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952

철학자의 나무

서울 삼청동 공근혜갤러리에서 영국 사진작가인 마이클 케냐(Michel Kenna)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전 제목이 '철학자의 나무'[Philosopher's Tree]인데 나무를 주제로 한 사진 작품 52점이 전시되고 있다. 지난 30여년 동안 작가가 전세계에서 찍은 나무 사진인데 일본에서 찍은 게 가장 많고 한국에서 찍은 것은 두 작품이다. 그중에서 강원도 솔섬을 찍은 유명한 사진이 있다. 작품들은 모두 흑백의 소품이다. 촬영에서 인화까지 직접 손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가 주는따스함과 서정성을 느낄 수 있다. 여백이 많은 동양의 수묵화를 보는 것 같다. 눈과 마음이 담백해진다. 전시회장 입구에는 작가의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겸허함과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는, 위엄 있고 ..

읽고본느낌 2011.02.23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 드 보통의 소설 는 남녀 사랑의 탐구생활이다. 사랑하는 두 남녀의 심리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의 소설판 같기도 하다. 여자 주인공인 엘리스가 에릭과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는 이야기인데 일반적인 연애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사랑의 과정을 심리학적, 철학적 지식을 동원해 분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제목이 ‘The Romantic Movement’인데 결코 로맨틱하지는 않다. 그래서 어떤 독자에게는 재미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저 달콤한 연애 이야기만 기대한다면 이 책은 보지 않는 게 나을지 모른다. 눈에 콩깍지가 낀다고 표현하듯 사랑은 환상에서 시작된다. 에릭이 구두끈 매는 모습을 보면서 엘리스는 이렇게 귀엽게 구두끈을 매는 사람을 찾아내다니, 꿈이 아닌가, 하고 황홀해 한다. 그러다가 달콤한 밀월기간..

읽고본느낌 2011.02.14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다룬 작품은 수없이 나와 있다. 그동안 영화, 다큐멘터리, 소설, 자서전, 르포 등 다양한 장르로 소개되어 그 내용이 익숙하다. 그런데 는 특이하게 만화로 된 작품이다. 1992년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유대인은 쥐로, 나치주의자는 고양이로 그려저 있는 것이 도리어 일상의 친숙함 마저 앗아가 버리는 충격과 감동을 준다. 저자인 아트 슈피겔만은 2차대전 후 태어났지만 그의 부모는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겪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가족과 친척, 이웃 대부분은 게토와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슈피겔만은 아버지로부터 구술 받은 고난의 여정을 만화로 표현했다. 다른 경험담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인간의 야만성에 대해 치를 떨게 되고, 인간이 견딜 수 있는 ..

읽고본느낌 2011.02.10

살림의 경제학

은 강수돌 선생이 쓴 책으로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모든 인간이 노동력으로 평가되는 사회로 경쟁과 이윤, 출세와 성공이 체제의 핵심 논리다. 여기서는 삶의 주체들이 돈벌이의 도구로 대상화되고 만다. 사람들은 먼저 자본과 국가에 의한 '물리적 폭력'을 경험하는데 여기서는 학교와 군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뒤에는 '물질적 보상'에 길들여지고 사회 구성원들이 '자발적 수용'을 하면서 체제는 더욱 공고해진다. 이런 체제 안의 인간은 자신의 내적 욕구를 억압하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그래서 남는 것은 결국 피폐한 자연과 병든 몸뚱이, 세상에 대한 원망, 두려움과 불안감뿐이다. 저자는 이런 인간파괴의 경제를 '죽임의 경제'라고 부른다. 이런 '죽임의..

읽고본느낌 2011.02.08

은퇴생활백서

며칠 전에 친구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보내줄 책이 있으니 집 주소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무슨 책인가 궁금했는데 다음 날 (어니. J. 젤린스키, 아이즈북)라는 책을 받았다. 이번에 명퇴를 한다고 했더니 마음에 새겨두었던 모양이다. 나는 처세술이나 자기계발서 같은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책은 삶의 기능적인 면만 강조해서 세상적으로 잘 사는 테크닉만 가르쳐주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인생을 경박하게 바라보는 그런 관점이 싫다. 그래서 은퇴를 앞두고 있지만 은퇴에 대한 안내서적에는 관심이 없었다. 읽어봐야 뻔한 내용일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이 책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친구가 강권하지 않았다면 책상 한 켠에 밀어놓았을 것이다. 서론이 이렇게 길어진 것은 예상외로 책 내용이 알차다는 것을 강..

읽고본느낌 2011.01.27

내 젊은 날의 숲

동료가 이 책을 선물했다. 김훈 얘기를 몇 차례 했더니 내가 김훈의 애독자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김훈의 문체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수식이 배제된 건조한 단문이 그분 글의 매력이다. 은 디자인을 전공하고 국립수목원에 계약직으로 취직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민통선 안의 격리된 수목원에서 꽃과 나무의 세밀화를 그리는 일을 한다. 그녀의 삶은 단조롭고 드라이하다. 격렬한 감정의 충돌도 없고 열정적인 사랑도 없다. 몇몇 등장인물들과 유해발굴단의 유골 묘사를 통해 인생의 쓸쓸함과 무의미성이 그려지고 있다. 김훈의 소설에 공통되는 산다는 것의 막막함이 조금 스타일을 달리 하지만 이번 책에서도 느낄 수 있다. 주인공은 6.25 때의 전사자 유골발굴단 작업에 참여한다. 발굴 현장의 유골을 세밀화로 그리..

읽고본느낌 2011.01.19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The Last Station]은 부인 소피아와 갈등을 겪으며 가출을 하고 시골 역사에서 쓸쓸히 생을 마친 톨스토이의 말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라는 원작을 바탕으로 했는데 전에 책을 읽었던 터라 영화가 더욱 흥미 있었다.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대개 실망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예외였다. 도리어 원작보다 더 긴장감 있고 영상이 주는 효과가 사실적이었다. 톨스토이는 무척 매력적인 인물이다. 단순히 위대한 작가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삶으로 실천하려 한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방탕한 삶을 살던 톨스토이는 50세가 넘어서 종교적 회심을 경험한다. 회심 이후 톨스토이는 산상수훈에 의거한 사랑과 비폭력을 도덕과 사상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는 사유재산을 반대했으며 근대문명을 ..

읽고본느낌 2010.12.29

클라라

클라라(Clara, 1819-1896)와 슈만(Schuman, 1810-1856), 그리고 브람스(Brahams, 1833-1897). 음악에 문외한이다보니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도 영화를 보고나서야 자세히 알게 되었다. 슈만과 브람스의 클라라에 대한 사랑은 클래식 역사에서도 유명한 러브 스토리라고 한다. 클라라는 당대의 촉망 받던 여류 피아니스트였다. 슈만과 어렵게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며 음악 활동을 계속한다. 그녀는 남편 대신 교향악단을 지휘할 정도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슈만의 제자로 함께 살게 되면서 브람스는 클라라의 매력에 빠져든다. 당시 클라라는 34살, 브람스는 20살이었다. 그리고 브람스에게 클라라는 평생 사모하는 구원의 여성이 된다. 두통과 마약중독에 시달리던 슈만은 정신병원에..

읽고본느낌 2010.12.21

루쉰 단편

“가령 쇠로 된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거기에는 창문도 없고 또 절대로 부숴버릴 수도 없는 그런 방이야. 그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지. 그러니 머지않아 모두 죽을 판이야. 하지만 혼수 상태에 빠져 곧장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고 치세. 그런데 자네가 마구 소리쳐 아직도 약간 의식이 남아 있던 몇 사람을 놀라 깨우게 함으로써 불행한 그 몇몇 사람들에게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임종의 고통을 맛보게 한다면 과연 자네가 그들에게 잘 한 것이라고 여길 수 있겠나?” “그러나 다만 몇 사람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나?” 루쉰(魯迅)이 ‘자서(自序)’에서 든 비유이다. 루쉰은 의학을 공부하다가 중국 인민을 각성시키기 위해..

읽고본느낌 2010.12.17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며칠 전부터 롯데마트에서 튀김닭 한 마리를 5천 원에 판매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일반 치킨집에서의 가격이 15000원이니까 무려 1/3 가격이다. 당장 동네의 영세 치킨업자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것은 기업의 윤리성을 망각한 대형 유통업자들의 횡포가 아닐 수 없다. 대기업과 영세한 자영업자는 애초에 경쟁이 되지 않는다. 헤비급과 플라이급 권투 선수의 시합은 해보나마나이다. 그러나 소비자의 권리를 내세우며 찬성하는 자유시장론자들도 있다.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소비자에게 이익이 된다면 좋다는 것이다. 실제로 광고가 나간 뒤 롯데마트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 푼이라도 싸게 파는 곳에 소비자는 몰리게 마련이다. 이기적 기업가와 이기적 소비자로 이루어진 것이 시장의 생리다. 이번 파동은 대기업의 마케팅 차원의..

읽고본느낌 2010.12.13

인생의 선용

인생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만큼 오래 살기를 원하면서도 정작 잘 살기 위해 전혀 노력하지 않는 존재도 없다. 이렇게 시작되는 러보크(J. Lubbock)의 ‘인생의 선용(善用)’은 범우사에서 나온 같은 제목을 가진 작은 문고본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전 직장에서 선물로 받았던 것인데 서랍 속에 있던 걸 다시 꺼내 읽어 보았다. 글에는 노숙한 인생의 스승이 전하는 당부와 지혜의 말이 가득하다. 그러나 180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 탓인지 고리타분한 느낌도 있다. 서양의 공자 왈 맹자 왈, 을 듣는 기분이다. 하지만 진지하게 경청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인간다운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내면의 소리이기 때..

읽고본느낌 2010.11.30

방황하는 영혼

임의진님이 '갤러리 아이'에서 그림 전시회를 연다고 해서 다녀왔다. 그동안 글을 통해서 만난 선생의 자유인으로서의 삶이 늘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현대의 노마드 이미지다. 안내 팸플릿에는 다종예술가[total artist]로 소개되고 있다. 목사, 시인, 수필가, 가수, 화가, 여행가 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어느 하나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사는 분이다. 그림은 이해하기 힘들다. 특히 현대미술에서 더 그렇다. 콜라병을 그린 앤디 워홀의 작품이 몇 백 억인가에 거래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나 같은 문외한은 팝아트가 왜 그렇게 높은 가치를 지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이번 임의진님의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생소한 양식에 내 감정이 따라가지를 못했다. 편하게 볼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아마 ..

읽고본느낌 2010.11.17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

리 호이나키(Lee Hoinacki)는 65세가 되던 1993년에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었다. 프랑스 생장피도포르에서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800 km에 이르는 길을 31일 동안 혼자 걸은 것이다. 이 길은 가톨릭의 순례길이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부를 따라 대서양까지 이어진다. 산티아고에 성 야고보의 시신이 있다고 믿은 사람들은 서기 1000년경부터 서쪽을 향해 순례 여행을 떠났다. 특히 중세 때는 순례 행렬이 대단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호이나키는 일리치의 추천으로 생애의 느지막이 이 길에 섰다. 은 한 달에 걸친 그의 순례 기록이며 신앙 고백이다. 호이나키는 에서 만났던 분이다. 젊었을 때 도미니크 수도회에 입회해서 중남미 지역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일리치와 함께 ..

읽고본느낌 2010.11.05

백가기행

내 살 집을 내 손으로 짓고, 내 먹을거리는 내 노동으로 기르며 사는 걸 이상으로 생각했다. 7년 전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다시 한 번 나에게 기회가 올지 모르지만 이젠 무척 두렵고 조심스러워질 것 같다. 쓴 맛은 좋은 인생 경험이 되었다. (百家紀行)은 조용헌 씨가 쓴 집에 관한 책이다. 저자가 전국을 돌아보며 만난 명가(名家)들이 소개되어 있다. 한 칸짜리 오두막에서 수 백 평 부자의 집까지 스물한 채의 집이 나온다. 한옥도 있고 아파트도 있고 지하에 지은 집도 있다. 집이란 무엇인가? 저자의 말로는 집의 존재 의미는 ‘가내구원’(家內救援)에 있다. 구원은 집 밖이 아니라 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집은 사람에게 위로와 평화를 주는 공간이다. 또한 사는 사람의 인생철학이 담겨있어야 한다. 넓은 평..

읽고본느낌 2010.10.18

농부시인의 행복론

"아들아, 간디학교 졸업하면 대학 가지 말고 아버지랑 농사지으며 살면 좋겠구나." "아버지, 걱정 마세요. 사람이 제 먹을 곡식을 제 손으로 짓는 일말고 할 게 뭐가 있겠어요. 친구들과 농부가 되자고 약속했어요. 젊었을 때 배우고 싶은 거 배우고 나서 말이에요. 그러니 학교 졸업하고 당장 농부가 되지 않더라도 느긋하게 기다려 주세요. 아셨죠?" "여태껏 배웠으면 됐지, 무어 그리 배울 게 많나. 어쨌든 농부가 된다니 기다려야지. 그런데 농부가 된다는 말은 믿어도 되는 거지?" "아 참, 아버지는 아들 말을 못 믿으면 누구 말을 믿으세요?" "그렇지, 아들 말을 믿어야지. 믿고말고." 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내용이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는 사람은 무섭다. 보통의 먹물들은 말과..

읽고본느낌 2010.10.05

공무도하

간결한 문체 때문에 김훈의 글에 끌린다. 그분의 글은 짧고 건조하다. 살이 붙어있지 않은 생선 가시 같다. 감정의 낭비가 심한 글보다 이런 드라이한 글이 마음에 든다. 이런 문체는 삶의 비애를 드러내는데 알맞다. 그분은 늘 인생의 허무함과 덧없음에 대해 말한다. 일상은 비루하고 치사하다. 부조리하고 희망 없는 세계를냉혹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묘사한다. 세상의 치부는 숨을 데가 없다. 에서 가야의 순장 장면과 백제군의 집단 처형 장면은 나로서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비극을 그릴 때 김훈 문체의 진가가 드러난다. 이번에 를 읽은 것은김훈 문체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였다. 소설에는 비극적 인물 군상들이 병렬로 등장한다. 개에게 물려죽은 판잣집 아이, 누이를 강간하는 아비를 죽인 청년, 크레인에 깔려죽은 여고생, ..

읽고본느낌 2010.09.24

명리학

퇴직 후에 기회가 된다면 명리학(命理學) 공부를 해보고 싶다. 역술(易術)에 대해서는 미신이라고 이때껏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사주팔자라고 하면 콧방귀부터 뀌었다. 그런 생각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젠 호기심이 조금씩 생긴다. 그리고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이는 세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고 이해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존중감도 생긴다. 우리 선조들의 사유 세계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과학적이라고 내칠 것은 아닌가 싶다. 어렸을 때 설날이 되면 어른들은 을 사와서 한 해의 운세를 보았다. 나는 안방에서 어머니를 비롯한 여자들의 운세를 읽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월별로 사언절구로 된 한자가 적혀 있고 우리말 풀이가 달려 있었다. 은유적인 표현들..

읽고본느낌 2010.09.03

인셉션

후배가 이 영화를 추천하면서 꿈으로 된 세상 운운하며 어려운 얘기를 했다. 당연히 호기심이 생기는 영화였다. 그런데 너무 기대가 컸던 탓인지 영화에서 별다른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재미있는 영화이긴 하지만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우선 헐리우드식 액션이 너무 많이 나와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꿈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무의식을 조절할 수 있다는 SF적 소재는 신선했지만 너무 잦고 긴 폭력 씬 때문에 도리어 방해를 받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장면들이 영화를 재미있게 만드는 주요한 요소이기도 할 것이다. '인셉션'(Inception)이란 꿈을 통해 상대방에게 특정한 의식을 주입시키는 것을 말한다. 영화에서는 재벌 2세가 상속받은 회사를 분할시키도록 만들기 위해 그의 무의..

읽고본느낌 2010.08.21

나를 부르는 숲

이 책, 참 재미있게 읽었다. 책을 읽는 동안은 한여름 더위도 잊었다. 빌 브라이슨,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 작가라는 칭송이 결코 빈말이 아니다. 은 친구와 함께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한 이야기를 쓴 산행기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내용이라 무거워질 수도 있는데 가볍고도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글 쓰는 솜씨가 정말 발군이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우리나라 백두대간 길과 비슷하지만 스케일은 엄청 크다. 조지아 주에서 메인 주까지 14개 주를 관통하는데 길이가 무려 3360 km다. 이 산길을 쉼 없이 걸어 대개 6개월 정도에 주파한다. 40대의 저자는 전 구간을 종주하지는 못했지만 산길에서 만난 흥미로운 사람들과 자연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엄청난 모험에 대한 얘..

읽고본느낌 2010.08.03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

조영남 씨를 가까이서 본 건 수 년 전 어느 종교 강연회장에서였다. 강연이 끝난 뒤 강사가 청중석에 있던 조영남 씨를 소개하며 소감 한 마디를 부탁했다. 그때 조영남 씨는 자신의 개신교 경력을 간단히 말한 뒤 개신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피력했다. 당시 강연 주제도 그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영남 씨가 자신은 기독교를 이미 졸업했다는 요지의 발언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 말이 당시에는 상당히 건방지게 들렸지만 지금은 자유주의자로서의 조영남답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조영남 씨가 시인 이상의 시 해설서를 냈다. 제목이 이다. 아마 한자를 병기해야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상(李箱)은 이상(異常) 이상(以上)이었다. 조영남 씨는 책머리에서 왜 생뚱맞게 이상에 관한 책을 내는 이상한 일을 하..

읽고본느낌 2010.07.26

하얀 리본

무겁고 우울한 영화다. 1910년대의 평화롭고 고요해 보이는 독일의 한 작은 마을, 마을 의사가 말을 타고 가다가 누군가가 설치해 놓은 줄에 걸려 다치고, 연달아 방화, 사고사, 심지어 한 아이의 눈이 도려내지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범인은 알 수 없다. 다른 스릴러처럼 범인을 찾아내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은 아니다. 누가 범인인지는 밝혀지지도 않는다. 조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과 억압의 구조, 그리고 어두운 인간 본성을 접하게 되면 마음이 착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1910년대의 독일의 작은 마을 이야기가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도 통용되는 얘기이기에 영화의 메시지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 마을은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속은 질식할 듯 답답하다. 전통과 ..

읽고본느낌 2010.07.16

작은 연못

‘작은 연못’은 1950년 7월의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재현한 가슴 아픈 영화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주민들은 미군의 소개령으로 피난길에 나서는데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군이 침투해 있다는 잘못된 첩보로 폭격 명령이 내려진다. 살아남은 주민과 피난민들은 쌍굴로 피신하는데 다시 미군들로부터 집중사격을 받는다. 현장은 아비규환으로 변하고 심지어는 아이 울음소리를 숨기기 위해 아이를 질식사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피신했던 300여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불과 25명뿐이었다. 이 사건은 1999년에 AP 통신 기자들에 의해 최초로 보도된 후 2005년에야 우리 정부도 그 실체를 인정했다. 영화는 크게 자극적인 장면이나 극적 요소 없이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오히려 그..

읽고본느낌 2010.07.07

신은 위대하지 않다

크리스토퍼 히친스(C. Hitchens)는 스스로를 물질주의자라 부른 대로 신과 종교에 대해 극단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요사이 반종교적인, 구체적으로는 반기독교적인 책이 유행하는데 히친스가 쓴 도 그런 계열의 책이다. 내가 읽어본 중에서는 상당히 과격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도킨슨의 과 비슷하지만 종교를 비판하는 관점은 약간 다르다. 저자가 종교를 비판하는 근거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책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인류의 광기와 악행들로 가득 차 있다. 저자가 보기에 종교는 아편이며 독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만행과 죄악의 사례는 산더미보다 많다. 책을 읽다보면 인류는 종교라는 형식을 빌려 내면의 악을 배설해내는 것 같다. 그러나 너무 유물론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어 편향된 시각이라는 ..

읽고본느낌 2010.06.19

봄비 여름비 가을비 겨울비

토요 휴일에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셋이서 가까운 산길을 걷기로 했는데 비 때문에 취소되었다. 꽉 차게 되어 있는 하루가 갑자기 텅 비어 버렸다. 비 오는 날의 적적함은 견디기 힘들다.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을 잠재우려 장석주 시인의 산문집을 꺼내본다. 마침 비에관한 글이 나온다. 봄비 봄비는 겨우내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을 두드리며 온다. 비들은 오, 저 ‘시체들의 창고’인 땅을 맹인의 지팡이로 두드리듯 두드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얼어붙은 땅은 풀리고 땅 속에 숨은 씨앗들은 싹을 땅거죽 밖으로 밀어낸다. 봄비가 충분히 내리고 난 뒤에야 작약의 붉은 움이 돋고 모란의 묵은 가지들에도 꽃눈이 돋는다. 들창 너머로 혼자 내다보는 봄비는 쓸쓸하다. 곡식이 있으면 밥을 끓이고 곡식이 끊기면 굶는다. 하루도 거르..

읽고본느낌 2010.06.12

2010 기상사진전

카메라를 가진 이래로 제일 관심이컸던 피사체는 하늘이었다. 낮의 구름과 밤하늘의 별을 찍기 위해 나름대로는 많이 노력했다. 특히 과학적 입장에서 하늘에 나타나는 모든 구름들과 기상 현상을 필름에 담고 싶었다. 물론 진기한 모양의 구름을 포함한 예술적인 사진을 남기고싶었던 욕심도 있었다. 그 당시에 슬라이드로 찍었던 필름들이 아직 남아있지만 지금 보면 남에게 보여주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시원찮다. 특히 다름 사람의 아름다운 작품과 비교할 때면 더욱 주눅이 든다. 그래도 하늘을 찍은 사진을 보면 다른 것에 비해더 눈길과 애정이 간다. 아직도 기상사진이나 천체사진에 관심이 많다. 아래 사진들은 올해의 기상사진전 수상작품 중에서 몇 개를 고른 것이다. 이런 사진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하늘 사진에 다시 한 번 도..

읽고본느낌 2010.06.01

작년에 ‘시’라는 제목의 영화를 이창동 감독이 만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호기심과 함께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시를 주제로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낼지가 궁금했다. 더구나 주인공이 윤정희라는 소식에 더욱 기대가 되었다. 나름대로 기다리던 영화 ‘시’가 이번에 개봉되었고, 칸 영화제에서는 각본상도 받았다. ‘시’를 본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먹먹한 감정이 가시지 않고 있다. 그리고 영화를 본 느낌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가닥이 잡히지도 않는다. 마음이 엉킨 실타래처럼 안타깝고 혼란스럽다. 그 이유는 미자(美子)의 삶이 나와 동일시되기 때문인 것 같다. 고단한 현실을 시로 승화시키려는 미자를 통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를 만난다. 미자에게 시는 고통스런 현실을 잊는 환상인지도 모른다. 시에 ..

읽고본느낌 2010.05.24

추억

서점에 들렀다가 장석주의 을 샀다. 글을 읽으며 역시 장석주라는 찬탄이 절로 나왔다. 장석주의 글은 깊으면서도 진솔하다. 글이나 작가도 개인적 취향에 따라 호오가 달라지겠지만 나에게는 장석주의 글이 좋다. 작가가 일으킨 파문이 전해져 공명을 일으키면서 내 마음 깊은 데를 두드린다. ‘어느 날 우유를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다가 알 수 없는 공허감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이런 평범한 문장도 오늘 같은 날은 나를 울린다. 은 부제가 ‘장석주의 장자 읽기’다. 본인의 삶과 장자가 ‘느림과 비움’을 주제로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다. 책 내용 중에서 추억에 대해 쓴 부분이 있다. 장석주가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는데 직접 옮긴다. ----------------------..

읽고본느낌 2010.05.11

우리 의사 선생님

청진기로 진찰하던 때가 인간적인 의료 기술의 마지막 시대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본 영화 '우리 의사 선생님'[Dear Doctor]은 바로 그 말을 떠올리게 했다. 일본의 오지 농촌에서 주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으며 일하는 '이노'라는 의사가 있다. 이노는 주민들의 속사정을 헤아리며 마음이 통하는 인술을 편다. 주민들에게는 명의에 더해 신과 같은 존재다. 그러나 그는 가짜 의사다. 영화에서는 무슨 이유로 의사 노릇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보여주지 않지만 하여튼 그는 의사 자격증이 없다. 어느날 이노가 사라지면서 그의 비밀이 드러나게 된다. '우리 의사 선생님'은 잔잔하면서 따스한 영화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은 첨단의 의료 테크닉이나 시스템이 아니라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와 믿음임을 보여준다. ..

읽고본느낌 2010.05.03

미실

‘그녀의 치마가 펄럭였을 때 세상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김별아의 장편소설 을 읽었다. 에 기록되어 있다는 ‘미실(美室)’이 실존인물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소설 내용으로 보면 무척 독특했던 여성이었던 것 같다. 미실은 자신만이 가진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활용해서 임금을 비롯한 뭇 남성들을 손아귀에 쥐고 정치적 야망을 이룬 스케일이 큰 여자였다. 그녀는 총명하고 명민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교활했다. 그녀는 남자들의 심리를 기막히게 파악하고 있었다. 한번 관계를 맺으면 어느 누구도 그녀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남성들의 로망이었지만 동시에 팜므 파탈이기도 했다. 미실은 대원신통이라는 핏줄을 가진 색공지신(色供之臣)이었다. 즉, 운명적으로 왕을 색으로 섬겨야 하는 왕의 여자였..

읽고본느낌 2010.04.26

추노

TV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데 ‘추노’는 예외였다. ‘추노’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지인 중 한 사람이 이 드라마를 강력 추천해서 늦어서야 보게 되었다. 마침 쿡 TV에 가입되어 있어 프로그램 다시보기 기능을 이용해서 아무 시간에나 찾아서 볼 수 있었다. 총 24편인데 지난 두 주일동안은 퇴근하면 이 드라마를 보는 게 일이었다. 추노(推奴)는 조선시대 때 도망친 노비를 수색하여 체포하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 시대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에서 볼모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가 돌아와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인데, 추노꾼 대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여느 사극과 달리 고단한 민초들의 삶을 중심으로 하면서 새 세상을 꿈꾸는 인간들의 희망과 좌절을 그렸다. 특히 인간 대우를 받지 못했던 노비들을 비롯한 ..

읽고본느낌 2010.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