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 바. 라. 기.
전주에서 닷새 본문
안산 처제집에 머물던 장모님을 모시고 전주에 내려갔다. 막내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장모님 건강은 많이 회복되셨다. 하지만 아무리 자식이 잘해 줘도 불편한가보다. 내 집에 갈 수 있다고 무척 좋아하셨다.
- 첫째 날
장모님은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센터로 나가셨다. 나는 오후에 전주천에 나가 짧은 걸음을 했다. 버드나무에 돋아난 연두빛 잎이 봄이 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저녁에 센터에서 돌아오신 장모님은 격한 환영을 받았다면서 얼굴이 환하게 밝았다.

- 둘째 날
아내와 같이 전주수목원에 갔다. 올 첫 매화가 반가웠다.


무더기로 모여 핀 영춘화.

온실 안에서 우산 모양으로 펼쳐진 특이한 형태의 식물을 보았다. 명찰에 '큰열매시계초'라고 적혀 있다.


다가공원으로 이동하여 아내의 옛날 다가동 시절을 추억했다.


다가공원 밑에 신흥과 기전이 있다. 'since 1900'이라니, 신흥학교가 이렇게 역사가 오랜 줄 처음 알았다. 일제 말기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스스로 학교 문을 닫았다고 한다. 신흥 뒤에 기전이 위치하고 있는데 중고등학교는 이전하고 현재는 기전대학이다.


- 셋째 날
저녁 식사를 포식한 탓에 부른 배를 달래려 집 주변을 산책했다.


- 넷째 날
장모님을 모시고 김제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진료 뒤 바깥바람을 쐬러 서해 선유도로 갔다. 새로 개통한 '새만금-전주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새만금방조제를 거쳐 선유도까지 가면서 한적하고 멋진 드라이브를 즐겼다.
사람 드문 선유도해수욕장은 맑고 고요했다.



신시도에 있는 방조제 갑문과 기념탑.


- 다섯째 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옥천에 있는 시인 정지용(1902~1950) 생가에 들렀다.


생가 옆에 정지용 문학관이 있고,

문학관 마당에 시인의 시 '호수'가 적혀 있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여기가 시인이 노래한 그 실개천이구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육영수 생가가 있었다. 옥천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부자일 줄은 몰랐다. 정지용의 초라한 지붕의 초가집과 대조되었다.




이 휘호를 쓴 날짜가 1974년 9월 5일로 되어 있다. 그분이 돌아가신 날이 8월 15일이니 유령이 쓴 걸까, 깜짝 놀랄 뻔했다. 그래선지 귀퉁이에 설명이 붙어 있다. 부산 어린이회관 개관일에 맞춰 쓴 것이라고. 그렇다면 이 글씨가 여사의 마지막 휘호였을지 모른다. 글씨는 그분의 성품대로 참하고 단정하다.

옥천향교.

마침 가까이에 향수호수길이 있어 걸었다. 대청호를 끼고 난 이 길은 전체 길이가 5.6km로 왕복 3시간 반이 걸린단다. 우리는 맛보기로 물비늘전망대까지만 다녀왔다.



산길에서 마주 걸어오는 수녀님을 만났다. 혼자 조용히 걸어오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무심결에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보통 때는 내가 먼저 하지 않는 인사였다. 지나쳐가는 수녀님한테서 "네" 하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내 손을 꼬집으며 말했다. "수녀님 기도하며 가시는데 말 거는 거 아니야."
길 옆 호숫가에 이런 탐나는 집이 있었다. 사람 사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 묻혀서 살고 싶어라.

장모님이 새 출발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 함께 있는 동안 말동무를 해 드린 것에 위안을 받는다. 장모님은 고생을 시켜서 어떡하냐며 연신 걱정이지만 실은 오가면서 이곳저곳 들린 내 개인 여행이기도 했다. 차 운전도 효도를 겸한 드라이브라고 생각하면 즐거운 일이다. 이만하면 만사가 고맙지 않은가. 그래, 이만하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