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851

저항권포기죄

'오마이뉴스'에 초등학교를 정년 퇴임하신 어느 분의 이야기가 실렸다. 이 분의 소신있는 생각과 삶이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촌지를 받아 처먹었으니 뇌물수수죄요. 내 고향 광주가 전두환 일당에게 칼질 당할 때 멀리서 보고만 있었으니 군부 학살행위 방조죄요…" 지난 8월말 초등학교 평교사로 정년퇴임한 노형근(64·전 안산성포초등학교 교사)씨는 교육인적자원부가 수여하는 녹조근정훈장을 받을 자격이 됐지만 거부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죄인이 무슨 포상이랍니까?" 그가 훈장을 거부한 이유다. 최근 12·12 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과 관련, 유죄판결을 받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81명 전원에 대해 훈·포장을 치탈하는 작업이 본격 추진되고 있다..

길위의단상 2005.11.16

짝사랑과 엑스레이

대학교 때 내가 짝사랑한 여학생이 있었다. 다른 과의 여학생이었는데 일주일에 몇 시간은 공통과목 강의를 같이 받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가까이서 얘기 한 번 나누어볼 기회는 없었다. 어떤 계기로 그녀가 눈에 들어오고 끌리게 되었는지는 너무 오래 되어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어느 순간 사랑의 화살을 맞았다는 것이고, 그 화살이 그녀가 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별로 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나는 늘 강의실 뒤쪽에 앉았는데 어느 날부터는 강의실 앞문으로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항상 앞 줄 가운데에 앉았는데 긴 생머리의 뒷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했다. 몇 달 동안은 자나 깨나 눈에 아른거리며 상대를 못 잊는 사랑의 병을 앓았다. 불면의 밤이 나를 괴롭..

길위의단상 2005.11.10

한 장의 사진(3)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발령받은 학교가 K여중이었다. 당시에는 대학 4년 동안의 성적순으로 발령을 냈는데 성적이 좋지 않았던 나는 정식교사로 발령을 받지 못하고 우선 임시교사로 이 학교에 근무하게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기간제교사였던 셈이다. 그해 12월에 다른 학교로 정식 발령을 받았으니까 여기서는 약 6개월 정도 근무했었던 것 같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첫 직장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기억에 남는 학교이다. 부임하던 첫 날 교무회의 시간에 선생님들께 인사하던 내 모습이 선연히 떠오르는데 어느덧 벌써 30년이 흘렀다. 돌아보면 그때와 지금과의 거리가 한 호흡 간격만큼이나 짧게 느껴진다. 그때 내 자리는 시청각실이었다. 선배 선생님 한 분과 같이 있었는데 시청각기자재를 선생님들께 빌려주고 관리하는 일..

길위의단상 2005.11.05

세월이 빠르다

한 해의 끝이 다가오니 시간은 어지러울 정도로 빨리 흘러간다. 아름다운 계절, 가을이 어느덧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함께 하는 시간이 짧아서 아쉽다. 우리들 인생도 분명 그러할 것이다. 놀이터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 모습이 어제의 나인데 벌써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 인생의 나이도 가을이 되면 시간축의 기울기가 훨씬 가팔라진다. 한 해를 지나는 것이 한 달처럼 짧게 느껴진다.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 어린 시절 뛰어놀던 봄꿈이 아직 깨지도 않았는데 뜰 앞의 오동잎이 이미 가을소리를 전하는구나 주희(朱熹)의 권학문(勸學文)에 나오는 끝 구절이 입술에서 저절로 흘러나온다. 봄날 뜰에서 놀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벌써 가을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쓸쓸함이 지금의 내 심정..

길위의단상 2005.10.27

[펌] 세 이야기

구속 수사 이후 (도종환) 그 해 유월, 여름 햇살처럼 여론도 따갑게 끓어오르던 날 나는 교무실에서 성적표를 쓰고 있다가 다섯 명의 건장한 경찰들에 의해 끌려가 구속되었다. 벌레가 기어다니는 마룻장 날바닥에 앉아 밥을 먹었고, 변이 직접 내려다보이는 변기통 위에 앉아 하루 세 번 식기를 닦았으며, 사회적 이름을 빼앗긴 채 가슴에는 수인번호 376번이 달려 있었다. 검찰에 불려갈 때마다 거미줄에 날개를 묶인 곤충처럼 포승줄로 결박당하였다. 검찰 조사를 받는 시간보다 조사를 받기 위해 아침부터 하루 종일 결박당해 있는 것이 더 힘들었다. 반말로 이름을 부르고 내 시집 제목을 거론하며 비웃어대고 내가 무슨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특정집단의 사주를 받은 것처럼 몰아부칠 때면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길위의단상 2005.10.20

한국인의 가치관

어제 중앙일보에는 한국인의 가치관을 조사한 결과가 실렸다. 특히 물질주의적 가치관과 탈물질주의적 가치관 중 어느 쪽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은지를 조사하고 다른 나라의 결과와 비교한 것이다. 여기서 물질주의란 나라의 정책을 부국강병에 둬야 한다는 경제 우선주의적 태도를 말하고, 탈물질주의란 경제보다는 인간적 가치, 환경 등 탈인습적이며 문화주의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태도이다. 조사 결과는 응답자의 37%가 물질주의자로, 6%가 탈물질주의자로, 나머지 57%가 혼합주의자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이 결과는 비교 대상이 된 국가 중 중국 다음으로 물질주의자의 비율이 높은 것이었다. 특히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는 거의 3 배 정도의 비율로 물질주의자들이 많았다. 스웨덴은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속한 사람이 6%밖에..

길위의단상 2005.10.15

식인(食人)의 교육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아버지는 말하셨지 그것을 가져라” 요즘 뜨고 있다는 광고에 나오는 노래 가사이다. 비행기 안에서 젊은 여자들의 시중을 받으며 희희낙락하고 있는 한 젊은이가 나오는 무슨 카드 광고인데 내가 가진 선입견인지는 모르지만 가진 자들의 이기적이고 향락적인 풍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부추기는 것 같아 TV로 이 광고를 볼 때마다 영 떨떠름하다. 전에 유행했던 “부자 되세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느꼈던 거북스러움이 여기서도 느껴진다.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똑 같은 세상을 보더라도 천양지차가 난다. 지금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모양새나 지향하는 방향,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대해서 심각하게 문제 제기를 할 수도 있고, 잘 나가는 사회의 역동성의 한 측면이라고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길위의단상 2005.10.10

재산세 6만원

어느 날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이번 가을에 나온 부동산에 관한 재산세가 화제가 되었다. 대부분이 오른 재산세 때문에 현 정권과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여과없이 털어놓았다. 세금이 올랐지만 우리 사회가 공평하게 나아가는 방향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열 명중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각자 나온 재산세가 얼마나 되는지 묻기 시작했다. 제일 적은 사람이 10만 원대였고 대개는 20에서 40만 원대였다. 몇 사람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웃음으로 넘겼고, 제일 많은 사람은 100만 원 가까이 되었다. 거기에 모인 동료들의 나이는 대부분 4, 50대였다. 그런데 나에게 나온 재산세는 이번에 6만원이었다. 물론 거기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적은 액수였다. 나이 50이 넘어서 재산세를 고작..

길위의단상 2005.10.04

블로그 2년

오늘로 블로그를 시작한지 2년이 되었다. 블로그란 ‘웹(Web)에 쓰는 개인 일기’라는 정의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런 의미라면 나는 블로그의 충실한 고객인 셈이다. 전부터 일기를 써오던 습관 그대로가 일기장에서 블로그로 바뀐 채 계속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로그는 고립적인 기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한 네트워크 역할이 더 큰 것 같다. 거기에는 정보의 공유, 상호 대화 같은 커뮤니케이션 기능이 중요시되는데 그런 의미라면 나는 아직 자격 미달이다. 글쓰기 외에 다른 기능을 활용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블로그에 들어가서 글을 읽어보고 코멘트를 남기고 할 여유가 아직은 없다. 컴퓨터를 켜고 블로그에 연결하는 것이 일상이 되긴 했지만 사실 내 글만 써 넣는데도 동작이 느려서 ..

길위의단상 2005.09.12

사는게 그런 거지

형제간의 우애도 어릴 적 얘기인가 보다. 철 없던 시절에는 같이 웃고, 뒹굴고 싸우고, 그러다가 금방 화해하고 세상에 둘도 없이 가까운 사이였지만 크고 나면 어떤 때는 남보다도 못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서로간에 너무 기대가 커서일까,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고 상처를 준다. 특히 형제간에는 돈 문제로 틀어지는 경우가 많다. 돈 한 푼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형제의 정은 헌신짝처럼 버려지기 일쑤다. 웬수가 되는 것이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이 있듯고이 키워놓아도 다 크고 나면 잘 난 것은 제 탓, 못 난 것은 부모 탓이다. 그래도 부모-자식 사이의 핏줄은 어짜할 수 없다고 아무리 애물단지지만 그래도 내 자식이 아파하랴 부모는 늘 노심초사다. 우리 집안만 그럴까 하고 심각하게 ..

길위의단상 2005.09.05

별난 급훈들

지난 달이었던가, 서울대 총장이라는 분이 교육의 중요한 기능이 학생을 솎아내는 것이라고 해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닐지 몰라도 자유경쟁을 내세우는 대표적 엘리트주의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마치 날 선 칼처럼 으스스하게 느껴졌었다. 교육이 솎아내는 기능이 있을지언정 그것은 부차적으로 언급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곧잘 교육을 농사에 비유하는데 농작물을 가꿔본 사람이라면 농사짓기란 솎아내는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을 북돋워주며 함께 키워가는 과정임을 안다. 도리어 연약한 쪽에 더 신경을 써서 물 한 모금이라도 더 주며 골고루 자라게 도와주는 것이다. 현재 인문계 고등학교는 성적지상주의가 활개치는 무한경쟁의 터다. 소위 '좋은 학교'란 유명 대학에 학생을 많이 진학시키는 학교이다...

길위의단상 2005.08.29

8월 장마

올 여름은 8월인데도 유난히 비가잦다. 장마였던 7월과 별로 구별이 되지 않아 이젠 7, 8월을 장마기간으로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예전의 8월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날이 주로 계속되었는데 몇 년 전부터인가는 그런 특징이 사라져 버렸다. 지난 주에는 거의 한 주일 내내 흐리고 비만 내렸다. 겨울의 3한4온 현상이 흐릿해져 버린 것과 비숫한 경향이 아닌가 싶다. 통계적으로는 어떤지 모르지만 감각적으로 느끼는 기후는 확실히 옛날과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비가 내리는 모습도 세상을 닮아선지 영 종잡을 수가 없다. 그걸 게릴라성 집중호우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하늘마저화가 잔뜩 나있는지 여기저기 물벼락을 쏟아붓기 일쑤다. 가끔씩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요사이는 비가 내렸다 하면 늘 그렇다. 며칠..

길위의단상 2005.08.20

도로 위의 청개구리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청개구리 한 마리가 앞 유리창에 나타나서 깜짝 놀랐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차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네 다리를 유리에 바짝 붙이고 납작 엎드려 있는 모양이 너무 애처로웠다. 순간 이놈을 어떻게 살려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속도를 늦춰서 빨리 갓길로 가야 되는데 고속도로상에서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을수도 없고 어떡 할까 망설이는 동안에 개구리는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 버렸다. 아마 도로에 떨어져 뒤에 오는 차들 바퀴에 깔려버렸을 상상을 하니 마음이 무척 아팠다. 빨리 결단을 못내리고 우물쭈물하다가 한 생명을 애꿎게 죽여버린 것 같아 아직껏 자책이 된다. 그런데 이 청개구리가 어떻게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나타난 것일까? 추측컨대 터에서 시원한 그늘을 찾느라 차 밑으로 들어왔..

길위의단상 2005.08.01

기대하지 마

당신, 사람에 대해서 너무 기대하지 마! “사람이 어쩜 그렇게 매너가 없어?” “그 사람에게 실망했어.” 이런 말이 자주 나오는 건 그 사람에 대해 당신이 품고 있었던 기대와 환상 때문이야. 그 사람은 여전히 그 사람인데 말이야. 화를 내는 것은 그 사람이라는 대상만 빌려왔을 뿐 사실은 당신 자신에 대해 화를 내는 거야. 그러니 사람에 대해 불평하는 책임은 당신에게도 있어. 어떤 객관적 실재가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사람은 각자 자신의 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거야. 그러니 이 세상에는 사람 수 만큼의 세계가 있는 셈이지. 그 세계는 서로 겹치며 얽혀있지.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를 진실이고 전부인 양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어. 그리고 자신의 세계 안에 안주할 때 편안함을 느끼는 거지. 내 세계와 다른 세계가..

길위의단상 2005.07.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작은 사람들의 총탄에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생각을 하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이것은 인도의 마더 데레사 본부 벽에 걸려 있는 글이라고 한다. 아마 헌신적으로 봉사를 하는 그곳 사람들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기 위한 글인 것 같다. 나는 ..

길위의단상 2005.07.15

행복에 관한 단상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 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헤르만 헤세의 시처럼 행복은 인간 삶의 으뜸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결국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이 현실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도 미래의 행복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만약 그런 희망이 없다면 삶은 끔찍하게 잔인할 것이다. 그런데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하게 되기 위한 객관적 조건이 있는 것인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행복만큼 주관적이며 추상적인 것도 없는 것 같다. 객관적으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하면,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불행에 젖어있는 사람도 있다. 행복은 단순한 자기만족 같기도 하고, 좀더 깊고 ..

길위의단상 2005.07.13

못 살아도 돼

늘 서울과 터 사이를 오가는 생활에서 가끔씩 멀리 나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항상 가슴 아프게 느끼는 것이 우리 산하가 너무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딜 가나 산을 자르고, 땅을 파헤치고, 무언가를 세우고 하는 토목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데 그 당위성은 둘째 치고 자연이 너무나 처참하게 훼손되고 있는 모습은 슬픔을 넘어 분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개의 경우 무지막지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박정희 시대 때부터 개발 바람이 불었지만 최근의 노 정권 들어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진 것 같다. 신도사만 있는 줄 알았더니 행정도시, 혁신도시, 기업도시, 복합도시 등 마치 온 나라의 도시화 작업이 시작되는 것 같다. 특히 지자체가 본궤도에 오르면서 이젠 지역마다 경쟁적으로 돈 되는 일을 유치하지 못해서..

길위의단상 2005.07.11

인디언 이름

‘자연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런데 한 종족이나 민족 전체가 자연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는 더욱 희귀할 것이다. 그래서 아메리칸 인디언들이야 말로 특이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을 소개한 책을 읽어 보면 인디언들은 생래적으로 자연주의자이며 생태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적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나는 부족의 어른과 함께 산길을 가다가 지팡이가 필요해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꺾었다. 새로운 지팡이를 들고 자랑스럽게 걷고 있는 나를 보고 부족의 어른은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그것을 손에 넣었는가고 물었다. 나무에게 허락을 구했는가? 꼭 필요한 만큼만 잘랐는가? 나무에게 선물을 바쳐 감사의 표시를 했는가? 내가 그냥 나뭇가지를 잘..

길위의단상 2005.06.23

내가 바라는 세상

나는 우리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되기보다는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자랑하기보다는 좀 못 살더라도 계층간의 격차가 줄어들고 서로 도와주고 아껴주는 정신적으로 풍요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이(利)를 쫓기보다는 의(義)를 먼저 구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몇 년째 그칠 줄 모르는 부동산 광풍을 보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의식 수준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지 한심스럽기만 하다. 모두가 돈 앞에서는 천박하고 저열해지는 것 같다. 돈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마찬가지다. 국민대부분이 투기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일말의 수치심이나 양심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의식주는생활의 기본일진대 이것은 인간으로서 침해받을 수 없는 권리이다. 제발 다른 사람의 몫을 뺏아 자..

길위의단상 2005.06.18

[펌] 돌밭에서 줄기세포를 생각하다

차일피일하다간 모종 심을 시기를 놓칠 것 같아서 재래시장에서 고구마와 고추 모종을 구했다. 마사토의 표면을 띠고 있었으나 밭에 손을 대는 순간, 땅 속에는 엄청난 돌이 박혀 있었다. 각오한 일이지만, 벌써 땡볕에 사흘째 엎드려 돌을 골라내도 끝이 안 보인다. 큰 돌은 작은 돌들을 뿌리처럼 거느리고 있었다. 이런 돌밭에서 곡괭이질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호미로 먼저 잔돌을 골라낸 뒤, 곡괭이질을 해야 큰 돌이 마지못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을 캐면서 최근 유례없는 감탄과 칭송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국보급 과학자’ 황우석 교수 생각이 났다. 왜 그가 떠올랐을까. 내색을 자제했지만 영 심기가 불편했나 보다. 혹은 그쪽 세계와 돌을 골라내고 고구마와 고추를 심으려는 내 돌밭의 현실과의 현격한 차이 때문이었을 것..

길위의단상 2005.06.11

비관적으로 바라보기

악마가 말했다. “자식이 있는 자는 자식 때문에 기뻐하고, 소가 있는 자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인간이 집착하는 것은 기쁨이다. 집착할 것이 없는 자는 기뻐할 일이 없다.” 붓다가 대답했다. “자식이 있는 자는 자식 때문에 근심하고, 소가 있는 자는 소로 인해 근심한다. 실로 인간의 근심은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데서 생겨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자는 근심할 일도 없다.” 같은 대상을 두고도 바라보는 관점은 서로 다르다.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악마는 소유물을 기뻐했지만, 붓다는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부정했다. 낙관적 세계관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며 우리 사회는 그런 가치관을 지향하도록 가르친다.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정신병자 보듯이 하기도 ..

길위의단상 2005.05.27

철새는 날아가고

‘천수만 지역 주민들이 관광단지 개발에 반대하는 평화적 시위를 했다. 정부는 이 지역에 복합레저단지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어제 발표를 했기 때문이다. 농민이 대부분인 주민들은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는 것도 거부하고 철새 도래지인 이곳을 지키기 위해 나선 것이다. 돈 보다는 환경이, 자연과의 공존이 더욱 중요함을 농민들은 보여 주었다.’ 이것은 머리 속으로 상상해 본 신문 기사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이다. 천수만 지역 주민들이 철새들을 내쫓는다고 갈대밭에 불을 지르고 폭죽을 터뜨리는 충격적인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환경부에서 세계적인 철새 도래지인 이곳을 '생태자연도 1등급 지역'으로 지정할 계획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경우 모든 개발이 금지되기 때문에 관광도시와 웰빙특구를 추진 중인 천수만..

길위의단상 2005.05.21

한 장의 사진(2)

이 사진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9년 가을, 학교 운동장에서 찍은 것이다. 당시 내가 다닌 학교는 인문계 고등학교였지만 가을 운동회는 거창하게 치렀다. 아마 그 때 포크댄스가 유행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그 해 운동회 때는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포크댄스 경연을 했다. 뻣뻣한 남학생들이 포크댄스를 배우느라고 오후 수업을 빼먹으면서까지 연습에 몰두했다. 처음 접해보는 부드러운 리듬과 몸동작을 따라가지 못해 연신 웃음보를 터뜨리던 기억도 난다. 옆에 있는 여학교에서 파트너를 초대하자고 학교 측에 건의를 했지만 결국은 우리들 절반이 여장을 하고 대회를 열었다. 키 작고 곱상하게 생긴 아이들이 여자 파트너 역을 맡았다. 나는 친구의 누나 옷을 빌려서 입었는데 진짜 여자 같다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이 사..

길위의단상 2005.05.14

비 오는 날의 공상

봄비가 내린다. 어제 저녁에 시작된 비가 밤새 내리더니 오늘 낮까지 이어진다. 지금은 이슬비로 변해서 멀리 보이는 도시의 풍경이 안개에 잠긴 듯 희뿌옇다. 며칠간 계속되던 더위가 도망을 가 버렸다. 또한 농촌에는 고마운 단비가 될 것이다. 밭에 심은 모종들이 건조한 태양의 열기를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이제 생기를 되찾을 것이다. 봄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공상에 잠긴다. 이런 날은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서 한적한 바닷가에 가고 싶다. 그리고 인적 드문 해안가를 쓸쓸히 걷고 싶다. 옆에는 사랑하는 그녀가 있다. 말이 없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 반가운 사람이다. 바닷가 작은 카페에서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면 마음까지 따스해질 것이다. 넓은 유리창으로는 빗줄기가 사선을 그으며 낙..

길위의단상 2005.05.06

두 스님의 대화

천성산을 지키기 위한 긴 기간의 단식을 마치고 이제 활동을 재개한 지율스님이 대원사로 도법스님을 찾아가 만났다고 한다. 도법스님은 생명평화를 위한 탁발 순례을 하고 있는 중이다. 두 분간에 나눈 대화가 마침 인터넷 신문에 실려서 일부를 옮겨 본다. 기자들이 간접적으로 전하는 기사보다는 이 대화를 통해두 분의 생각과 느낌이 진솔하게 다가온다. 고뇌하고 흔들리는 솔직한 모습도 보인다. 대화 중에서 지율스님이 말씀하신 동화와 전설이 사라진 시민운동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바가 크다. 특히 환경운동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생명에 대한 영혼의 떨림이 없는 환경운동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환경운동은 머리 보다는 가슴, 이성 보다는 감성을 원한다. 사실은 이 시대가 동화와 전설을 쫓아내고 있다. ..

길위의단상 2005.05.03

대화

지난 15일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리영희 선생님의 신간인 ‘대화’ 출판을 기념한 독자와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가까이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참석했었는데, 100여 명이 모여서 몸이 불편한 선생님에게 존경의 마음을 나타내었다. 넓은 홀의 자리는 많이 비었지만 대중성 없는 이런 모임에 그래도 이만한 인원이 참석했다는 결코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선생님과 무슨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젊은 시절에 선생님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은 바도 없지만, 독재에 저항한 올곧은 한 길의 삶이 멀리서 늘 외경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현실에 야합하고 변절하는 사람이 원로 행세를 하며 큰소리치는 지금의 세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5년 전에 선생님은 뇌출혈로 쓰러지셨는데 지금은 많이 회복되시어 예의 꼬장꼬..

길위의단상 2005.04.20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1 성적을 비관한 과학고 학생이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0일 오전 1시50분쯤 서울 노원구 J아파트 주차장 인도에서 이 아파트 7층에 사는 S과학고 학생회장 이모(18. 3학년)군이 피를 흘린 채 숨져 있는 것을 경비원 이모(63)씨가 발견해 119에 신고했다. 경찰 관계자는 "현재까지 조사한 결과 이군이 이날 자정께 주방 식탁에서 공부하던 중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가자 한 시간 뒤 친구 3~4명에게 '먼저 간다. 잘 지내라'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낸 뒤 베란다 창문을 열고 투신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중학교 때 학급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우등생이었던 이군은 과학고에 진학한 뒤에도 수학과 지구과학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 또 평소 '..

길위의단상 2005.04.13

출산 장려 운동

딸이 쓴 글이 오늘자 한겨레신문 독자칼럼에 실렸다. 출산 장려 운동에 대한 의견을 신문사로 보낸 모양인데, 그저께 신문사에서 사진을 보내 달라는 연락이 와서 게재될 줄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신문에 사진, 이름과 함께 실린 글을 보니 마음이 무척 뿌듯하고 딸이 대견스럽게 느껴진다. 항상 어린애 같이만 보였는데 이렇게 자기 의사를 표현할 줄 아는 것을 보니 이미 성인이 다 된 것 같다. 딸에게는 앞으로도 사회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넓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기를 당부하고 싶다. 사회에 순응하는 잘 길들여진 사람이 아니라,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주체적 인간이 되길 부탁한다. 딸이 말한 대로 제발 이제는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는 듯한 무슨 운동이나 캠페인 좀 ..

길위의단상 2005.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