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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

마음이 울적한 탓인지 '여유당'을 찾고 싶었다. '여유당(與猶堂)'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로 다산이 태어날 당시는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마재마을)였지만,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되어 있다. 선생이 형조참의로 있던 1799년(정조23년)에는 선생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정조의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천주교와의 연루 등 정치적 비판을 견디지 못한 다산은 이듬해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 마재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 '여유당'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은신했다. 선생은 이렇게 썼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謨)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 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

사진속일상 2020.07.11

2020 세미원 연꽃

연꽃이 필 때면 매년 세미원을 찾는다. 비 예보가 있는 날, 2020년의 연꽃을 보러 세미원에 갔다. 연꽃을 감상하는 데는 맑은 날보다는 흐리거나 비 오는 날이 더 낫다. 연꽃밭에서 한가로이 앉아 차라도 한 잔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세미원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북적인다. 서울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이날도 휴일인가 싶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곱기로 치면 발그레 익어가는 연꽃 색깔에 비길 꽃이 있을까? 어느 시인처럼 나도 묻는다. "아수라의 늪에서 / 오만 번뇌의 진탕에서 / 무슨 / 저런 꽃이 피지요?"

꽃들의향기 2020.07.10

개구리와 소년

연못가에서 놀던 소년들이 물속에 많은 개구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많은 개구리가 돌에 맞아 죽은 뒤, 용감한 개구리 한 마리가 물 위로 고개를 내밀며 소년들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그 잔인한 장난은 그만둬라! 너희는 장난으로 돌을 던지지만, 우린 돌에 맞아 죽는단 말이야!" 에 나오는 이야기다. 부지불식간에 하는 행동이 타자에게는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요사이 이 이야기가 실감나게 들린다. 내가 개구리의 심정이 된 것 같아서다. 층간소음 스트레스는 내 생활과 껌딱지처럼 붙어 있다. 무려 10년 가까이 된다. 심할 때는 뭔가 조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좀 덜해지면 참고 지내보자고 하며 살아왔다.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제삼자나 관리사무소를 통해 당부해도 별 소..

참살이의꿈 2020.07.09

동네 한 바퀴(7/7)

구름이 낄 때를 기다려 동네 한 바퀴에 나섰다. 산이라면 몰라도 햇볕이 쨍한 날의 동네길 걷기는 아무래도 무리다. 고등학교 동기들은 요사이 하루 만 보 걷기가 유행이다. 결과를 모아 가을에 시상을 한다고 한다. 방에 들어가 보면 각자가 올린 하루에 걸은 통계가 가득하다. 많이 움직이는 사람은 하루에 3만 보 이상씩 걷고 있다. 과유불급이 아닐까, 내가 괜히 걱정된다. 나는 사흘에 한 번 정도 바깥출입을 할 뿐이니 감히 도전을 못하고 있다. 작은 고개를 넘으면 이웃 마을로 넘어간다. 걷는 길 주변은 텃밭과 주택이 혼재하고 있다. 사람들은 조각만한 땅이라도 알뜰살뜰 뭔가를 심는다. 어느 집 마당에서는 새끼 고양이 세 마리가 오수를 즐기고 있다. 장마철이지만 큰비가 아직 오시지 않아 목현천은 개울물 정도로 졸..

사진속일상 2020.07.08

미래가 쏟아진다면 / 김소연

나는 먼 곳이 되고 싶다 철로 위에 귀를 댄 채 먼 곳의 소리를 듣던 아이의 마음으로 더 먼 곳이 되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할까 꿈속이라면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악몽을 꾸게 될 수도 있다 몸이 자꾸 나침반 바늘처럼 떨리는 아이가 되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몸이 자꾸 깃발처럼 펄럭이는 아이가 되어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무녀리로 태어나 열흘을 살다 간 강아지의 마음으로 그 뭉근한 체온을 안고 무덤을 만들러 가는 아이였던 마음으로 꿈에서 깨게 될 것이다 울지 마, 울지 마 라며 찰싹찰싹 때리던 엄마가 실은 자기가 울고 싶어 그랬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가 될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여기에 와서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든다 꿈이라면 잠깐의 배웅이겠지만 불행히도 꿈은 아니라서 마..

시읽는기쁨 2020.07.07

서울 집값

노무현 정권의 데자뷔를 보는 것 같다. 진보 정권을 자칭하는 무리가 집권하면 부동산이 한바탕 춤을 춘다. 전국적인 현상은 아니고 주로 서울에 국한되지만, 서민을 위하겠다는 정부가 서민의 가슴에 허탈과 좌절의 대못을 박고 있다. 도대체 문재인 정권이 집값을 잡을 의지가 있는지가 의문이다. 집값을 잡겠다는 시늉만 하는 것 같아 더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청와대 참모부터 다주택을 처분하겠다고 한 약속이 언젠데 아직도 눈치만 보고 있다. 그러다가 다급해지니 무슨 수석이라는 자는 두 채 중 강남 집은 그대로 두고 지방에 있는 집을 팔겠다고 한다. 눈속임도 격이 있어야지, 이런 질 낮은 코미디는 없다. 구중궁궐에 있는 몇 명이서 집이 한 채니 열 채니 싸우지 말고 정책이나 제대로 세워라. 국민은 속으로 비아냥거린다..

길위의단상 2020.07.06

바이러스의 습격

세계보건기구에서는 향후 미래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3대 요소로 식량 부족, 기후 변화, 전염병 유행을 지목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전염병 유행은 하찮게 생각했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세균이나 바이러스 정도는 충분히 방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19에 의한 팬데믹 사태로 생각이 바뀌었다. 만약 전염력이나 치명률이 높은 변종이 나타나면 문명만 아니라 인류 생존마저 위협 받을 수 있다. 인류가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코로나19가 보여주고 있다. 은 바이러스 전문가인 최강석 선생이 쓴 바이러스에 대한 안내서다. 중고등학생이면 넉넉히 이해할 정도로 쉽게 쓴 책이다. 책에서는 1918년 스페인 독감부터 2002년의 사스, 2009년의 신종플루에 이르기까지 20세기와 21세..

읽고본느낌 2020.07.05

메멘토 모리

로마 시대 때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하면 환영 퍼레이드를 했다. 당사자는 마치 최고 권력자나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 장군 옆에 탑승한 노예가 개선 행진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장군에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외쳤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는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잔칫날에 재 뿌리는 격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이런 관습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게 대단하다.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잘 나갈 때 도리어 겸손하게 행동하라. 교만하지 말라."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한다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의식은 현재 삶에 대한 성찰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메멘토 모리'와 비슷한 말로 '이 또한 ..

참살이의꿈 2020.07.04

7월 뒷산

여름에는 뒷산을 거의 가지 않는다. 집요하게 달려드는 모기를 비롯한 날벌레 때문이다. 이놈들은 한 번 목표를 정하면 절대 포기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덤벼든다. 산길을 걷는 건지, 이놈들과 싸움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된다. 너무 성가셔서 아예 여름산은 가지 않는다. 뉴질랜드 밀포드 트레킹을 할 때 사용했던 얼굴 방충망을 꺼냈다. 밀포드의 샌드플라이 공격은 악명이 높다. 좀 불편하더라도 이걸 덮어쓰고 뒷산에 올랐다. 성가신 날벌레는 물리칠 수 있는데 대신 시야가 흐리고 답답하다. 그래도 쓰는 편이 훨씬 낫다. 살아가면서 귀찮게 하거나 성가시게 하는 근심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름 날벌레쯤이야 산에 가지 않으면 된다. 얼굴 방충망이나 해충 기피제도 있다. 그러나 인생사에서는 내 힘으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

사진속일상 2020.07.03

물 끓이기 /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 버리..

시읽는기쁨 2020.07.02

금강경[24]

"수보리여, 여기 십억이나 되는 우주, 그 가없는 우주에 흩어져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미산들이 있고, 누군가 이 수미산들만큼 많은 일곱 가지 보배를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고 한다면,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가르침 가운데 네 구절의 게송만이라도 삶으로 받아 지녀 즐겨 읽고 절로 외우고 이웃들과 함께 나눈다면 앞의 공덕은 이 공덕에 백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만억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나아가 어떤 셈이나 말로도 미칠 수가 없겠습니다." - 금강경 24(견줄 수 없는 복과 지혜, 福智無比分) '성불(成佛)하십시오'는 불자들의 인사로 알고 있다.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으라는 축원일 것이다. 예수를 닮는다는 '예닮'도 같은 의미라고 본다. 인류의 큰 스승님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

삶의나침반 2020.07.01

기생초

북아메리카 원산의 원예식물로 여름이면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화려한 노랑과 진홍으로 된 색깔이 멀리서도 눈에 확 띈다. 그래서 이름이 '기생초(妓生草)'인가 보다. '기생꽃'이라는 비슷한 이름을 가진 다른 꽃도 있다. 기생꽃은 흰색으로 기생초보다는 훨씬 우아하고 품위가 있으며 만나기도 어렵다. 기생초는 국화과에 속하는데 제일 닮은 꽃은 금계국이다. 금계국이 지고 나면 기생초가 핀다. 기생초 설명에 보면 꽃이 7~10월에 핀다고 하는데, 경안천 기생초는 6월 말인데 벌써 지고 있다. 꽃 색깔이 너무 요란한 면이 있지만, 기생초 꽃밭을 멀리서 보면 꽤 아름답다. 화려한 자태로 시선을 끌어당기는 꽃이다.

꽃들의향기 2020.06.30

어머니 생신 모임

이번에 어머니가 구순을 맞으셨다. 예전에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였다. 지금은 백세시대라지만 그래도 구십이라는 나이는 쉽게 주어지는 혜택은 아니다. 비록 작은 동네긴 하지만 고향에서는 현재 어머니가 최고령이시다. 내가 나가는 한 모임의 회원 열 명 중에는 현재 생존하신 부모님이 딱 두 분 계신다. 확률이 10%인 셈이다. 원래는 이모와 고모, 그리고 조카까지 초대하는 모임을 계획했었다. 그런데 코로나라는 변수가 생겼다. 어머니는 이런 판국에 무슨 생일 행사냐고 손사래를 치셨지만 자식 처지에서는 모른 척 넘길 수 없었다. 형제만 함께 하는 간소한 모임으로 축소하고 펜션 독채를 빌렸다. 손주도 오라 하지 않았다. 음식점에서의 외식 대신 펜션 안에서 모든 걸 해결했다. 청풍호반 케이블카도 예약했다가 마..

사진속일상 2020.06.29

시옷의 세계

김소연 작가 하면 이 먼저 떠오른다. 그 책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하게 남아있어서다. 마음을 지긋이 또는 예리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감성에 빨려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작가는 과연 어떤 분일까, 궁금했는데 이 책이 조금은 해결해줬다. 는 시옷으로 시작하는 낱말을 주제로 하여 작가의 속내를 드러낸 책이다. 사라짐, 사소한 신비, 산책, 살아온 날들, 상상력, 새기다, 새하얀 사람 등 서른네 항목으로 되어 있다. 글 속에는 작가의 삶과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부제가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이다. 선택적 가난과 고결한 정신의 아름다움을 작가는 삶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세상을 따라가느라 우리가 내팽개친 잊혀진 가치들을 다시 소환한다. 우리가 누리는 윤택함이 얼마나 많은 이에게 빚지고 있는지..

읽고본느낌 2020.06.27

경안천에 나가다

석 달 만에 경안천에 나갔다. 코로나 이후로 몸을 움직이는 활동량이 많이 줄어들었다. 걷기를 목적으로 하는 바깥출입은 코로나 이전의 1/3쯤 되는 것 같다. 그래도 몸무게는 별 변화가 없는 게 신기하다. 덜 걷는 대신 식사량도 그만큼 감소한 탓이 아닐까. 인간은 어쨌든 환경에 맞추어 살아가기 마련이다. 밖에 나오면 열심히 걷기보다 카메라를 들고 이것저것 찍어보는 게 취미다. 사라져가는 존재의 애틋함에 멍하니 바라볼 때가 가끔 있다. 풀, 달팽이, 구름이기도 하고, 넓은 풍경이기도 하다. 사진을 찍는 것은 이들과의 작은 눈맞춤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스쳐지나갈 것을 한 번 더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 사진 찍기가 아닐까. 천변 산책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한산하다. 사람이 들어간 풍경을 찍으려면 한참 기다려야..

사진속일상 2020.06.26

비가 오신다 / 이대흠

서울이나 광주에서는 비가 온다는 말의 뜻을 알 수가 없다 비가 온다는 말은 장흥이나 강진 그도 아니면 구강포쯤 가야 이해가 된다 내리는 비야 내리는 비이지만 비가 걸어서 오거나 달려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어떨 때 비는 싸우러 오는 병사처럼 씩씩거리며 다가오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그 병사의 아내가 지아비를 전쟁터로 보내고 돌아서서 골목길을 걸어오는 그 터벅거림으로 온다 그리고 또 어떨 때는 새색시 기다리는 신랑처럼 풀 나무 입술이 보타 있을 때 산모롱이에 얼비치는 진달래 치마로 멀미나는 꽃내를 몰고 오시기도 하는 것이다 - 비가 오신다 / 이대흠 농경사회에서는 자연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비나 바람에 대한 표현이 발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비 이름만 해도 수십 가지를 헤아린다. 실비 /..

시읽는기쁨 2020.06.25

소래포구

육젓을 사러 아내와 함께 소래포구에 갔다. 아내는 처음으로 새우젓을 담가보고 싶다고 했다. 소래에 간다니까 이웃집에서도 부탁을 해서 초보자가 심부름까지 했다. 소래는 지금이 새우철이다. 서해안이 대부분 그런 것 같다. 새우 종류에 오젓, 육젓, 추젓이 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새우가 잡히는 때에 따라 구분하는데, 육젓은 음력 유월에 나오는 새우로 살이 통통하고 단맛이 많아 반찬용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소래포구는 새우를 사러 온 사람으로 북적였다. 우리만 빈손이었지 다들 스티로폼이나 플라스틱 통을 가지고 왔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사람이 많이 몰리는 가게에서 사람들 틈에 묻어서 샀다. 좁은 포구에서도 잘 되는 가게가 있고, 그렇지 않은 가게가 있다. 우리도 거기에 일조를 한 셈이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

사진속일상 2020.06.24

해 뜨는 집

고등학교에 다닐 때 토요일 4교시는 HR이었다. HR은 'Home Room'의 약자로 글자 뜻과는 상관없이 학급 회의를 하는 시간이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하면서 회의 절차는 따랐으나 거의 형식적이었다. 회의 내용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는 아이가 없었다. 발언도 거의 농담 따먹기 식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회의를 시작하는 것만 보다가 교무실로 내려가셨다. 그러면 반장은 적당히 회의를 마무리하고 칠판에 'Home Room' 대신 큼지막하게 'Happy Recreation'이라 바꿔 적곤 했다.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2학년 때 반장이었던 Y는 오락부장을 겸했는데 학교 생활을 즐겁게 하자는 주의였으므로 아이들한테 인기가 있었다. 'Home Room'에서 'Happy Recreation'으로..

길위의단상 2020.06.23

백석리 상수리나무와 회화나무

충남 당진시 순성면 백석리에 있는 상수리나무다.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백석보건진료소에 들어갔다. 마침 소장님께서 이 나무를 기억하고 계시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셨다. 한쪽 가지가 잘려서 균형을 잃었지만 나무는 전체적으로 훤칠한 멋쟁이다. 상수리나무는 참나무 형제들 중 하나다. 흔한 나무 중 하나지만 이렇게 독야청청 장수하고 있으니 특별하다. 수령은 230년이지만 줄기는 윤기가 날 정도로 싱싱하다. 나무 높이는 25m, 줄기 둘레는 3m다. 상수리나무와 가까운 곳에 회화나무가 있다.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에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다. 나무 옆에 정자가 있지만 마을 주민이 자주 이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 나무의 수령은 약 400년으로 추정하고, 나무 높이는 18m, 줄기 둘레는 4.1m이다.

천년의나무 2020.06.22

2020년 부분일식

하지인 오늘(6월 21일) 우리나라에서는 부분일식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집 밖으로 나가 일식 사진을 시도해 보았다. 구름이 살짝 태양을 가려주기를 기대했으나, 구름 한 점 없이 완전히 쨍한 날이었다. 이렇게 되면 태양과 하늘이 너무 밝아서 주변 풍경과 조화를 맞추기 어렵다. 오늘 일식은 오후 3시 53분부터 6시 4분까지 2시간 11분 동안 관찰할 수 있었다. 오후 5시 2분에 태양의 45%가 가려지는 최대식이었다. 카메라를 만지다 보니 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번에 인도, 중국 남부, 대만을 잇는 긴 띠 모양의 지역에서는 개기일식이 일어났다. 대만은 가까우니 개기일식을 보러 작년에 여행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엄두도 낼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0년 뒤인 2..

사진속일상 2020.06.21

히말라야 환상방황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에는 두 코스가 있다. 하나는, ABC라 불리는 베이스캠프 트레킹으로 안나푸르나 주봉 아래 베이스캠프(4,130m)까지 갔다 돌아오는 코스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을 만큼 무난하다. 둘은, 안나푸르나 산군을 한 바퀴 도는 라운딩 코스로 난이도가 높다. 5,416m인 쏘롱라패스를 지나는 111km 길이다. 이 책 은 정유정 작가가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를 다녀온 기록이다. 2013년 9월 5일에 베시사하르를 출발하여 9월 21일에 나야폴에 도착했다. 총 17일이 걸렸다. 작가는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을 안나푸르나 트레킹으로 잡았다. 답답한 일상의 탈출구로 히말라야를 선택했다. 동행은 후배 작가였다. 가이드와 포터, 그리고 여자 둘이 한 팀이 되어 히말라야를 ..

읽고본느낌 2020.06.21

석촌호수 산책

서울에 나간 길에 석촌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두 시간의 여유가 있어 느릿느릿, 쉬엄쉬엄, 여기저기 기웃기웃하며 거북이걸음을 했다. 석촌호수의 정식 명칭은 송파나루공원이다. 원래 송파나루터가 있던 곳으로 한양에서 각 지방으로 이어지는 뱃길의 요지였다. 과거 잠실 쪽 한강에는 부리도(浮里島)라는 섬이 있었고, 한강이 두 갈래로 나누어져 흘렀다. 1971년에 부리도의 남쪽 물길을 폐쇄하고 섬을 육지화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그때 막은 남쪽 물길이 지금의 석촌호수로 남게 되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석촌호수 옆에서 3년 정도 살았다. 80년대 중반이었다. 그때는 휴일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에 자주 놀러 나왔다. 송파나루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한 초기 단계였다. 아득한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공원 벤치에는 ..

사진속일상 2020.06.20

성지(25) - 솔뫼, 원머리, 신리

38. 솔뫼성지 솔뫼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탄생한 곳이다.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립된 직후부터 김대건 신부의 증조할아버지 김진후 비오(1814년 해미에서 순교), 작은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1816년 관덕정에서 순교), 아버지 김재준 이냐시오(1839년 서소문에서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았던 장소다. 김대건 신부는 '한국의 베들레헴'이라 불리우는 이곳에서 1821년 8월 21일 태어나, 1836년 마카오에서 사제수업을 받았으며, 1845년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 1846년 9월 16일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1925년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1984년..

사진속일상 2020.06.19

학현리 은행나무

고려 명종 때였다. 젊은 스님이 이 마을 과수댁의 아름다운 미모에 반해 점잖지 못한 행동을 했다. 화간 난 과수댁이 스님을 크게 꾸짖었다. 스님은 한 순간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 자리에서 고행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마을 사람들은 스님의 죽음을 측은히 여겨 은행나무를 심었다. 경기도 평택시 안중읍 학현리에 있는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이다. 전설대로라면 수령이 800년이 넘는다. 그만큼 크고 우람하다. 은행잎에 가려 거대한 줄기는 볼 수 없다. 아쉽게도 나무가 자라는 자리가 옹색하다. 나무를 두른 철망도 너무 조잡하다. 나무의 가치를 살리는 좀더 세심한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

천년의나무 2020.06.18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서른 전, 꼭 되짚어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린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 아는 체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 속맘으론 낼, 모레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 소리로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지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여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 라고 두 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 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부턴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끈한 국밥 한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

시읽는기쁨 2020.06.17

금강경[23]

"수보리여, 또한 이 진리는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기에 위 없이 바른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있는 나' '죽지 않는 나' '바뀌지 않는 나' '숨 쉬는 나' 같은 이 모든 나가 없이 온전한 가르침을 닦으면 위 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수보리여, 여래는 '온전한 가르침이란 온전한 가르침이 아니라 온전한 가르침이라 이름할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 금강경 23(나를 비우고 온전하게 사는 삶, 淨心行善分) 이 분(分)의 제목에 나오는 '정심(淨心)'은 '깨달은 이의 마음'으로, '행선(行善)'은 '이 마음이 밖으로 드러남'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깨달음과 실천이야말로 불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즉, 지혜와 자비다. 은 더 근원적인 부분을 짚는다. 지혜는 '지혜 없는 지혜'이고, 자..

삶의나침반 2020.06.16

막걸리 한 병

코로나19로 집에서 혼자 술을 홀짝이는 빈도가 늘었다. 바깥 모임을 삼가다 보니 다른 사람과 대작할 기회가 줄어들고 부득이 독주(獨酒)를 할 수밖에 없다. 이는 오히려 내가 즐기는 바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 피곤할 뿐이다. 혼자 술을 마시는 재미가 훨씬 좋다. 제일은, 남의 눈치를 안 봐도 된다. 쓸데없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헛소리를 하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얼마 전에 동기 모임을 오랜만에 나갔다. 의도치 않게 시국 얘기가 나오고 말싸움이 벌어졌다. 대개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지만 얼근해지면 나도 모르게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면 서로가 어색해진다. 술맛이 싹 달아났음은 물론이다. 파한 자리 뒤에 남는 건 자책밖에 없다. 혼자 마실지라도 내 앞에는 가상의 파트너가 있다. 눈에 안 보이는 파트너지..

참살이의꿈 2020.06.15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현장 실습생으로 CJ에서 일하던 특성화고등학교 김동준 학생은 회식 자리에서 선임자한테 뺨을 맞았고, 며칠 후 회사 기숙사 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직접적인 계기는 폭행이었지만 그 전에 과도한 업무와 강압적인 회사 분위기가 있었다. 2014년 봄에 일어난 일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기 위해 동아마이스터고등학교에 들어간 김 군은 현장 실습을 나가서는 전혀 엉뚱한 일을 배정받았다. 햄과 소시지를 만드는 진천 육가공공장에 배치된 것이다. 학교에만 있다가 갑자기 현장에 나가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모든 실업계고등학생이 겪는 문제지만 사회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라는 말이 나온다. 은 은유 작가가 김 군의 주변 사람을 인터뷰한 르포르타주다. 김 군 가족..

읽고본느낌 2020.06.14

여기 있는 게 좋아

텃밭을 부치는 이웃이 세 집이나 있다. 덕분에 야채는 떨어지지 않고 얻어먹는다. 연초에 아내가 우리도 텃밭을 하나 해 볼까, 라고 했는데 나는 거절했다. 여기는 조건이 좋다. 집 가까이에 노는 땅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경계를 긋고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작물 가꾸는 것도 시들해졌다. 귀찮기도 하고 무엇에 매인다는 게 싫다. 대신 이웃이 부치는 텃밭은 가끔 들린다. 오늘 오후에 텃밭에 나가는 이웃을 따라나섰다. 방 한 칸 정도 되는 넓이의 땅뙈기에는 상추, 배추, 쑥갓, 완두콩, 고추, 딸기가 심겨 있다. 주변에는 고만고만한 텃밭들이 있고, 가끔 밭에 나와 있는 다른 사람과도 만난다. 오늘은 할머니 한 분이 옆에서 일하고 계셨다. 서로 아는 사이인지 이웃분은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

길위의단상 2020.06.13

서울숲-남산길을 걷다

나갈까 말까 망설였다. 수도권에서는 코로나가 확산 중이라 모임을 자제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래도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이 모임은 지난번에 취소되어서 넉 달 만에 만나는 거였다. 야외 걷기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경떠회 여섯 명이 모였다. 가볍게 생각하고 작은 숄더백만 하나 걸쳤다. 이 여름에 물조차 준비하지 않았다. 남과 물통을 공유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갈증을 오래 참아야 했다. 구름이 껴 햇빛을 막아주었지만 습도가 높아 쉬이 지치는 날이었다. 서울숲-남산길은 성수동 서울숲과 남산을 연결하는 길이다. 서울숲, 응봉산, 대현산, 금호산, 매봉산을 넘어 남산까지 연결된다. 우리는 옥수역에서 만나 응봉산에 올랐다. 응봉산은 봄 개나리로 유명하다. 꼭대기..

사진속일상 2020.06.13