자다운 이미지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만난 남편의 모습이 왜소하고 부드러워서 장부라는 호칭과의 거리감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장부가 그러한데 대장부(大丈夫)의 이미지에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영웅호걸쯤 되어야 불릴 수 있을 것 같은 선입견이 있다. 그것은 남자라면 한때 가슴을 울렁거리..

길위의단상 2005.03.15

[펌] 폭력 냄새나는 말들

전원마을, 푸른마을, 강변마을… 아파트 단지 이름들은 대부분 예쁘다. 그런데 그 이름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이름으로 얼마나 커다란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전원마을은 전원을, 푸른마을은 푸름을, 강변마을은 강변의 풍경을 해치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해안도로를 지나며 만나는 간판들도 마찬가지다. 노을횟집은 노을을, 갯벌민박은 갯벌을, 등대편의점은 등대를 가리고 있다. 풍경에 폭력을 가하면서 그 폭력성을 내세우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간판의 폭력성은 자연과 맞닿아 있는 곳에서 더 확연히 드러나지만 도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도회지의 간판들은 폭력성을 넘어 잔인함까지 드러낸다. 생 오리 철판구이, 돼지 애기보, 새싹 비빔밥, 뼈 발린 닭… 같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잔..

길위의단상 2005.03.04

반추동물 장내발효 개선 연구

지난 16일에는 우여곡절 끝에 지구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교토의정서가 공식 발효되었다. 교토의정서 발효는 지구 환경 위기에 대응하는 전지구적인 최초의 환경운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선진국들은 2012년까지 1990년의 배출량 기준으로 평균 5.2%의 온실가스(이산화탄소, 메탄, 아산화질소 등)를 감축해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세계 1위의 온실가스 배출 국가인 미국은 이 협약의 비준을 거부하고 있다. 겉으로는 개발도상국가들이 제외된데 대한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자국 산업의 보호를 위해서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만한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아마도 2003년부터는 이 협약의 감축 대상에 포함될 것 같다. 현재도 우리나라는 세계 9위의 에너지 소비국이고, 온실가스 배출량이나 또는..

길위의단상 2005.02.22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늘에 계신' 하지 마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지 마라, 아들딸로서 살지도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마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마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마라,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마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 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길위의단상 2005.02.06

불 지피기

오늘이 올 겨울에서 가장 추웠다고 한다. 서울 지방은 -12도까지 떨어졌고, 낮에도 -7도로 무척 추었다. 매일 보이던 길거리의 노점상들도 오늘은 철시했다. 모두들 춥다고 하니까 예전에 읽었던 ‘불 지피기’라는 단편소설이 생각난다. 알래스카의 설원을 여행하는 사람이 갑자기 찾아온 영하 100도 가까이 되는 혹한과 만난다. 일행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는 수십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데 가는 도중에 결국은 죽음을 맞는다는 내용이다. 영하 100도의 추위는 어떤 것일까? 소설에서 주인공이 침을 뱉으면 땅에 닿기도 전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얼어버린다는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공기마저 얼어붙어 사위가 고요한데 온기를 가진 한 생명체에서 나온 액체가 순간에 얼어버리는 소리를 상상해 보며 몸을 떨었었다. 만약 오줌을 눈..

길위의단상 2005.02.01

지율 스님

지율 스님의 소식이 안타깝다. 80여일의 단식 중에 홀연히 잠적해서 가까운 사람들도 그 행방을 모른다고 한다. 지난 번 법원 판결 이후 스님이 내건 조건도 많이 완화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정부 측에서는 '법대로'를 외치며 무시해버리는 듯해서 더욱 우울하다. 스님의 단식에 대해 일부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천성산이라는 지역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스님이 말하는 대로 인간과 자연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자는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 같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보아야 할 아무런 근거도 없고 또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생존할 수도 없다. 그런데 현대 문명과 인간이 가진 힘은 이제 자연을 이용하는 정도를 넘어 자연을 훼손하고 뭇 생명을 파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젠 그런 예를..

길위의단상 2005.01.23

소의 전설

'작은 것이 아름답다' 1월호에서 옛 생각이 나게 하는 글 한 편을 만났다. 상주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는 오덕훈 님이 소에 관하여 쓴 '소의 전설'이라는 글이다. 40대 이상으로 농촌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에 얽힌 추억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농기계가 보급되지 전의 농촌에서는 힘든 일에는 반드시 소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어지간한 집이라면 집집마다 일소가 있었고, 가족처럼 대접받았다. 우리 집에서는 덩치가 큰 황소를 길렀다. 많은 논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성질도 사나워 그 소를 부릴 수 있는사람은 우리 집 일을 주로 도와주던 손씨라는 사람 외에는 없었다. 그때는 온순한 암소를 기르는 집이 무척 부러웠다. 우리 소를 몰고 소띳기로 가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는 한 번도 주어지지..

길위의단상 2005.01.13

쓰나미의 수수께끼

지난 연말에 남부 아시아 해안을 휩쓴 지진해일로 20만 명 가까운 인명이 희생되었다. 앞으로 사망자가 더 확인되면 그 피해가 얼마나 될지 예측하기 힘들 정도의 대재앙이었다. 지진해일의 공식 명칭은 ‘쓰나미’(津波, Tsunami)라고 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쓰나미의 무풍지대였기 때문에 이 용어에 생소한데, 쓰나미의 설명을 보면 여러 가지로 특이한 점이 많고 잘 이해되지 않는 면도 있다. 첫째, 쓰나미는 전파 속도가 무척 빠르다. 일반적으로 파동의 속도는 매질의 관성적 성질과 탄성적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쓰나미의 경우, 속도를 결정하는 것은 바다 깊이라고 한다. 그래서 바다 깊이가 1000m 정도 되는 해저에서 지진이 일어나 쓰나미가 생겼다면 그 속도는 시속 350km나 된다는 것이다. 만약 바..

길위의단상 2005.01.03

산타클로스의 물리학

산타클로스의 하룻밤 여행을 물리적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전 세계에서 산타클로스의 고객이 되는 어린이는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를 믿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지 않는 어린이를 제외하면 대략 4억 명 정도이다. 한 가정에 2.5명의 어린이가 있다고 볼 때 아마도 산타클로스는 지구에 있는 약 1억 6천만 가정을 방문해야 될 것이다. 산타클로스에게 주어진 시간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하룻밤뿐이라고 할 때, 지구 자전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선물을 나누어줄 경우 약 31시간 정도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31시간 동안에 1억 6천만 가구를 방문하려면 1초에 1434가구를 방문해야 한다. 다시 말해 0.0007초 만에 지붕에다 썰매를 주차시키고, 굴뚝을 통해 집으로 들어가 선물을 놓고, 다시 나와 다른 집으로 이..

길위의단상 2004.12.24

나그네로 살고 싶다

나그네는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나그네는 소유하지 않는다. 그의 짐은 작고, 발걸음은 가볍다. 나그네는 길 위의 사람이다. 길에서 만나는 모든 존재를 사랑한다. 나그네는 겸손하고 너그럽다. 그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다. 나그네는 조심스럽다. 그의 언행은 얇은 얼음판을 건너는 사람처럼 조심스럽다. 나그네는 순례자다. 그의 걸음은 삶의 의미로 차있다. 나그네로 살고 싶다. 누구나 주인이 되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나그네의 마음으로 살고 싶다. 인류가 유목 생활을 떠나 땅에 정착하면서, 땅에다 금을 긋고 자기 소유물을 축적하면서 지금의 문화가 태어났다. 지금 우리가 건설해 놓은 사회는 이해관계와 경쟁과 투쟁으로 얽혀있다. 거기서는 모두가 서로에게..

길위의단상 2004.12.21

부모는 파업중

아침 신문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실렸다. 미국의 중년 부부가 말 안 듣는 자녀들 때문에 파업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자녀들의 나쁜 행실을 고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써 보다가 되지 않자, 최후의 수단으로 집안 일 보이콧 파업을 벌인다는 것이다. 얼마나 말썽을 부렸으면 이럴까 공감이 되기도 하고, 그러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마음이 씁쓰레하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모가 자신의 10대 자녀들의 게으름을 뜯어고치겠다고 집에서 나와 파업을 벌이는 사상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시드니 모닝 헤랄드 인터넷판에 따르면 미국 캘리포니아주 엔터프라이즈에 살고 있는 전업주부 캐트 버나드(45)와 공무원인 할란 버나드(56) 부부는 자신들의 두 자녀 벤자민(17)과 키트(12)가 집안일에 너무나 비협조적으로 ..

길위의단상 2004.12.10

휴대폰이 없다고?

"휴대폰이 없다고?" 연말이 되어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가끔 듣게 되는 반문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마치 괴짜를 만난 듯한 표정을 짓는다. 현재 국내의 휴대폰 가입자 수가 3600만 명에 달해서 전 국민의 휴대폰 보유 시대가 되었는데 아직 휴대폰이 없다는 것은 의아하게 생각될 만도 할 것이다. 그런데 왜 휴대폰이 없는지에 대한 답을 하려니 궁해질 수밖에 없다. 휴대폰 사용에 부담을 느낄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다고 말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뭔가 사연이 있는 대답을 바라는 것 같은데, 사실 휴대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 다른 이유는 없다. 워낙 대인 관계가 좁다보니 그 물건이 필요하지 않을 뿐이다. 한 때는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TV나 신문, 컴퓨터 등을 멀리 하기도..

길위의단상 2004.12.06

[펌] 당신들은 예수의 친구가 아니다

나는 예수쟁이이다. 왜 “크리스찬”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정 이런 식의 약간은 자기비하적인 용어를 사용하는지 헤아려주었으면 좋겠다. 한국 기독교는 너무나 가진 자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는 생각, 따라서 진실로 예수라고 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지독한 주변인이었던 기독교의 창시자의 정신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졌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주변성을 자기 정체성 안에 통합해 넣는 용어를 일부러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를 비천한 자리에 가져다 놓을 줄 모르는 자는 크리스찬이 아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스스로의 결단에 의거하여 자신을 옭죄던 봉건성을 기독교라는 각성의 형식으로 극복했던 1세대 기독교도의 아들이다. 내 아버지는 대한민국 최대의 교회 중 하나인 영락교회를 창건하신 열 분 장로님 중..

길위의단상 2004.11.29

모든 것은 지나간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현상계(現象界)는 무상(無常)의 세계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이 말만큼 우리 우주의 실상을 적절히 표현한 말도 없을 것이다. 우주는 변화하는 세계다. 삼라만상은 한 자리에 머무는 것이 없다. 사실 과학자들이 하는 일이란 사물의 변화 원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알고 있는 원리마저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생성, 변화, 소멸을 되풀이하는 것이 물질계만은 아니다. 머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온갖 생각들을 관찰해 보면 명멸하는 변화에 넋이 나갈 정도이다. 작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너무나 많은 변화를 겪는다. 기쁨이 지나가면 슬픔이 찾아오고, 희열 뒤에는 고통이 따른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던 절망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져간다. 불시에 찾아온 화(禍)가 어느새 복(福)으로 변하기..

길위의단상 2004.11.19

학교 폐쇄? 다 받아주어라!

세상이 어수선하다. 세상을 진단하는 사람들의 소리에는 날이 서있다. 모두들 나라를 걱정하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일텐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고 서로를 불신하며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오늘 아침 신문에 가톨릭계 원로라 할 수 있는 J 신부의 강연 내용이 실렸다. 노 정권의 정책 방향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중에서 사립학교법 개정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종교는 순교(殉敎)의 정신이 있기 때문에 사립학교법 개정에 대해서 끝까지 반항할 것이다." "이 법의 개정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국회의원은 하느님 앞에서 신자 자격이 없다." 정권을 비판하거나 특정 법의 개정에 대해서 찬성, 반대의 의견을 표시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신자 자격 운..

길위의단상 2004.11.10

메멘토모리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합시다!) 유럽의 어느 수도원에서 수도사들 사이에 주고받는 일상적인 인사말이라고한다. 매 순간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가자는 마음다짐이 이 인사말 속에는 들어있다. 사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면서 결정적 문제인 이 죽음만큼 무시되고 경원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애써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다. 이웃의 죽음에 슬퍼 하지만 가까운 가족이 아닌 경우 그 효과가 며칠 가지도 않는다. 그리고는 다시 천년 만년 살 듯이 일상을 살아간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죽음만큼 우리 존재를 뒤흔들어놓을 사건도 없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는 거대한 블랙홀이다. 죽음은 이 세상과의 영원한 이별이며 모든 인연의 끈을 끊어버리는 가위이다. 저 세상 너머의 일을 알 수 없는 한 ..

길위의단상 2004.10.28

그 소리가 그립다

가을걷이로 한창 바쁜 농촌이지만 마을 안은 조용하다. 벼 수확 작업이 대부분 기계의 힘으로 다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벼를 베는 일에서부터 탈곡하고 나르는 작업이 밖에서 다 이루어진다. 집으로 들어오는 벼는 없고 직접 건조장이나 도로 위로 옮겨진다. 예전에 이 무렵에는 온 동네가 북적거렸다. 모든 일이 오직 사람의 노동력만으로 이루어졌다. 낫으로 벤 벼를 논에서 말린 다음 지게나 달구지를 이용해서 볏단을 집으로 옮겼다. 딸랑 딸랑 목에 달린 종을 울리며 쉼 없이 벼를 실어 나르던 우리 집 황소가 기억난다. 저녁이 되면 볏가래를 쌓는다. 등불을 여기 저기 켜놓고 마치 탑이 쌓아지듯 하늘로 올라간다. 볏가래는 가운데가 볼록한 항아리 모양으로 생겼다. 높이가 점점 올라갈수록 밑에서 볏단을 던져주는 일꾼들의 숨소..

길위의단상 2004.10.15

선택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두 길을 동시에 걸을 수 없는 만큼 삶의 순간마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쇼핑을 하면서 어느 물건을 고를 것인가에 대한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삶의 줄기를 바꾸어놓을 만한 중요한 고비의 선택도 있다. 영화 '선택'에서처럼 특히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의 선택은 한 사람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극단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개인의 사상을 문제 삼아 평생을 감옥에 가둬두고 전향의 고문과 압박을 가한 것이 어제까지 우리나라의 현실이었다. 물론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의 기준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사게 될 때 자신의 안전이나 편의성, 또는 사회적 신분의 상징에 우선 가치를 둘 경우 크고 비싼 차에 마음을 앗길 것이고, 지구 환경이나 에너지 차원에 가치..

길위의단상 2004.10.08

"날씨가 참 좋지요?" 오늘은 이런 인사를 많이 주고받았다. 시리다는 표현이 이와 같은 것일까, 서울에 나타난 가을 하늘이 유난히 맑고도 푸르다. 너무 파래서 저 하늘에는 서러움이 가득 묻어있는 것만 같다. 파란 색은 세상의 모든 슬픔과 외로움과 쓸쓸함이 모여 하늘로 올라가 만든 색깔이 아닌가 싶다. 한자로 가을[秋]과 마음[心]을 합하면 쓸쓸할 수[愁]가 된다. 가을의 모든 풍경 속에는 쓸쓸함이 배어있다. 그러나 가을이라는 계절은 쓸쓸함마저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런 날은 한 일주일쯤 휴가를 받아 낯선 길로 떠나고 싶다. 작은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들길과 산길을 따라 마냥 걷고만 싶다. 가을 여행은 혼자서 떠나는 것이 어울린다. 여름의 번잡스러움을 지나서 가을은 홀로 스스로에게 향하는 계절이다..

길위의단상 2004.10.05

고요히 쉬기

길 아닌 길을 가면 마음도 몸도 고단하기 마련 쉬시기를 길이어도 쉬고 길 아니라도 쉬시기를 - from 이철수 님 판화 나이가 들수록 세상살이는 갈수록 힘들고 바람도 자꾸 거세집니다. 그래도 길은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一切唯心造. 힘들수록 더 자주 마음을 챙기고 살아야 겠지요. 이 세상에서 저 그림처럼 가장 편한 자세로 마음을 쉬게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흐르는 물에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하지만 움직이는 씨는 싹을 틔우지 못하는 법입니다, 오늘 하루도 얼마나 고요한 쉼에 머물렀는지요?

길위의단상 2004.09.24

블로그 1년

블로그를 시작한지 꼭 1년이 되었다. 작년 이맘때가 나에게는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세상일은 연속해서 꼬여가기만 하고 앞길에도 희망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나를 지탱해 주던 믿음이나 신념마저 밑바닥에서부터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만난 일종의 도피처가 블로그였다. 원래는 홈페이지를 하나 갖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보고 인터넷으로 강의를 들으며 홈페이지를 만드는 준비를 했는데 진도가 나갈수록 내 능력에는 벅차게만 느껴졌다. 그러던 차에 어쩌다 블로그에 들어가 보고 그 간편성에 끌리게 되었고 역시 우연하게 접하게 된 한미르 블로그의 조용한 분위기와 단순한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 이곳에 가입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독백의 공간이었다. 블로그는 나에게 있어..

길위의단상 2004.09.13

한 장의 사진(1)

앨범을 보는데 재미있는 사진 한 장이 눈에 띈다. 바로 이 사진인데 40년 전에 찍은 우리 가족사진이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막내의 돌 기념으로 사진관에 가서 찍은 것이다. 오른쪽에 잔뜩 심술궂은 얼굴로 내가 서 있고, 옆에 어머니가 막내를 안고 있다. 이때 어머니가 30대 중반쯤 되었으니 우리 어머니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가 싶게 젊은 모습이다. 그 옆에 계신 분은 외할머니이신데 이제 백수를 바라보시며 생존해 계신다. 앞에는 어린 동생들이 머리 모양으로 봐서는 잔뜩 멋을 내고 서 있다. 왼쪽의 까까머리는 둘째 동생이다. 이 사진이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사진에 찍힌 부끄러운 내 모습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데 나만은 눈을 밑으로 내리깔고 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

길위의단상 2004.09.07

극단 '여의도'

70년대 후반에 있었던 일이다.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선배 한 분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전날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타고 귀가했는데 집에 들어오지를 않은 것이다. 인품이 워낙 중후하고 동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신 분이라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염려했다. 주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엉뚱한 일을 저지를 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찰에 가출 신고를 하고 직원들이 가족과 함께 이리저리 찾아다녔지만 도대체 행적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나갔을 때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는 연락이 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유가 궁금했지만 이상하게도 모두들 입을 닫으며 말하기를 조심스러워했다. 선배님 집에서도 찾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상한 분위기가 며칠 지나고 나서야 대체적인 진상을 알..

길위의단상 2004.08.30

[펌] 행복의 차이

# 1 아논드는 꿈 많은 여덟살. 가난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방글라데시의 소년. 아논드는 방글라데시어로 '희망'이란 뜻이란다. 가진 것은 없어도 두 눈에 가득 찬 푸른 하늘에 티 없는 마음을 싣고 훨훨 날 줄 아는 녀석이다. 공책과 연필도 없는 거적때기 위 수업시간 '단어'로 문장을 만들라는 선생님 말씀에 "단어야, 너는 발도 없는데 어쩜 그렇게 많은 사람 만나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니." 읊조리는 녀석이다. # 2 서울의 K는 벌써 대입 고민에 빠진 여덟살. '팰리스'에 살지만 세상에서 제일 고달프다는 대한민국의 소년. K는 부모님이 "부자 돼라"며 어느 재벌 이름 따 지어주신 것이란다. PDA와 전자사전이 갖춰진 에어컨 빵빵한 학원에서 "사슴이ООО 봅니다"에 알맞은 단어를 채워 넣으라는 선생..

길위의단상 2004.08.23

아름다운 노년

'우리의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 중에서 신과 가장 가까운 단계에 있는 사람은 노인들이다. 나이가 든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늙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어두운 계곡으로 내려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세계로 차츰 접근해 가는 것, 즉 지복(至福)의 산(山) 정상으로 올라가는 완만한 길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느 보험 회사의 광고였던가, 노부부가 건강한 모습으로 환하게 웃는 광고 사진을 보면서 저렇게 늙어갈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또한 그것이 젊은 시절에 상상했던 내 노년의 모습이기도 했다. 생활은 안정되고, 여유 있는 시간을 즐기며 자유롭고 넓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이었는데 혼돈의 젊은 시절 뒤에는 그런 평화스런 노년이 찾아오리..

길위의단상 2004.08.20

징기스칸

조선일보가 '징기스칸'이라는 새 잡지를 만드는가 보다. 무슨 잡지를 만들든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그 잡지의 창간호 광고를 보니 영 꺼림찍한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다. 굵직한 글씨로 내세운 취지가 '천재에게 감사하는 잡지, 1등의 철학을 나눠 갖는 잡지, 성공한 사람이 큰 소리 치는 잡지'라 되어 있다. 조선일보의 엘리트주의, 1등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문구인데 성공한 사람들이 앞으로 또 얼마나 더 큰 소리를 쳐야그들은 만족하게 되는지 솔직히 겁이 난다. 잡지 이름을 '징기스칸'이라고 정한 것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징기스칸은 인류 역사상 가장 생산성이 높은 지도자였습니다. 13세기 초 몽골 인구는 약 100만 명, 징기스칸은 여기서 약 15만 명의 기마군단을 징집하여 고려에서 지금의 헝가리까지 정..

길위의단상 2004.08.14

지구촌 전염병, 우울증

이번 달 초 뉴스위크 한국판에 우울증에 대한 특집이 실렸다. 표지에는 지구가 우울증으로 찡그린 얼굴을 한 그림과 함께 '지구촌 전염병, 우울증'이란 제목이 달렸다. 선진국 국민의 10%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제 우울증은 선, 후진국 가리지 않고 확산되어 모든 나라에서 심각하게 나타나는 전 지구적 질병이 되었다는 것이다. 공동체 분화, 도덕적 확신의 붕괴, 국제 미디어에 대한 노출 증가 등의 사회적 변화로 오지의 빈곤층까지 우울증이 퍼져서 세계 전체로 볼 때 인간의 활동 능력을 앗아가는 제일 큰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 현대 문명이 인간에 가하는 스트레스와 우울증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어 보인다. 국민 소득은 높아지고 잘 살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인간의 욕망은 커지..

길위의단상 2004.07.26

Blue days

장마와 함께 찾아온 손님이 떠날 줄을 모른다. 떠나기는커녕 이젠 안방까지 차지하고서는 주인 노릇을 한다. 이 손님이 주는 선물은 무기력과 권태와 절망이다. 가을만 되면 이 손님이 찾아와서 마음은 열병을 앓았다. 그런데 올해는 장맛비 소리에 이 손님의 잠이 일찍 깨었나보다. 우울증이라고 불러야 하나? 세상은 잿빛으로 변하고, 모든 것이 돌아앉았다. 몸과 마음의 에너지는 고갈되고, 세상살이는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서걱거린다. 밤에는 악몽에 시달리고, 낮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귀찮기만 하다. 깃털 같은 것의 무게가 천근 만근 무겁게 느껴진다. 어쩌다 사람을 만나도 대화는 겉돌기만 한다. 이럴 때는......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저 몸을 낮추고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임을 안다. 이 손님과..

길위의단상 2004.07.08

소음인

지난 주에 한의사로부터 진맥과 문진을 통해 체질 감별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오랫동안 상담하던데 내 차례가 되어서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아 소음인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이제마와 사상의학, 그리고 사람을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이라는 4가지 체질로 나누어 병의 예방과 치료에 이용한다는 사실은 가끔 들었지만 크게 관심은 두지 않았다. 개인의 육체적이나 정신적 특징은 양 극단으로부터 연속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리라고 믿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 사이에 어떤 경계를 두어 그룹으로 나눈다는 것 자체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분명 그룹 사이에 존재하는 모호한 성질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사가 설명하며 건네준 유인물에 적힌 소음인의 특성을 보고는 내 자신과 일치하는 부분이 ..

길위의단상 2004.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