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 바. 라. 기.
밝은 밤 / 애쓰지 않아도 본문
최근에 읽은 최은영 작가의 소설 두 권이다. <밝은 밤>은 2021년에 나온 장편소설이고, <애쓰지 않아도>는 2022년에 나온 짧은 소설 14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밝은 밤>은 100년에 걸친 여성 4대의 이야기다. 소설의 화자는 이혼을 하고 마음이 피폐해진 30대의 지연으로 한적한 희령이라는 곳으로 직장을 옮긴다. 거기서 관계를 끊고 지내던 할머니를 만나고 할머니를 통해 가족사를 들으면서 자신의 마음이 서서히 치유되어 간다. 소설은 일제 강점기와 6.25 등 고달픈 시대 상황에 내몰린 인간의 고통을 그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살리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감명 깊게 보여준다.
백정의 딸로 태어난 화자의 증조할머니는 천대를 받으며 성장하다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개성으로 탈출하고 결혼한다. 그러다가 전쟁을 만나 대구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나중에는 희령에 정착한다. 이때 옆에서 힘이 되어준 사람이 비슷한 처지의 새비 아주머니이다. 평생을 이어지는 둘의 우정과 연대는 눈물겹다. 아랫대인 할머니(영옥)와 희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가까운 가족한테서는 버림을 받거나 소통이 되지 않으나, 이웃과 주고받는 정의 따스함으로 험한 세상을 버텨나간다.
소설에서는 군데군데 울컥해지는 장면이 나온다. 새비네와 할머니네는 새비의 고모인 명숙 할머니 집에서 피난살이를 한다. 명숙 할머니의 캐릭터가 특이하다. 무뚝뚝하면서 살갑게 표현을 하지 않지만 정이 깊다. 명숙 할머니는 군말 없이 어려운 두 집 식구를 받아주고 힘든 시기를 같이 헤쳐나간다. 영옥이네가 희령으로 떠나는 날의 모습이다. 다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지만 명숙 할머니는 여느 때의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런 담담함이 오히려 슬픔을 배가시킨다.
"고모, 이리 와보라요. 영옥이네 지금 간다 하지 않아요."
명숙 할머니는 새비 아주머니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가 작게 입을 벌려서 뭐라고 말했다. 소리가 너무 작아서 새비 아주머니가 조금 더 크게 말해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명숙 할머니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 가라."
그렇게 말하고는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설 뒷 부분에 지연이 지하철에 탄 옆 승객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에는 귀찮아했으나 이제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가 서로 어깨를 내어주고 기댈 때 험한 세파를 헤쳐나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지연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밝은 밤'이라는 제목의 의미이기도 하지 않을까.
<애쓰지 않아도>는 <밝은 밤>의 여운에 묻혀 스쳐가듯 읽었다. 짧은 소설이라 가볍게 읽기 좋다. 여성이나 약자를 향한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