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71

로마

담백한 흑백 화면에 클레오의 삶을 잔잔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배경은 1970년대 초반 멕시코다. '로마'는 이탈리아의 로마가 아니라 멕시코시티에 있는 어느 지역명이다. 클레오는 원주민으로 멕시코 상류 가정에서 일하는 가정부다. 넓은 집의 살림을 하고 네 아이 치다꺼리 하느라 종일 일에 파묻혀 산다. 이 영화는 두 계급 사이의 가까워질 수 없는 간극을 냉정하면서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넓게는 인간의 외로움이나 소통의 문제를 다룬다고 볼 수도 있겠다. 부자와 빈자, 서양인과 원주민, 남과 여 등의 대비를 통해 인간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흑백 화면으로 보여준다.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계급'이라는 단어가 금기어가 된 때가 있었다. 씁쓰레한 에피소드가..

읽고본느낌 2021.01.04

인투 더 와일드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북소리를 따라 문명을 박차고 나간 한 젊은이의 여정을 그린 영화다. 크리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가식과 위선의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 나선다. 첫 번째 이유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자신이 모은 돈 2만여 달러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크리스는 말 한마디 없이 집을 떠나 버린다. 영화는 'My Own Birth' 부터 'Getting Of Wisdom'까지 다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크리스는 노숙을 하면서 자연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맛본다. 길 위에서 만나 집시 부부나 농장의 일꾼과 우정을 나누고, 독거노인과 한동안 같이 지내기도 한다.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인생에 대한 충고도 듣지만 그 무엇도 크리스의 마음을 되..

읽고본느낌 2020.11.18

소셜 딜레마

넷플릭스에서 본 다큐멘터리다. 구글,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나와 SNS의 실상과 폐해를 알려준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들이지만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걸 깨닫게 해 준 내용이었다. 내가 유튜브를 보게 된 건 몇 달 전부터다. 도올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였는데, 세상의 모든 정보가 이 플랫폼에 영상으로 올라와 있는 걸 보고 놀랐다. 포털보다는 유튜브에서 검색하는 게 훨씬 더 재미있다는 걸 알았다. 이제는 유튜브를 열면 내 성향에 맞거나 내가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제가 알아서 보여준다. 신기하기도 하지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화문에 태극기를 들고나오는 사람은 어떤 뇌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반대로 그들은 문재인을 나라를 망치는 빨갱이라고 ..

읽고본느낌 2020.10.17

아라비아의 로렌스

이 영화를 언제 봤는지 가물가물하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닥터 지바고'나 '사운드 오브 뮤직'은 기억이 선명한데 이 영화는 안갯속이다. 극장에서 개봉할 때 못 봤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번에 유튜브에서 찾아서 보았다. 영화의 스케일에 비해 컴퓨터의 작은 모니터로 본 게 아쉬웠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1962년에 나왔으니 60년 전 영화다. 촬영은 아마 50년대 후반에 시작했을 것이다. 그때를 고려하면 놀라운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감독이 데이비드 린(David Lean)인데 '콰이강의 다리' '닥터 지바고'를 만든 명장이다. 감독과 여기 나온 배우들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특히 안소니 퀸과 오마 샤리프의 젊을 때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영상미가 참 ..

읽고본느낌 2020.08.21

사마에게

시리아 내전의 중심지에서 전쟁의 참상과 복잡한 시리아 상황을 전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촉발된 시리아의 민주화 투쟁은 알아시드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내전으로 발전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처음에는 민주화 운동으로 시작했으나 종파간 대립과 외세가 개입하면서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국제적 분쟁 지역이 되어 버렸다. 러시아와 이란이 정부군을 지원하고, 미국과 사우디 등의 연합군은 반군을 지원한다. 전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민간인과 어린아이 같은 약자들에게 돌아간다. 9년이 넘는 기간 동안 40만 명이 사망했고 천만 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했다. 21세기 문명 세상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한반도 상황도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지 말라는 보장이 ..

읽고본느낌 2020.07.12

노팅 힐

가끔 단것을 먹고 싶을 때가 있듯, 달콤한 이야기가 당기는 날이 있다. 그래서 찾아본 영화가 '노팅 힐(Notting Hill)'이다. '노팅 힐'은 영국 런던에 있는 동네 지명이다. 유명 할리우드 스타 여배우와 노팅 힐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평범한 남자가 우연히 만나고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극히 드물어야 환상을 충족시켜 주는 조건이 된다. 보통은 여자가 신분 상승을 하는 신데렐라 이야기지만 이 영화는 반대다. 남자의 욕구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줄리아 로버츠(안나 스콧 역)와 휴 그랜트(윌리엄 대커 역)가 두 주인공으로 나온다. 스타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인간성의 줄리아 로버츠가 매력적이다. 이 영화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명대사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다. "The fa..

읽고본느낌 2020.04.30

1917

전쟁은 일으킨 놈이 있고 치러야 하는 놈이 있다. 전자는 소수의 권력자이고, 후자는 다수의 민중이다. 특히 어린이와 여자 같은 약자와 젊은 청년이 고통을 겪는 직접적인 피해자다. 전쟁을 일으킨 놈은 이겼건 졌건 상관없이 전범으로 처벌해야 한다. 그래야 전쟁을 일으킬 엄두를 못 낼 것이다. 영화 '1917'은 특별한 느낌의 전쟁 영화다.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다. 연합군으로 참여한 영국군과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참호전을 벌이고 있다. 어느 날 독일군이 참호를 버리고 작전상 후퇴를 한다. 이때 영국군의 한 부대가 돌격 작전을 계획하는데 이는 독일군의 함정이었다. 이를 간파한 지휘소에서 작전 취소를 명령하려 하지만 연락이 안 된다.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모든 시설과 영국군의 통신 설비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

읽고본느낌 2020.04.08

서부 전선 이상 없다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레마르크의 전쟁소설이다. 독일의 고등학생이었던 파울 보이머는 담임 선생의 권유로 반 친구들과 함께 자원입대한다. 10주 훈련을 마치고 곧바로 독일과 프랑스군이 참호전을 벌이고 있던 서부 전선에 배치된다. 애국심에 불타서 군인이 되었지만, 소년들이 감당하기에 전쟁터는 너무나 잔인하고 처절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친구들이 하나하나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파울은 전쟁의 무의함과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몬 권력자들의 기만과 허위의식을 알아가며 분노한다. 는 전쟁을 참혹함을 고발하는 소설이다. 극한 상황에 내몰린 병사들은 인간성이 파괴되고 싸우는 기계가 된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적을 죽여야 한다. 그런 지옥에서도 인간에 대한 연민이나 전우애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소설은 이념이나 이데..

읽고본느낌 2020.04.01

작은 아씨들

영화 '작은 아씨들'을 봤다. 소설을 안 읽은 탓인지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1994년에 나온 '작은 아씨들'을 추가로 봤다. 1994년 영화는 시대순으로 진행되어 이해하기가 쉬웠다. 왼쪽이 2019년 영화 포스터이고, 오른쪽이 1994년 포스터다. 2019년 '작은 아씨들'은 올해 아카데미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여러 부문에서 경합을 벌였던 작품이다. 그래서 더 관심이 갔다. 여성 감독의 작품이어선지 다정다감하면서 아기자기한 여자들의 세계가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같은 소설을 소재로 한 두 영화를 비교하면서 볼 수 있어 더 흥미로웠다. 35년 전에 나온 1994년 작품에서는 고전적인 분위기가 났고, 2019년 작품은 현대적이면서 다이내믹했다. 19세기 중반을 재현한 면에서는 ..

읽고본느낌 2020.03.26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이달 초에 홍상수 감독이 '도망친 여자'로 베를린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봉준호 감독이 화려한 불꽃놀이를 펼쳐보인 뒤라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지만, 한국 감독이 연이어 유수의 세계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사실은 기쁜 일이다. 그래서 홍 감독의 2015년 작품인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올레TV에서 찾아 감상했다.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단박에 느껴졌다. 영화를 만들 때는 이미 김민희 배우와 사랑에 빠졌던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남자 주인공의 직업도 영화감독이다. 두 사람은 대중의 비난이 거세 공개적인 행보를 못 하고 있다. 나는 개인의 사생활에 대하여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다만 뒤처리가 매끄러웠다면 소송까지 가는 볼썽사나운 모습은 안 보였어도 되지 않았..

읽고본느낌 2020.03.13

결혼 이야기

이번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여러 차례 호명된 영화다. 작품상,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극본상 후보에 올랐으나, 변호사 역을 맡은 로라 던만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스칼렛 요한슨이 여우주연상을 받았어도 마땅한 영화다. '결혼 이야기'는 결혼보다는 이혼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연극 연출가와 배우인 찰리와 니콜은 여덟 살의 아들 헨리를 두고 있는 부부다. 작은 일에서 갈등을 겪다가 결국은 헤어지기로 한다. 처음에는 변호사를 쓰지 않고 대화로 마무리 지으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니콜이 이혼 전문 변호사를 만나면서 상황이 급변하고 난장판이 된다. 어쩌면 이 영화는 미국의 이혼 사법 절차에 대한 고발인지 모른다. 둘은 이혼을 결심하고도 사이가 좋다. 왜 이혼하려는 건지 의아하기까지 하다. 흔히 ..

읽고본느낌 2020.02.26

천문: 하늘에 묻는다

이 영화의 개봉 소식을 듣고 세종과 장영실을 어떻게 그렸을까 궁금해졌다. 장영실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과학기술자인데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면서도 마지막에는 벌을 받고 궁궐에서 쫓겨났다. 단순히 임금의 가마를 잘못 만들었다는 이유로는 설명하기 부족한 부분이 있다. 장영실은 관노 신분이면서 종3품 벼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독자적인 기술 입국을 꿈꿨던 세종의 명으로 혼천의, 자격루, 측우기 등 여러 과학기기를 제작했다. 세종의 신임이 두터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런데 이 영화 '천문'에서는 둘의 관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깝게 나온다. 왕과 신하의 신분을 떠난 벗이며 동지 같다. 장영실은 왕의 침실에서 같이 있기도 한다. 자신의 뜻을 몰라주는 신하들에 둘러싸인 세종은 외로움을 느끼고, ..

읽고본느낌 2020.02.10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터미네이터 1편이 나온 게 1984년이니 어느덧 36년이 되었다. 1편 뒤에 시리즈로 다섯 편이 제작되었고, 나는 세 편 정도를 본 것 같다. 이번에 나온 '다크 페이트'는 여섯 번째 작품이다. 옛 작품은 본 지가 오래돼서 기억에 떠오르는 장면들이 어느 편에 나오는 건지 헷갈린다.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연기한 터미네이터가 차를 몰고 추격하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어느 집 지붕을 뚫고 거꾸로 처박혔다. 죽든지 아니면 큰 부상이라도 당할 줄 알았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 옷의 먼지를 훌훌 털면서 집 밖으로 걸어나오는 장면이 있다. 터미네이터의 위력을 보여준 첫 장면이어서 기억에 남아 있다. 경찰관 복장을 한 액체 로봇 터미네이터 T-1000도 처음 봤을 때 놀라웠다.형상기억합금을 설명하면서 수업 시간에 써..

읽고본느낌 2020.01.23

신의 한 수 : 귀수편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라서 관심이 컸다. 전작인 '신의 한 수 : 사활편'은 폭력적인 장면이 많아서 실망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개선되길 바랐다. 그런데 같은 스타일의 복수혈전이다. 바둑을 들러리로 세운 액션 활극이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화끈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대로 볼 만할지 모르겠다. 겉으로 보면 바둑만큼 정적인 게임은 없다. 그러나 바둑 두는 사람의 심리 상태는 천변만화하며 요동친다. 평상심을 잃지말라고 하지만 승부가 걸리면 지키기 힘들다. 목숨이 걸린 내기바둑이라면 어떻겠는가. 이 영화의 주인공에게 바둑은 복수를 위한 도구다. 최고수가 되어 돌아온 귀수(권상우 분)는 상대를 하나하나 꺾으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누나를 성폭행하고 자살하게 만든 옛 바둑도장의 스승까지 정복하고 자살하게 만든..

읽고본느낌 2020.01.10

주전장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로, 일본계 미국인인 미키 데자키 감독 작품이다. 작년 여름에 개봉했으나, 신년 특집으로 SBS TV에서 어제 저녁에 방송되었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갈등의 최전선에 있는 이슈다. '주전장'은 양측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문제의 본질에 객관적으로 접근한다. 일본 우익의 주장은 보도를 통해 대체로 알고 있다. 그런데 보통의 일본 사람들은 위안부라는 말 자체를 대부분 모른다. 군국주의 시대의 부끄러운 역사를 은폐하고 숨기기 때문이다. 두 나라 국민의 갈등의 골이 깊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위안부를 바라보는 일본 우익의 주장이 이영훈 등이 쓴 라는 책에서 본 내용과 똑같아서 놀라웠다. 군복을 입고 일장기를 들고 행진하는 모습에서 태극기 부..

읽고본느낌 2020.01.02

두 교황

2005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한 뒤 열린 콘클라베에서 베네딕토 교황이 선출되었을 때 무척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베네딕토 교황은 학자 출신의 완고한 보수주의자로 알려져 있어서 천주교의 미래가 어둡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변화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것은 종교도 마찬가지다. 교황은 종신제다. 그런데 베네딕토 교황은 도중에 사임했다. 인기가 없었는 데다 측근의 비리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사임은 굉장히 의외의 결단이었다. 베네딕토 교황의 유일하게 훌륭한 업적은 사임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 영화 '두 교황'은 베네딕토 교황의 사임 전후에서 시작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새로 선출되는 과정을 담았다. 영화 첫 화면에는 사실에 기반한 픽션이라는 자막이 나온다. 두 교황은 가치관이나 성격 등 ..

읽고본느낌 2019.12.26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일본을 벗어나 프랑스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둘의 조합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어쨌든 새로운 시도는 상찬받을 만하다. 믿고 보는 고레에다 감독인데 이 영화는 솔직히 기대에 못 미쳤다. 동양과 서양의 어색한 동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 파비안느(까뜨린느 드되브)는 성공한 여배우인데 일밖에 모른다. "나쁜 엄마, 나쁜 친구가 되어도 괜찮아. 여배우로 명성을 얻을 수 있다면 만족해." 이런 멘트가 파비안느의 인생관을 말해준다. 당연히 딸과의 관계가 좋을 리 없다. 엄마를 못마땅해하는 미국에서 사는 딸이 가족과 함께 엄마를 찾아온다. 엄마의 자서전 출판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같은 공간에서 지내며 부딪치고 갈등을 겪은 뒤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읽고본느낌 2019.12.14

벌새

올해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인상 깊다. 나의 올해의 영화로 꼽을 만하다. 1994년,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은희의 방황과 성장을 그린 영화다. 1994년은 성수대교 붕괴라는 참사가 있었던 해다. 김보라 감독의 연출력이 탄탄하고, 특히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진지하면서 따스한 시선이 좋다. '벌새'에서 주목할 캐릭터는 영지 샘이다. 은희를 진정을 다해 이해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준다. 학원의 한문 강사를 넘어 인생의 스승, 멘토라 부를 만하다. 은희는 영지 샘을 만났기에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영지 샘은 서울대를 휴학한 운동권 학생이다. 그녀의 행동과 말에서는 소녀에게 주는 격려와 충고 이상의 인생에 대한 통찰이 보인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평생 철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영지..

읽고본느낌 2019.12.02

7인의 신부

옛날 영화를 한 편 봤다. 1950년대에 제작한 '7인의 신부'다. 미국에서 뮤지컬 영화의 전성기에 나온 대표적인 영화다. 스토리는 아주 단순하다. 배경은 19세기 중반 애리조나주에 있는 어느 마을이다. 남자 7형제가 산골에서 농장을 하며 살아가는데 장남 아담은 마을에 내려왔다가 식당에서 일하던 밀러와 첫눈에 반해 결혼한다. 세상과 단절되어 살던 동생들도 마을 축제장에 갔다가 동네 아가씨들에게 반해 결혼을 꿈꾼다. 결국은 아가씨들을 납치해 오게 된다. 눈사태로 길이 끊기고 긴 겨울 동안 함께 지내면서 정이 들고 봄에 모두가 결혼하게 된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황당한 요소가 많다. 그러나 19세기라는 시대 배경을 생각하면 그리 무리한 설정도 아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보쌈'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남자들은 ..

읽고본느낌 2019.11.20

조커

점점 고착화되어 가는 계급사회에 대한 경고로 읽은 영화다. 우리만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 어디나 양극화 문제는 심각하다. 부는 소수에게 편중되고 다수는 점점 가난과 소외의 사각지대에 방치된다. 계층 사이의 이동이 불가능하면 계급사회가 되는 것이다. 계급 차이는 갈등을 낳고 결국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 나오는 아서는 루저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병든 노모를 모시고 힘들게 살아간다. 영화는 그가 사회로부터 멸시와 조롱, 폭력까지 당할 때 '조커'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조커의 살인을 정당화하거나 동정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할 때 악마로 변하는 건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섬뜩하고 강렬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도 묵직하다. '조커'는 영화 '기생충'과 닮..

읽고본느낌 2019.11.19

피아니스트

이자벨 위페르를 만나고 싶어 찾아본 영화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 작품으로 2002년에 개봉된 뒤, 2016년에 재개봉된 영화다. 인간 내면의 욕망과 병적인 심리를 잘 그려낸 영화다. 짜임새도 좋고, 위페르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자기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사랑은 아니다. 사랑을 가장한 집착일 뿐이다. 에리카(이자벨 위페르 역)를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와 에리카 본인의 변태적인 사랑 방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머니와 에리카는 가정환경에서 유래한 정신적 상처를 갖고 있다. 건전한 사랑의 방식을 배우지 못한 두 사람은 파괴적인 방법으로 사랑을 표출한다. 그것이 결국 주변 사람까지 황폐시킨다. 이 영화는 19금이다. 일부 성적인 표현은 수위가 높다. 인간은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고, 이 영화는 ..

읽고본느낌 2019.11.03

해피 엔드

'다가오는 것들'에서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가 강렬하게 남아 올레TV에서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찾아보았다. '해피 엔드'는 올여름에 개봉한 그녀의 최근작이다. 자막을 보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것 같다. 만든 이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다. '해피 엔드'는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프랑스 상류층의 한 가족을 다루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속은 병들어 있다. 밝은 화면과는 대조적이다. 이 영화에서 위페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CEO로 나온다. 아들을 후계자로 키우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다가오는 것들'에서 보여준 자립적이고 지적인 여성 이미지가 워낙 강했던 탓인지, 이 영화에서는 위페르의 연기가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물질의 ..

읽고본느낌 2019.09.19

다가오는 것들

40대 중반쯤 되면 생의 전환기가 찾아오는 것 같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인생관의 변화가 일어난다. 주변 환경도 변한다. 이루고 성취하기보다 잃고 보내는 일이 늘어난다. 삶이 익숙해지는 대신 심드렁하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의 도전을 받으며 일에서도 변방으로 밀린다. 자식은 성인이 되어 더는 곁에 있어 주지 않는다. 나탈리는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재직하며 평범하지만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주부다. 성실해 보이는 남편과 십대 후반의 아들, 딸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요구받는다. 학교에서는 급진 사상을 가진 학생들과 갈등을 빚고, 출판사는 수익 문제로 책 출간을 거절한다. 성장한 자식은 나탈리에게서 멀어지고, 늘 딸에게 의지하려던 어머니도 세상을 뜬다. 이런 사건들이 순차적으로 다가..

읽고본느낌 2019.09.08

고야의 유령

스페인 여행 중에 가이드가 스페인 역사 이해를 위해 버스에서 틀어준 영화다. 화면이 작고 흔들려서 눈이 아파 그때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귀국하고 나서 올레 영화에서 다시 뽑아 보았다. 이 영화가 그리는 스페인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고야의 유령'은 18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친 스페인이 무대다. 궁정화가인 고야(Goya, 1746~1828)의 눈으로 바라본 시대의 혼란상과 인간의 사악함, 그중에서도 가톨릭의 부패와 음모를 잘 그려낸 수작이다. 당시 스페인을 지배하던 '유령'은 진리를 내세우면서 인간을 억압한 가톨릭이었다. 스페인 가톨릭계는 교리 수호를 위해 악명 높은 종교재판소를 다시 가동한다. 로렌조 신부의 마수에 이네스가 걸려들고, 저녁 식사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대교인으로 몰..

읽고본느낌 2019.07.12

기생충

지난달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다. 한국 영화 100년사에 기념이 될 성과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것이 '기생충'이 최초다. 최근에 우리나라가 문화 예술이나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해 나가고 있다. 우리의 잠재력이 깨어나 빛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하다.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라면 얼마나 대단할까, 잔뜩 기대를 갖고 아내와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관객수가 9백만을 돌파하면서 힘이 꺾였는지 넓은 극장에는 20명 정도가 앉아 있었다. 스토리는 복잡하지 않지만 이 영화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처음에는 난감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몇 시간이 흘러서야 나름의 감이 잡힌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가 '선'과 '냄새'다. 둘 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는 경계..

읽고본느낌 2019.06.20

로망

먼 남의 얘기가 아니다. 당장 내 얘기일 수 있다. 아주 가까이는 아흔 살이 다가오는 양가의 어머니가 계시고, 우리에게 지금 바로 이런 일이 닥친대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화 '로망'은 함께 치매에 걸린 70대 부부의 슬픈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같이 살던 아들 부부는 부모를 감당하지 못해서 독립해 나갔고, 집에는 부부 둘만 남았다. 동반 치매에 걸린 두 사람의 생활이 오죽하겠는가. 둘은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이순재 씨와 정영숙 씨가 부부 역을 맡아서 애틋한 인생의 마지막을 보여준다. '로망'이 작품성 있는 영화는 아니다. 마치 한 편의 TV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집,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현실성이 있기 때문에 공감을 준다. 치매에서 자유로운 집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 제목이..

읽고본느낌 2019.05.29

항거: 유관순 이야기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시절 모습이 담긴 사진 두 장이 이화역사관이 소장하고 있던 사진첩에서 발견되었다. 이화 독립운동가들 특별전을 준비하던 중 찾은 것이라고 한다. 열사의 실제 모습을 보니 전에 봤던 영화가 떠오르며 다시 가슴이 찡해진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유관순 열사가 3.1운동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된 후 모진 고문으로 숨지기까지 1년 동안의 수형 생활을 보여준다. 후기를 쓰려고 했으나 너무 슬프고 먹먹해서 컴퓨터 앞에도 글을 적을 수 없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자책도 응당 따라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울컥해지는 대사가 몇 있었는데 지금은 두 개가 떠오른다. 하나는, 망가진 몸으로 독방에 갇혀 누워 있는 유관순에게 배식 담당하던 노인이 묻는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읽고본느낌 2019.05.21

인생 후르츠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얼마 전에 타계한 키키 키린의 이런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인생 후루츠'는 90세의 슈이치 할아버지와 87세의 히데코 할머니가 전원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다. 예쁘고 맛있게 열매가 영글듯 두 분 노년의 삶이 아름답다. 마냥 부럽기만 하다. 슈이치 할아버지는 건축가다. 젊었을 때는 국가의 신도시 프로젝트 일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효율성을 앞세우는 신도시 개발이 자연과 공존하는 건축을 지향하는 슈이치와는 마찰을 일으킨다. 히데코 할머니는 얌전하고 차분한 성격에 할아버지와 철학이 맞는다. 두 분은 텃밭이 딸린 전원주택을 마련하고 그들만의 자연주의 삶을 실천한다. 꽤 ..

읽고본느낌 2019.04.17

패터슨

뉴저지주 패터슨에 사는 패터슨은 버스 기사다. 도시락 가방을 들고 출근해서 저녁까지 버스를 몰고, 퇴근해 저녁을 한 뒤에는 개를 산책시키며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신다. 단조로운 일과의 반복이다. 특이한 점은 패터슨은 틈틈이 시를 쓴다. 시 쓰기가 그의 전부라 해도 좋다. 예술가 기질을 가진 아내도 자신의 취향대로 집을 꾸미며 나름의 삶을 즐긴다. 이 영화 '패터슨'은 일견 무미건조해 보이는 패터슨 부부의 일주일 동안의 삶을 그린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현 세태와는 정반대의 생활이다. 이런 삶도 충분히 가능하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어쩌면 모든 사람의 내면에 숨어 있는 욕구인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면 단조롭고 건조한 일상이지만 똑같지는 않다. 영화는 매일 아침 침대에 같이 누워 ..

읽고본느낌 2019.02.18

보헤미안 랩소디

음악에 문외한이니 음악을 소재로 하는 영화에는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를 추천하는 소리를 반복해서 듣다 보니 느지막이 해서 보게 되었다. 서너 번씩 본 사람도 있다고 한다. 감동이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했다. 퀸이라는 록 밴드 이름은 알지만 노래는 거의 모른다. 영화를 보니 'We are the champions' 하나만 귀에 익다. 팝송이라도 컨트리풍이나 발라드 같은 조용한 음악만 골라 들으니 퀸의 음악이 마음에 다가올 수 없었다.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곡이 있는 줄도 이번에 알았다. 퀸의 네 멤버 중 보컬을 맡은 프레디 머큐리를 중심으로 시간순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이라이트는 영화의 마지막 20분을 장식하는 웸블리 구장에서의 공연이다. 퀸의 팬인 사람에게는 가슴 뛰게 할 장면이다. ..

읽고본느낌 2019.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